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199화 (199/600)

#199화. 第四十章 음계(陰計) (4)

사생락을 극성으로 펼치면 온몸이 감각 덩어리가 된다.

‘감각 덩어리’라는 말 외에는 딱히 뭐라고 설명할 말이 없다. 전신 감각이 무척 예민하게 곤두선다.

감각 덩어리가 되면 평소 자신이 느끼지 못했던 현상들을 자연스럽게 보고 듣는다.

십 장 밖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섬광처럼 전개되는 검도 본다. 손끝에 닿는 기왓장의 거친 느낌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런 일은 때로는 무척 고통스럽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감각을 적당히 무뎌야 할 필요도 있다.

사생락을 펼칠 때처럼 미세한 감각까지 곤두세우면 이 세상은 극한의 고통이 된다.

세상이 주는 느낌이 좋은 느낌만 있는 게 아니다. 기분 나쁜 느낌이 훨씬 많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다.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본다. 징그러운 바퀴벌레가 기어가는 것까지 뚫어지게 쳐다보게 된다. 그래서 일부러 고개를 돌릴 때도 있다.

스스스스슷!

팔 장로는 전신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채 성검문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성검문을 뚫는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성검문은 경비를 서는 하위 무인까지도 고수다. 철저하게 무공을 지도받아서인지 눈빛이 형형하다.

하지만 이들은 속일 수 있다. 문제는 소축십검이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월직을 서고 있다면, 성검문을 돌아다니면서 경비를 감시하고 있다면 아마도 잠입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의 감각은 사생락도 잡아낼 것이다.

‘어디 한번 잡아 봐!’

스으으으읏!

팔 장로는 뱀이 미끄러지듯이 부드럽게 지붕 위를 기어갔다.

* * *

“쥐새끼가 있습니다.”

“후후! 그새를 못 참고 기어 나왔군.”

허도기가 웃었다.

“조경 장군을 만날 겁니다.”

“만나야지.”

“네?”

진개가 사부를 쳐다봤다.

“조경 그놈, 지금 갈등하고 있어. 싸우겠다고 말은 했지만, 아직 반반이야. 자신이 이길 경우와 질 경우를 모두 점검해야겠지? 지금쯤 한 번 흔들어 주는 것도 좋아.”

허도기는 가위를 들고 분재를 다듬었다.

“이거 좀 관리하라니까. 영 보기 싫잖아.”

“죄송합니다. 그럼 쥐새끼는 놓아두겠습니다.”

“놔둬. 그 쥐새끼가 조경을 내일 비무로 끌어낼 결정타야.”

“제가 이해하지 못해서…… 쥐새끼와 조경이 만나면 안 좋은 소리만 들을 텐데요?”

“후후! 독안이 그립군. 역시 머리는 독안이 제일 좋았어? 묘법제일이 죽고 없으니까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네. 쯧! 뭐가 급하다고 그렇게 빨리 가나.”

툭!

허도기가 가위를 놀려서 나뭇가지를 잘라 냈다.

“반(反)의 반은 정(正)이지. 다시 돌아오는 거야. 내가 반을 쳤는데, 그걸 의심하고 있는 거거든. 그러니 다시 반을 치는 거지. 그러면 이젠 내 말을 믿게 돼. 정이 되는 거지. 내 말 자체는 신뢰를 주지 못하지만, 쥐새끼가 신뢰를 심어 줄 거야.”

“네, 알겠습니다.”

“정말?”

“네?”

“정말 이해했냐고?”

“…….”

“하하하! 진개, 진개, 진개. 넌 뒤처리는 깔끔하게 잘하면서 이런 건 못 해.”

“죄송합니다.”

“아니, 이게 좋아. 모든 걸 잘하면 경계 대상이 되는 법이야. 쥐새끼는 막지 말고 놔둬.”

“네.”

진개가 대답했다.

“내일 참 볼 만하겠군. 하하! 벌레 먹은 가지라고 싹둑 잘라 내지 않은 것은 네놈도 쓸모가 있기 때문이지. 하하하!”

허도기가 병들어서 반쯤 고사한 나뭇가지를 가위로 툭툭 치면서 웃었다.

* * *

쒸이이잇! 쒜엑!

팔 장로가 장원에 내려서는 것과 조경이 월극을 날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쉿! 깡!

팔 장로는 내려서자마자 위험을 직감하고 몸을 빼냈다.

조경은 팔 장로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침입자를 색출한다는 뜻에서 월극을 쏟아 냈을 뿐이다.

