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第四十二章 전지(剪枝) (5)
“묘수를 찾고 있었는데 묘수가 여기 있었군.”
영주 탁호가 말했다.
“저도 방법을 찾는 중이었어요. 여기 방법이 있을까 해서 찾아왔는데, 방법이 있을까요?”
“있을지도 모르지. 원주가 방법을 찾아서 여기로 왔다면 그냥 오지는 않았을 것이고, 대충 어떤 냄새는 맡았기에 온 것일 텐데. 무엇에 흥미가 끌렸나?”
“가릴 건 가리고 얘기할까요, 전부 터놓고 얘기할까요?”
몽설은 탁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일정한 선을 긋고 얘기할 것이냐 아니면 다 터놓고 얘기할 것이냐 묻는다.
“원주는 나이도 어리고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생각이 깊군.”
“이해해 주세요.”
“아니. 나도 돌다리를 두들기고 건너는 성격이라서 이해하지. 어떨 때는 우리 같은 성격이 좋아.”
“왜살이라는 사람은 우리와 성격이 다른가요?”
“응? 하하하! 이거 훅! 치고 들어오는데? 왜살이라. 왜살 성격은 한 마디로 단정하기가 어려워. 분노가 하늘에 닿아도 장군이 ‘멈춰!’ 하면 멈추는 사람이거든.”
“지금은 아걸을 공격하라고 했고요?”
“초면에 너무 치고 들어오는 것 같군.”
“그럼 가릴 건 가리고 말하는 건가요? 전 다 터놓고 말하고 싶은데요. 그래야 방법이 찾아질 것 같아서요. 허도기란 사람, 저보다 잘 아시잖아요.”
“또 치고 들어온다. 하하하!”
탁호가 웃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매우 냉철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몽설을 주시한다.
탁호는 말로는 치고 들어오지 말라고 하면서 몽설이 원하는 답을 순순히 내놨다. 탁호에게는 살수 문파 원주라는 사람이 미덥지 않을 텐데도.
가장 중요한 문제, 왜살이 아걸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사실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번 일에서 전보영이 무슨 일을 맡았는지 묻는다.
다 터놓고 말하자는 말속에는 전보영이 하는 일까지 모두 담겨 있는 것이다.
탁호가 물었다.
“아걸과는 어떤 사이지?”
“정혼녀예요.”
“아!”
탁호가 손을 들어 이마를 ‘탁’쳤다.
“이제야 조금 궁금증이 풀리네. 취화원이 왜 아걸을 보호하는지 궁금했거든. 무림사에는 간여를 하지 않는 편이라서 쓸만한 정보가 별로 없어.”
탁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나 더 묻지. 혈검경은 원래 전대 성검문주 부인인…….”
“현정부인의 무공이죠. 맞아요. 제 무공은 현정부인께서 전해 주신 비급에서 비롯되었어요. 현정부인은 뵌 적은 없고, 정혼 선물로 주신 거예요.”
“정혼 선물이라면?”
탁호의 눈가에 이채가 번뜩였다.
“아걸, 전임 성검문주 이초결검 허도강의 넷째 아들이에요. 증명할 수 없는 문제지만, 그렇게 알고 있어요.”
“아걸이 허도강의 자식이라는 것을 허도기도 아나? 알면 저렇게 살려 두지 않을 텐데? 거둘 생각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확실하게 거뒀을 것이고.”
“용골이라는 것은 안 것 같아요.”
몽설도 탁호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모두 다 터놓고 말하자고 했다. 그래서 밑바닥에 깔린 비밀까지 모두 터놓는다.
서리가헌은 위정자들을 믿지 못한다고 했다.
무림의 모든 사람이 위정자와 관계를 맺으면 결국 이용만 당하다가 죽는다고 말한다.
몽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취화원을 떠날 때 모두를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도 모든 것을 터놓는 이유는 딱 하나, 조위 장군이라는 사람을 믿어서다. 장군이 어떤 사람인인지는 모르지만, 황상에 대한 충성심은 믿는다.
조위 장군, 전보영, 왜살…… 이들의 사고는 모두 한 방향으로 흐른다. 황상에게 해가 되는 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제거한다. 하지만 그 반대는 벗이 된다.
자신이나 아걸이 황상을 공격할 이유는 없다.
이들이 바라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갈 일이 없으니 남은 것은 신뢰, 믿는 것이다.
몽설은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후후! 살수 문파 원주라고 해서 좋지 않은 눈으로 봤는데, 말이 통하는군. 자, 그럼 우리 허심탄회하게 말해 볼까?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봐.”
