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207화 (207/600)

#207화. 第四十二章 전지(剪枝) (2)

이놈! 강해졌다!

서리형개가 눈빛을 반짝 빛냈다.

소축십검 사군 진개!

소축십검은 풍도곡 살귀들을 상당히 꺼렸다. 툭하면 칼을 뽑고, 생사가 결정될 때까지 멈추지 않기 때문에 비위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했다.

진개는 예전처럼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개의 눈에는 살광이 이글거린다. 투지가 심하게 일어나서 살기처럼 여겨진다.

진개는 싸우고 싶어 한다.

일취월장이라고 말할 정도로 무공이 급성장하지 않았다면 드러내지 못할 자신감이다.

성검문 특유의 정명(正明)함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마외도를 보는 듯 사악한 기운이 물씬 풍겨 온다.

‘이상한 수련을 했군.’

서리형개는 피식 웃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달라졌군.”

“달라졌지. 네 놈 정도는 벨 수 있을 정도로 변했으니까.”

진개의 말투도 거칠어졌다. 예전에는 이런 말투를 사용하지 않았다. 상대를 무시하더라도 마음속으로만 무시했다. 절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병신.”

“뭐? 네놈 방금 뭐라고……!”

“야! 이 병신아. 그렇게 자신 있으면 검을 뽑아. 주둥이로 나불거리지 말고.”

서리형개가 툭 쏘아붙였다.

이 순간, 서리형개는 허도기와 만났을 때의 자신을 생각했다.

자신 있으면 칼을 뽑으면 된다. 중언부언 말할 필요가 없다. 칼을 들지 못한 것은 자신이 없어서다.

“퉷! 한동안 칼을 놓았더니 쓰레기까지 날 쓰레기로 보내. 야, 쓰레기. 내가 네놈하고 말을 섞어 준다고, 네놈하고 똑같은 쓰레기라도 된 줄 알아? 정신 차려. 그러다가 죽어.”

서리형개는 허도기에게 당했던 분풀이를 진개에게 퍼부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진개가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그러다가 웃음을 뚝 그치고 서리형개를 쏘아보며 말했다.

“좋아. 네놈 목숨은 내가 거둔다. 지금은 사부님 명이 있어서 잠시 목숨을 붙여 준다만, 네놈의 일홀도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나중에 겪어 봐.”

진개는 말을 하면서 두툼한 두루마리를 꺼내 홱 던졌다.

서리형개는 날아오는 두루마리를 받았다.

“다른 놈한테 뒈지지 마라. 넌 내 손에 죽어.”

진개의 눈빛에서 살광이 번뜩였다.

“미친놈. 지랄도 가지가지로 하네.”

서리형개는 진개를 비웃으면서 두루마리를 펼쳤다.

특정한 장소가 기재되어 있고, 죽여야 할 사람의 인상착의가 적혀 있다.

그밖에 이름이나 나이, 직업, 무공 등등 살인에 필요한 정보는 일절 없다.

예정된 장소에 가서 지적한 사람을 무조건 죽이라는 거다.

진개가 비웃으면서 말했다.

“사부님이 시킨 일이니 내가 말할 거리는 안 되겠지만, 이거야말로 쓰레기가 하는 일 아냐? 성검문이 싼 똥을 일홀도가 치우고 있잖아. 하하하!”

“네놈이 정말 죽고 싶구나?”

“내 검을 빨리 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라고. 그럼 가차 없이 베어 줄 테니. 서리형개, 기억해 둬. 네놈이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나타날 사람이 나라는 거. 내가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이야.”

파팟!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거칠게 얽혔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칼을 뽑지는 않았다. 서로 싸우게 될 것이라는 생각만 깊게 했을 뿐,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네놈 말대로 개 노릇을 하고 있지. 후후후! 우린 그 후에 보자. 꼭.”

서리형개가 씨익 웃었다.

* * *

서리형개는 관도를 걸었다.

여산(廬山)에서 서창(西唱)으로 가는 관도는 딱 하나뿐이다. 그러니 헷갈릴 것도 없다.

가구가 삼십여 호에 이르는 큰 촌락을 지나서 일 리쯤 걸었다. 그러자 두루마리에 기재된 것처럼 오륙백 년은 족히 됨직한 느티나무가 나타났다.

서리형개는 느티나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째액! 짹! 째애액!