“누구냐!”

조경이 차게 말했다

팔 장로는 두 손 모아서 읍했다.

“아걸, 명부판관을 대신해서 왔습니다.”

팔 장로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걸이? 후후! 명부판관이라는 자도 보통은 아니군. 내가 여기 머문 게 이제 겨우 반 시진. 그사이에 나를 찾아올 정도라면 사방에 눈과 귀가 깔려 있다는 말인데.”

“다른 곳에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걸 조직이라고 하는 거야. 나는 조직을 이뤄서 움직이는 놈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

팔 장로는 침묵했다.

조경은 청년이다. 생각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을 나이다. 하지만 그 나이에 정국 장군이 된 것을 보면 무척 똑똑하거나, 아니면 무척 강한 무인일 것이다.

조경은 후자 쪽 성격이 강하다.

무공이 강한 자, 창이 날카로운 자는 더욱 거침이 없다.

이런 사람은 설득당하지 않는다. 고집이 워낙 강해서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

조경이 말했다.

“여기 올 때까지 기척이 드러나지 않은 걸 보면 무공이 상당한 수준이군. 무슨 무공이냐?”

“살수 비기 사생락이라고 합니다.”

“살수?”

“사연이 있습니다. 절정을 달리던 무인의 딸이 살수 문파에 입양되어서 키워져야만 했던. 지금 그 긴 이야기는 드릴 수 없습니다. 성검문주의 아들이 객지를 떠돌면서 칼을 갈아야 했던 이야기도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 왜 왔어?”

“내일 비무에 나서지 말아 주십사 요청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 말은 어디서 들었나? 나도 아직 결정하지 않은 사안인데.”

“눈이 있고 귀가 있다 보니…….”

“살수라. 살수들 대단하군. 성검문에서 벌어지는 일을 손바닥 보듯이 꿰고 있어. 강호는 원래 이런가?”

“전쟁터도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만.”

“성검문의 경계를 뚫고 여기까지 들어온 걸 보면 사생락이 어떤 무공인지 짐작할 수 있겠군.”

“그 점부터 말씀드리면, 장군께서는 제가 낙하할 즈음에야 제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명부판관은 제가 십 장 안에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파파팟!

조경의 눈에서 기광이 번쩍였다.

“네 말은 내일 싸움에서 내가 죽으리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팔 장로가 차분히 말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명부판관이 싸움을 피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말씀드린 것일 뿐, 장군을 격하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이해 부탁드립니다.”

“아니, 괜찮아. 모시는 주인을 믿는 마음, 이해해.”

역시 젊다. 이 청년 장군을 어떻게 설득하나.

무공을 비교한 것은 독이 되었다. 냉철하게 판단할 줄 알았는데, 감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팔 장로가 말했다.

“내일 장군께서 싸우게 되면 승자는 허도기입니다. 양손에 꽃놀이 패를 쥐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후후후! 꽃놀이 패라. 날 죽이는 게 하나, 골칫덩어리 명부판관을 떼어 내는 게 하나?”

“장군이 질 경우, 장군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명부판관은 비무에서 이기든 지든 모두 좋지 않습니다. 지면 장군 손에 죽을 것이고, 이기면 온 나라가 명부판관을 죽이고자 달려들 겁니다. 이득을 보는 사람은 허도기뿐입니다.”

“그런가?”

팔 장로는 몽설이 일러준 대로 모든 정황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허도기가 성검문을 가로챈 사실까지 비교적 세밀하게 말했다. 또 일홀문주와의 싸움도 말했다.

“그 소리, 들은 적이 있다.”

“아시고 계셨습니까?”

“굳이 비밀도 아닌 모양이더군. 공부가 말해 줘서 들었지.”

순간, 팔 장로는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허도기가 이런 얘기를 해? 같은 이야기지만 방향이 다르다. 똑같은 말을 해도 다르게 느끼도록 만든다.

“가서 명부판관에게 전해라. 내일 내가 이긴다면 손에 사정을 담아서 죽이진 않겠다. 일단 난 내일 싸우러 나갈 것이니 선택은 명부판관이 하라고 해라.”

“말씀을 전하고 싶은데, 지금 명부판관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후후! 모시고 있는 주인도 찾지 못한다는 것이냐?”

“네. 비무에 대비해서 은밀한 곳을 찾아 쉬고 계시는 것으로 아는데, 워낙 은밀히 숨으셔서 아무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희만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검문 쪽에서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내일 비무 전까지는 볼 수 없을 겁니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니지. 말을 전하는 것은 너희 몫. 알아서 전해. 가라. 나 역시 쉬어야 하니까.”

