#189화. 第三十八章 암살(暗殺) (4)
아걸은 스물여섯 명과 싸웠다.
물론 스물여섯 번 모두 졌다.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중 두 번은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했지만, 스물네 번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졌다.
아걸은 한 사람당 이틀 혹은 사흘씩 무예를 겨뤘다. 비무 횟수로 치면 스무 번이 넘는다. 승패가 결정되고, 또 싸우고 진다. 그러면 또 도전한다.
아걸은 정말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웃기는 것은 아걸이 말도 안 되는 도전을 해도 상대방은 순순히 받아 준다는 것이다.
대체로 비무란 한 번 겨루고 승패가 정해지면 끝나는 법이다. 비무를 했는데 졌다고 해서 ‘또 하자, 또 하자’고 계속 떼를 쓴다는 것은 어린애 싸움에서나 볼 수 있다.
상대는 아걸이 두 번, 세 번 도전해 와도 다 받아 주었다.
그들은 분명히 이겼지만,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 역시 왜 확실하게 이겼는데도 꼭 패한 기분이 드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같이 가지?”
“싫다.”
“싫으면 관두고. 아무나 따라올 수 있는 건 아냐. 자격이 되니까 물어본 건데, 가기 싫다면 마는 거지.”
“웃기는 놈이군. 미친놈 졸졸 따라가는 데 무슨 자격이 필요하다고 헛소리야?”
“자격도 많이 필요하지. 첫째, 아걸이 도전해야 한다. 아걸이 도전하는 자는 일단 고수라고 인정받은 셈이거든.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지만, 진짜 고수인 거지.”
“그리고?”
“연속 비무.”
“……”
“비무를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틀, 사흘 계속 요청할 때는 무엇인가 배울 게 있다는 것이거든. 그런 사람은 언제든 아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고. 그리고, 궁금하지 않아?”
“뭐가? 다음 상대?”
“다음에 어떤 자에게 비무를 청할지도 매우 궁금하지. 하지만 누가 되었든 나보다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네 눈에는 내가 성이 차지 않겠지만, 내 눈에는 네가 하수로 보여. 솔직히 우리 서로 자신 있는 상대 아닌가?”
“하하…….”
“다음 상대는 궁금할 게 없고…… 허도기. 허도기 검이 궁금하지. 아걸이 허도기를 넘을지, 허도기가 아걸을 무너트릴지. 허도기 검을 네 번이나 맞았는데, 그 정도면 상대가 안 된다는 거잖아. 그 차이를 이 개월 안에 어떻게 극복해 낼까?”
“이 개월이라고?”
“그래. 아걸은 이 개월 후 성검문 혈무대에서 비무를 한다.”
“그건 명부판관…… 잠깐, 그러면 혈도비자가 명부판관이라고? 하!”
“이제 결정해. 보고 싶으면 따라오는 거고, 말고 싶으면 눌러앉고. 강요는 안 해.”
그렇게 스물여섯 명 중 스물한 명이 은거를 깨고 아걸의 끌을 보고자 뒤를 쫓았다.
정작 당사자인 아걸은 권유조차도 하지 않았다. 비무가 끝나고 돌아서면 그것으로 끝이다.
쫓아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손승이 따라올 때는 말벗이라도 했지만, 인원이 늘어나니 한마디씩만 해도 스무 마디나 해야 한다.
아걸을 쫓는다고 해서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따라왔다. 본인 스스로 먹고 마시고 잠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식사 시간도 각기 다르다. 배고프면 먹는다. 다른 사람의 눈치는 일절 보지 않는다. 피곤하면 일행과 떨어져서 쉰다. 일행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 부지런히 쫓아가면 된다.
물론 공동으로 생활할 때도 있다.
저녁에 잠자리를 마련할 때는 모두가 같이 협조해서 땅을 다듬고, 불을 피운다.
같이 움직이니 무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생활을 혼자서 하니 무리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일정 부분 협력하는 면이 있지만, 근본은 혼자다.
이들이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아걸 때문이다.
아걸이 혼자다.
아걸은 어떠한 도움도 원치 않는다. 아걸은 조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따라오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귀찮을 뿐이다.