산새가 들판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갔다.

어떤 놈들이 아걸을 만나려고 할까? 아걸이 성검문에 도전했다고 들었는데, 지켜볼 걸 그랬나? 보나 마나 죽을 게 뻔해서 보지 않았는데.

아걸을 만나려는 놈들이니 무공도 범상치 않을 것이다.

‘어떤 놈들이냐?’

적랑대나 취화원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라면 허도기가 직접 찾아올 리 없다. 진개를 보내서 허도기 명령이라며 밀지만 전했어도 따랐을 것이다.

서리형개는 차분히 기다렸다.

시간이 대략 일다경쯤 지났을까?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키가 오 척 구 푼, 상당히 크다. 몸도 건장하다. 병기는 없다. 허리춤에 단봉을 차고 있는데, 호신용일 뿐이지 병기라고 말할 수도 없어 보인다.

눈매는 제법 날카롭다.

그 외에는 특이한 점이 없다.

서리형개는 그를 보자마자 두루마리에 적힌 첫 번째 사내라는 것을 즉시 알았다.

사내를 보자마자 ‘아! 이놈!’하고 딱 느꼈다.

그런데 이 사내…… 특이할 점이 정말 없다. 무공이 강한 것 같지도 않다. 허도기가 공들여서 죽이려는 자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하다.

건장한 사내에게 나약하다고 하면 우습지만, 서리형개 눈에는 약해 보였다.

‘무슨 수작을 벌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서리형개는 일어섰다. 그리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사내가 서리형개를 보고 잠시 움칠거렸다. 하지만 생면부지 전혀 모르는 사내가 아닌가. 도적질하기에는 너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관도이고.

그가 다시 태연히 걸어왔다.

서리형개는 그와 오 장쯤 다가섰을 때 스릉! 칼을 뽑았다.

상대가 움찔거렸다. 아니, 즉시 도주할 곳을 찾느라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타타타탁! 타타탁!

서리형개는 그를 향해 달려갔다.

상대는 완전히 적의를 감지했다. 즉시 몸을 돌려서 산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마주 싸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모양이다.

하지만 서리형개가 놓칠 리 없다.

쒜에에엑!

칼이 번뜩였다.

“아악!”

사내가 처절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상대는 서리형개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일도에 가슴이 베이고, 또 한 번 휘두른 칼에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둥실 떠올랐다.

사내를 죽이는 데는 굳이 삼도일살을 펼칠 필요가 없었다. 몸을 푼다 생각하고 가볍게 휘두르기만 했는데도 저항하지 못하고 목숨을 내놨다.

이런 자를 왜 죽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허도기가 죽이라고 밀지를 보내왔으니 죽일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늘 하루에 이런 자들이 열 명은 죽어 나갈 것이다.

* * *

취화원은 서리형개를 주시했다.

서리형개가 불쑥 취화원을 들이친 이후부터 서리형개에게서 눈길을 뗀 적이 없다.

서리형개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항시 그를 지켜본다.

움직일 때, 잠잘 때, 걸을 때, 뒷간에서 볼일을 볼 때도 눈길을 떼지 않는다.

사람이 직접 뒤를 쫓지는 못한다.

서리형개는 이목이 맹수처럼 날카로워서 어떤 추격도 즉시 눈치챈다. 하지만 사람을 지켜보는데 반드시 그림자처럼 따라붙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추적자를 점찍어 놓으면 그의 일상을 지켜보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굳이 뒤를 쫓지 않고도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세밀하게 쳐다볼 수 있다.

서리형개가 사람이 떠난 빈 농가로 들어간다.

농가에는 사람이 있다. 먼 길을 걸어온 듯 여독에 지친 모습을 한 여인이다.

여인은 악사(樂師)다. 여인 곁에 비파가 놓여 있다.

“여자?”

서리형개가 한 말이다.

그도 농가 안에 있는 사람이 여자일 줄은 몰랐다는 말투다.

서리형개는 여자를 향해 가차 없이 칼을 휘둘렀다.

쒜에에엑!

“악!”

여인은 짧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쓰러졌다.

밭에서 밭을 매던 노파가 여인의 비명을 들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서 황급히 도주하려고 했다. 하지만 서리형개가 농가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노파는 서리형개를 쳐다보지 않는다. 서리형개를 쳐다보면 자신에게도 살신지화가 치밀 것으로 생각했는지, 아예 고개를 푹 떨구고 있다.