탁호가 서랍 속에서 두툼한 종이 묶음을 들고 와서 몽설에게 건넸다.
“이건?”
“허도기의 모든 것.”
“아!”
몽설은 사양하지 않고 종이 묶음을 풀었다. 그리고 한 장씩 읽어 내려갔다.
전보영은 허도기를 매우 상세하게 조사해 놓았다.
겉으로 드러난 세력은 물론이고, 암중에 숨어 있을 세력까지 모두 파악했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만약 이것이 전부였다면 싸움은 벌써 끝났다. 진작 허도기를 굴복시켰다.
허도기에게는 전보영이 모르는 힘이 있다.
종이 묶음을 다 읽고 나자, 몽설을 자신이 해 줄 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려고 왔는데, 전보영은 이미 다 알고 있다.
자신과 아걸의 숨겨진 내력을 말해 줄 때, 대단한 비밀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당연하다. 이 세상에 아는 사람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은밀한 비밀이다.
그런 사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명부판관, 혈도비자, 취화원, 구절곡 귀문 시절까지 모두 안다.
“제가 도와드릴 게 더 많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드릴 게 없네요.”
몽설이 종이 묶음을 탁호에게 밀었다.
“왜살과 아걸이 싸우면 둘 중 한 명은 죽네. 그러니 그 전에 싸움을 말려야지?”
“그래 주시겠어요?”
“원래 이 싸움은 허도기와 우리 전보영의 싸움이야. 서리형개가 차도살인에 쓰이고 있지만…… 그렇다면 우리도 차도(借刀)가 필요해. 그걸 취화원이 맡아 주게.”
“서리형개를 베라고요?”
“우리가 파악한 게 맞는다면…… 아걸이라면 서리형개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더군. 맞을까?”
모든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이 싸움은 허도기와 조위 장군의 싸움이다. 무림 다툼이 아니라 권력 다툼이다.
제일 먼저 허도기가 조위 장군의 손발인 전보영을 치려고 한다.
그러니 취화원이나 아걸은 이 싸움에서 벗어나 있다. 이들 싸움, 권력 다툼과는 전혀 상관없다.
그런데 또 우습게도 표면적인 다툼은 무림에서 벌어지고 있다.
서리형개가 낯선 자들은 죽인다. 그들이 전보영 세작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무림에서 죽인 자이니, 무림 일이다. 그리고 바로 곁에 아걸이 있다.
“안과 밖을 정해요. 싸움이 안에서 벌어지면 우린 완전히 손 떼요. 하지만 밖에서 벌어지면 전적으로 우리가 맡을게요. 어떤 싸움이라고 해도.”
“그래 주면 좋지.”
“영주님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안에서 벌어진 싸움에 우리를 불러들이지 말아 주세요.”
무림과 관부의 선을 분명하게 긋겠다는 말이다.
“이 싸움을 잘 이용하면 제이의 허도기가 될 수도 있는데?”
“일홀도를 아세요?”
“가장 강한 칼이라는 정도는 알지.”
“더 알아보세요. 그러면 그런 말은 하지 못하게 되죠. 일홀도는 오직 무림만 원해요.”
“원주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다음에 또 보게 되면 그때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를 잘해 두지. 내가 너무 모르는 게 많아.”
“아직 약속 안 하셨어요.”
“아! 그거? 약속하지.”
“죄송하지만 영주님의 말은 믿을 수 없어요. 조위 장군님 친필 서한을 받아 주세요.”
“그건 무리야.”
몽설은 대답 없이 살포시 웃었고, 탁호 역시 덩달아 웃었다.
“후후! 내가 서한을 받아 주지 않으면 장군님을 찾아갈 심산이군. 장군가도 이런 식으로 들어갈 건가?”
“…….”
몽설은 웃기만 했다.
“그런데…… 이 찜찜한 기운은 뭐지? 어떻게 호위 무인이 원주보다 더 강한 것 같은데?”
영주는 서리가헌의 존재를 알아냈다.
서리가헌이 흔적을 남겼을 리 없다. 몽설도 서리가헌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주변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아는데,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영주도 정확히 알지는 못하는 것 같다. 다만 막연히 어떤 기운을 느낀 것 같다.
“맞아요. 저보다 더 강해요.”
“무림은 재미있군. 수하가 군주보다 강할 수도 있고. 황궁도 수하가 황상보다 더 강할 수가 있지. 그럴 때면 항상 분란이 일어났어. 역모가 일어나던가. 역사를 잘 보면 수하가 군주보다 강할 때 항상 변괴가 생겼지.”