확실히 아걸은 이들이 따라나서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들 중에는 손승처럼 순수한 의도로 따라 나온 사람도 있지만, 이 정도 칼들이라면 거대한 조직을 형성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서 따라나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 속을 어떻게 알까.
이들이 은거한 이유는 모두 제각각이다.
손승은 세상에 염증을 느낀 주인 잃은 칼이고, 쌍겸은 살인하고 도망 다니는 낫이다.
스스로 은거한 사람도 있고, 타인에게 억지로 떠밀려서 숨은 사람도 있다. 정도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고, 사마외도에 길든 사람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만한 칼들이 모이면 대단한 조직이 된다는 거다.
누군가에게는 이들과의 인연이 세상을 딛고 일어설 발판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 * *
아걸은 뱀딸기를 잔뜩 땄다.
그것을 물에 씻어서 펼쳐 놓고 하나씩 집어 먹는다.
뱀딸기를 먹는 동안에도 한 손으로는 꾸준하게 젓가락을 휘둘리고 있다.
“저거 먹고 견딜 수 있나?”
“견디잖아.”
“저것도 많이 먹질 않아. 나 같으면 배고파서 미치고 환장할 텐데. 정말 희한해.”
“궁금하면 따라서 해 봐.”
“난 못 견딘다니까? 하하하.”
사람들은 잠잘 준비를 했다.
아걸은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좌정한다. 그리고 새벽이 될 때까지 눈을 뜨지 않는다. 물론 그동안에도 젓가락은 계속 돌린다. 운기를 하면서도 돌린다.
운기를 하면서 어떻게 젓가락을 돌리는지 모르겠다.
이것도 하나의 절공이라면 절공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기이한 행공이다.
아걸은 내일 아침이 될 때까지 침묵할 것이다.
혈사창(血蛇槍)은 아걸의 여섯 번째 상대다.
아걸과 비무가 끝나고, 같이 가자는 권유를 받았을 때 두말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아걸이 상당히 궁금했다.
진기조차 싣지 않은 칼로 어떻게 자신의 창을 막을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자신이 너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걸과 같이 있는 자들을 보니 한결같이 맹수다. 자신에 못지않다. 세상 밖으로 나가면 당장 무명을 얻고도 남을 정도로 뛰어난 무인들이다.
그들 모두가 진기 없는 칼에 당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당한 것은 아니다. 이겼다. 아걸이 마지막 공격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이겼으면서도 진 듯 찝찝한 느낌이 드니 더 견디지 못하겠다.
혈사창은 홀몸이다. 그러니 거리낄 것도 없다.
아걸을 따라나선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 모아 놓은 재산도 없고 아끼는 사람도 없다. 혈혈단신이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기에 망설임 없이 따라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길을 가면서 혼자 숙식을 해결한다는 것은 귀찮기 이를 데 없다.
물론 재미있기도 하다.
오랜만에, 옛날 창술을 배울 때의 느낌이 다시 솟는다.
푸르르르륵!
모닥불 위에 올려놓은 쇠솥에서 물거품이 푸르륵 솟구쳤다. 김도 올라왔다.
혈사창은 솥 밑에서 불을 뺐다.
그는 아걸처럼 뱀딸기만 먹고는 살지 못한다. 다른 자들은 육포 같은 것을 먹지만, 그는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면 허기져서 견디지 못한다.
산속일지라도 제대로 밥을 해 먹어야 한다. 그러니 솥이며 쌀이며 짊어지고 다니는 짐이 무척 많다. 지게로 작은 꾸러미 두 개는 지고 다닌다.
푸르르륵!
잔불로 뜸을 들인다.
“앞으로 두 달이면 이 고생도 끝난다. 하아! 아직은 허도기를 이길 무기가 없는 것 같은데. 두 달 안에 뭔가를 얻어? 어림없을 것 같은데…….”
혈사창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밥 냄새를 맡았다.
아걸을 쫓아다니는 기간은 정해져 있다. 두 달이다.
명부판관이 혈무대에서 성검문주와 비무하기로 한 약속이 천하에 공표되어 있다.
그 비무를 보고자 쫓아다닌다.