팔 장로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 고집불통 장군은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내일 싸움에 나설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되는데.

파파팟! 파팟!

그때, 사생락이 인기척을 감지했다.

사방에서 무인들이 몰려오고 있다. 발걸음 소리, 옅은 숨소리가 감지된다.

더 머물다가는 빠져나가지 못한다.

“명부판관이 허도기와 이미 싸운 것은 알고 있어?”

팔 장로가 대뜸 하대했다.

“……?”

“허도기와 싸웠고, 검을 네 번이나 맞았어. 얼마 전까지 누워 있다가 간신히 일어나서 다시 칼을 들었다. 내일 싸움에서 허도기는 명부판관을 죽일 수 있어. 손수 죽이지 않는 것이지. 너도 머리가 있으면 잘 생각해 봐. 이 미련 곰탱아!”

쒜에에엑!

팔 장로는 신형을 쏘아냈다.

“미련 곰탱이? 하하하! 하하하하!”

조경이 웃었다.

* * *

“제길! 느낌이 좋지 않더라니.”

“우리만 빠져나가도 되나?”

“그럼 어떻게 해? 장군 고집 몰라? 빨리 가서 대감께 알려야 한다니까.”

쉐에에에엑!

두 사람은 쏜살같이 신형을 쏘아 냈다.

“허도기가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말을 믿어? 걔가 똥을 참지.”

“빨리 가자고! 늦으면 안 돼!”

두 사람은 욕을 하면서도 전력을 다해서 신형을 쏘아 냈다. 그때,

쉬이이잇!

두 사람이 스르륵 나타나며 앞을 가로막았다.

스릉!

두 사람은 다짜고짜 검을 뽑았다.

“흐흐흐! 진개! 너희들 그럴 줄 알았다!”

차앙!

왕성강이 급히 검을 뽑았다.

“우린 장군의 명으로…….”

왕성강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주 선 진개는 말을 듣지 않았다.

쒜에에엑!

검광이 번쩍 터졌다.

“직사광류!”

왕성강은 즉시 검초를 알아봤다. 직사광류는 정천검법에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진개가 펼친 검은 성질이 전혀 다르다. 잠기일력타가 가미된 검초다.

퍼억!

왕성강의 가슴에서 둔탁한 소리가 일어났다.

그가 진개의 검을 알아봤을 때는 이미 늦었다. 검이 심장을 관통했다. 검 앞에서는 곰처럼 큰 몸도 필요가 없다. 검은 살보다 강하다. 살을 찢을 수 있다.

“으으으!”

왕성강은 손을 들어서 진개의 목을 움켜쥐려고 했다.

순간, 진개가 머리를 옆으로 살짝 피하면서 손에 든 검을 빙글 돌려 버렸다.

파드드득!

검날이 심장을 도려내듯이 빙글 원을 그리면서 휘어졌다.

“끄아아아악!”

왕성강은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내질렀다.

당경위는 왕성강을 도울 틈이 없었다. 그 역시 점박이 오진복을 맞아서 사력을 다해 검을 쓰는 중이었다.

쒜에에엑! 쒜에엑!

다행히 당경위는 기선을 제압했다. 오진복이 검을 늦춰 주었기 때문에 선공을 취했다.

“뭐해? 빨리 끝내.”

왕성강을 죽인 진개가 검에 묻은 피를 왕성강의 몸에 쓱 문지르며 말했다.

“그럴까?”

오진복이 피식 웃더니 검초를 변화시켰다.

파라라락! 파라라라라락!

검이 쏘아져 오는데, 마치 벌떼가 달려드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검도 보이지 않는다. 벌새가 빠르게 날갯짓을 하면 날개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검신을 볼 수 없다.

‘십칠연검!’

당경위는 종남파의 천성검법(天星劍法)을 펼쳤다.

쒜에에엑!

검이 하늘을 찢을 듯이 솟구친다. 유성이 하늘을 향해 거꾸로 치솟아 올라간다. 순간,

따앙!

검과 검이 부딪쳤다. 그리고 당경위의 검이 중간에서 똑 부러져 나갔다.

“엇!”

당경위가 깜짝 놀라 헛바람을 내질렀다.

오진복의 검은 이미 목과 빗장뼈 사이를 내리찍었다. 그리고 상반신을 사선으로 쭉 갈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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