노파는 그저 죽을힘을 다해서 호미질만 한다. 호미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서리형개가 노파를 스치며 지나갔다.

“하아!”

노파는 그제야 안도했는지 큰 한숨을 토해 냈다.

노파는 서리형개가 두려운지 그가 멀리 떠날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즉시 지필묵을 꺼내 글자 몇 자를 적었다.

“휘이이익!”

그녀가 휘파람을 불자 전서구가 날아와 노파에 어깨에 앉았다.

“휴우! 이런 일은 오래 하는 게 아니야. 이거 계속하다가는 제명에 못 죽겠어.”

노파가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 * *

“육청 관원들이 습격당하고 있습니다.”

“뭐야! 육청이? 피해는?”

“어제오늘 모두 열네 명이 죽었습니다.”

“음……!”

탁호는 인상을 확 찡그렸다.

육청 사람들은 신분은 관원이지만, 직업은 제각각이다. 사람들 틈에 섞여 살며, 육청이 필요할 때는 은밀히 동원한다. 한 마디로 민간 세작이다.

육청 세작을 알아볼 사람은 흔치 않다.

전보영을 총괄하는 탁호조차도 육청 세작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다.

그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주르륵 살해당하고 있다.

“흉수는 알아냈어?”

“그게 이상합니다. 성검문 쪽인 줄 알았는데, 서리형개란 자입니다. 풍도곡 일홀문이라고 하면 기억나실 겁니다. 삼도일살에 능통한 자입니다.”

“이거 봐라?”

탁호가 손을 들어서 턱을 문질렀다.

깊은 생각을 할 때면 드러나는 습관이다. 해답을 찾을 수 없을 때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육청 민간 세작을 단번에 죽였다. 세작만 골라서 죽인다. 우리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가 추격해서 죽이고 있어.’

전보영을 정면에서 들이칠 사람이라면 누가 있을까? 생각할 것도 없다. 허도기!

“훗!”

탁호는 이제야 허도기의 속셈을 알아챘다.

허도기는 전보영이 무림에 나타나기만 하면 모두 죽이겠다는 거다. 육청 관원을 죽인 서리형개는 하수인일 뿐이다.

조위 장군은 왜살에게만 명령을 내렸다. 왜살이 전보영에 도움을 청하리라는 걸 이미 예측했다. 전보영은 당연히 도와주었고, 허도기에게 당했다.

장군이 언질을 조금만 주셨어도 이렇게 맥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바로 이것이다. 이런 이유로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으셨다.

전보영이 아무것도 모른 체 강호에 진입해야 한다. 그러자면 첫 번째 일격에 맥없이 무너져야 한다. 처음부터 어떤 강구를 하면 당장 의심을 산다.

허도기가 노린 것은 왜살이 아니다. 전보영이다.

왜살은 허도기가 언제든 무너트릴 수 있다. 하지만 전보영은 조직적으로 무너트려야 한다.

지금 그 작업을 하고 있다.

“장군도 참 너무하셨네.”

탁호는 몸을 의자에 깊이 뉘었다.

왜살은 아걸 위치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아걸 위치를 알려줘야 한다. 한데 육청 관원을 보내면 즉시 살해당한다. 그것도 도귀라는 자에게. 어지간한 무공을 지닌 자로도 어림없다는 소리다.

서리형개를 잡으려면 전보영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 허도기의 주문인데…….

탁호는 인상을 찡그리고 깊이 고민했다.

한 번은 당했지만, 두 번 세 번 계속 당하는 것은 조위 장군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즉시 조처해야 한다.

조위 장군이 이런 명령을 내릴 때는 자신을 믿은 측면도 크다. 이 정도는 헤쳐 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고 왜살을 내보낸 것이다.

계속 당하면 장군의 기대에 어긋난다.

어떻게 하나? 왜살에게 접근을 못 한다. 아걸에게도 접근할 수 없다. 왜살은 아걸을 쫓고 있는데. 그들과 접촉해야 하는데. 접촉한 자들은 모조리 서리형개에게 죽고.

“어떻게 할까요?”

“글쎄. 어떻게 할까? 고민 좀 해 보자. 오늘 하루는 조용히 보내. 하루쯤 쉰다고 하늘 무너지지 않아.”

탁호가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