하지만 막연히 두 달 후에 있을 비무만 쳐다봤다면 상당히 지쳤을 것이다. 재미도 없고…… 다행스럽게도 아걸은 끊임없이 흥밋거리를 제공한다.
새로운 자를 찾아내고 싸운다.
아걸은 고수를 참 잘 찾아낸다.
새로운 자가 나타나고 새로운 무공을 본다. 비무는 아걸이 하지만 자신의 피도 들끓는다. 자신이 이 자와 부딪치면 어떻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그런 볼거리가 있으니 아걸을 쫓아다니는 것이 즐겁다.
“흐음!”
혈사창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창을 들고 일어섰다.
“그 사람 예의도 없네. 웬만하면 식사나 끝난 후에 오지. 이렇게 되면 밥이 타잖아.”
그때, 숲에서 한사람이 걸어 나왔다.
“배부르면 움직이기 귀찮을 것 같아서 사정을 봐준 건데. 깔끔하게 끝나고 밥 먹으라고.”
“누구냐?”
혈사창이 미간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그는 상대를 보자마자 날 선 검을 떠올렸다.
상대는 검이다. 모든 허식을 일체 배제하고 오직 검날만 곤두세운 검이다.
상대는 자신을 노리고 나타났다. 그것은 분명하다.
사내의 전신에서 무서운 살기가 뿜어진다. 두 눈에서 살광이 번뜩이고, 진기는 거칠게 솟구친다.
사내는 벌써 싸움을 시작했다.
스릉!
사내가 검을 뽑았다.
“나도 당신을 모르고, 당신도 날 모르고. 서로 알 필요 없잖아?”
“날 몰라?”
혈사창이 미간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내가 너 같은 자를 어떻게 알아? 후후! 운 나쁘게 내 곁에 가장 가까이 있었으니 죽는 거지.”
“후후!”
혈사창은 싸늘하게 웃으면서 혈사창을 들어 올렸다.
무림에 나서면 이런 일이 종종 벌어진다.
무슨 일인인지도 모르고 싸워야 한다. 좋든 나쁘든 싸워야 한다. 지금도 자신이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른다. 상대방이 검을 들었기 때문에 싸운다.
“나는 창. 네놈은 검. 창과 검이 만났으니, 우열을 가리면 그뿐이라는 건가?”
“그래. 해볼까?”
스읏!
상대가 검을 들어 올렸다.
‘으음!’
혈사창은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단지 검을 들어 올렸을 뿐인데, 호랑이와 마주 선 느낌이 든다. 오금이 자르르 저려온다.
몸이 먼저 위기를 감지하고 있다.
혈사창은 즉시 혈사오금(血蛇五擒)을 펼쳤다.
그의 별호는 병기에서 따왔다. 창끝이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휘어져 있어서 금사창(金蛇槍)인데, 금빛 대신 오히려 빛을 죽인 붉은 색을 입혔다.
혈사창이 사내의 머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뱀이 개구리를 낚아채듯이 확 깨물었다.
쒝쒝쒝쒝쒝!
혈사창이 다섯 개로 변했다. 머리와 목과 가슴을 동시에 노린다. 요혈 다섯 군데를 일시에 찌른다.
“난잡해.”
사내가 중얼거렸다. 순간,
쒝!
어느새 날아온 검이 혈사창의 심장을 찔렀다.
“헉!”
혈사창을 헛바람을 내질렀다.
검이 날아오는 순간, 본능적으로 피했지만, 너무 늦었다. 몸이 늦게 움직였다. 검이 이미 틀어박힌 후에 움직이려고 꿈쩍거렸다. 완벽하게 늦었다.
이 자,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인이다.
“누, 누구냐……?”
“모르고 죽기로 했잖아.”
슷!
그가 검을 뽑았다.
혈사창은 그대로 무너졌다. 사내의 검은 빠를 뿐만 아니라 정확하다. 단숨에 심장을 꿰뚫었다.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푸아악!
심장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사내는 쓰러진 혈사창 몸에 검을 문질러서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 혈사창이 지어 놓은 밥솥으로 갔다.
“냄새 좋군. 적당하게 탔어.”
사내는 솥뚜껑을 열고 밥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