“제 수하가 아네요.”
“그래? 그럼 도와주는 사람?”
“제가 죽여야 할 사람이에요.”
“…….”
영주는 일시 말을 잇지 못했다.
주위 어딘가에 숨어 있는 자는 분명히 몽설을 도와주고 있다. 만일에 대비해서 호위를 서 주고 있다. 그런데 원주는 대놓고 자신이 죽여야 할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관계는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인간관계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나.
“이쯤 되면 무림이 궁금해지는군. 다음에 만날 때까지는 정말로 원주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되어 보지. 많이 공부해야겠어. 하하하! 참! 장군의 친필 서한, 받아 주지.”
“고맙습니다.”
“그럼 우린 동맹인가? 무림은 취화원이, 이쪽은 우리가. 무림에 도움을 청할 일이 있으면 즉시 말하지. 제일 먼저 왜살에게 아걸 위치를 전해 주게. 그 일을 하려다가 우리 육청 관원들이 주르륵 죽어 나간 거거든.”
“알았어요. 전하죠.”
몽설이 대답했다.
이번 대답도 뜻밖이다. 영주는 놀랍다는 듯 눈빛에 기광을 담아서 몽설을 쳐다봤다.
아걸 위치를 알려 주라는 말은 왜살이라는 사람에게 아걸을 죽이러 가라고 길을 알려 주라는 말이다.
그런데 서슴없이 전해 준단다.
“아걸이 염려되지 않나?”
“왜살이 염려돼요. 일홀도는 강해요.”
“절대적인 믿음이군. 한 가지 충고를 해 준다면 칼에 ‘절대’라는 말은 없어.”
“알아요. 설혹 왜살이 아걸을 능가한다고 해도, 일홀도는 상대를 가리지 않으니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좋은 무공을 만나는 건 일홀도의 복이죠.”
“아걸이 죽어도?”
“일홀도는 누군가에게 꺾여요. 그 사람, 침상에서 편히 죽을 운명은 아네요.”
몽설이 빙긋 웃었다.
* * *
몽설은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지옥을 벗어났다.
전보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옥보다도 더 무서운 곳이다. 전보영과 악연을 맺은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굴과 같다.
어떤 면에서 취화원은 전보영의 먹잇감이었다.
표면상 아걸이 조경 장군을 죽였으니, 아걸을 돕는 취화원은 전보영과 적이다.
그런데 무사히 빠져나왔을 뿐만 아니라 맹약까지 얻어 냈다.
이후, 전보영이 약속대로 조위 장군의 친서를 전해 온다면, 어쩌면 취화원은 관부와 인연을 맺고도 멸문되지 않은 최초의 문파가 될지도 모른다.
몽설이 욕심을 부린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지금처럼 오직 일홀도만 바라본다면, 그리고 명부판관의 의미로만 살행을 이어간다면 계속 존속할 수도 있다.
“일홀도를 상당히 많이 아는군.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
서리가헌이 말했다.
“아걸과 같이 있은 지가 얼만데. 옆에서 하는 걸 보면 가는 길도 보이잖아. 일홀도는 참 잔인한 칼이야. 도대체 이런 칼을 갖는 사람의 마음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궁금하기도 해. 삶과 죽음을 초월해서 살잖아.”
“하하하! 사내가 걸어갈 만한 길이지.”
“아버지가 일홀문이야. 정혼자도 일홀문이야. 하지만 내 자식은 절대로 일홀문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
몽설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부와 아걸은 일홀문인데 자식은 일홀문으로 키우고 싶지 않다? 재밌는 말이군. 너무 잔인한 길이라서?”
“아까 하는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일홀문도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죽어. 침상에서 편히 죽는 사람이 없어. 아걸도 그럴 거로 생각하는데
……
.”
“들었지. 그 말을 참 담담히도 하더군.”
“아걸이 죽으면 내 삶도 의미가 없으니까 담담히 말할 수 있지. 아걸과 내 세상은 끝나. 아걸이 오늘 죽는다면 난 당신과 오늘 싸울 거야. 당신을 죽이든 내가 죽던 끝내야 할 때니까.”
삶을 끝내겠다는 말로 들린다.
“그 정도인가?”
“그러니까 아걸을 믿는 거야. 내가 이러리라는 걸 아걸도 알아. 그러니 악착같이 살 거야. 내 죽음을 원하지 않으니까 자신도 죽지 않을 거야.”
몽설이 걸어갔다.
“아걸 그놈……. 어쩌면 나보다도 일홀도를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후후!”
서리가헌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