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第四十三章 기패(棄牌) (2)
스슷! 슷!
먹물 머금은 붓이 하얀 한지 위를 스치듯이 지나간다.
글자들이 묵직한 바위를 올려놓은 듯 단단하다. 단순한 글자인데도 강하게 느껴진다.
강하고, 굵고, 활기찬 글씨체다.
조위 장군은 정성을 기울여서 또박또박 글자를 써 내려갔다.
“이거면 되겠나?”
“충분합니다.”
탁자 옆에서 글 쓰던 모습을 지켜보던 탁호가 즉시 대답했다.
“각서나 보증서는 어쩐지 구린 냄새가 풍겨. 그래서 의뢰(依賴)라고 썼는데, 괜찮나?”
“과분합니다.”
탁호가 허리를 굽혔다.
조위 장군은 몽설이 요구한 대로 취화원을 정사에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확약서를 썼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선후가 있어야 한다.
장군가와 취화원, 또는 전보영과 취화원이 만나는 시작점에서는 무슨 일인가가 있어야 한다.
조위 장군은 그 부분을 ‘의뢰’라고 기재했다.
취화원에 대신 일을 해 달라며 정식으로 청부를 의뢰하는 의뢰서이다.
만일 이 문서가 세상에 드러나면 장군가, 혹은 전보영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다. 명문 높은 가문이, 황상을 보필하는 기관이 한낱 살수 문파와 사통한 게 된다.
정적(政敵)에게는 굉장히 좋은 먹잇감이다.
조위 장군은 그런 의뢰서를 기꺼이 썼고, 정보영주 탁호는 말로는 과분하다고 하면서 이 정도는 써 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표정을 짓고 있다.
“자네가 이런 것까지 받으러 올 정도라면 취화원주가 꽤 영특한가 보군.”
“적어도 배신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대단히 후하게 봤군. 세상 못 믿을 사람이 살수들인데, 살수 문파의 수장을 그만큼 믿었다니.”
“절대로 관부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의지도 좋게 보는 데 한몫했죠.”
“후후후!”
조위 장군이 웃었다.
장군은 웃을 정도로 마음이 편하지 않다. 아들이 정적에게 비명횡사했는데 무엇이 좋다고 웃고 살겠나. 더욱이 아들을 죽인 자가 버젓이 세상을 활보하는데.
장군의 웃음은 탁호를 위한 것이다. 탁호에게 마음 편히 일하라는 격려다.
“살수에게 청부했으면 청부금을 지불해야지. 청부금으로 은 만 냥을 제시했어.”
“마, 만 냥요!”
탁호가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들놈 목숨값인데 전혀 아깝지 않아. 지불하게. 더 필요하면 말하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탁호가 경직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은 만 냥이면 쌀이 4만 석이다. 천석지기 사십 명을 합쳐 놓은 막대한 돈이다. 또 모르긴 해도 장군가가 가진 전 재산일 것으로 생각된다.
장군은 이번 일에 모든 걸 걸었다.
조위 장군이 딱딱한 분위기를 달래려는 듯 농담조로 말했다.
“이런 것까지 써 줬으니 괘씸해서라도 당장 일을 시켜야겠는걸. 그렇지 않나?”
“이걸 전하는 즉시 취화원도 움직일 겁니다.”
탁호가 말했다.
현재 전보영은 아걸이나 왜살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일을 대신해 줄 것이라는 말이다. 왜살에게 아걸 위치를 알려 주어서 조경 복수를 하라는 거다. 그 말을 취화원이 전해 주기로 이미 약조가 되어 있는 상태다.
조위 장군이 말했다.
“아니, 아니. 그건 이걸 써 주기 전이고. 더 심한 일을 시켜야겠어.”
“시키실 일이 있으신지요?”
“있지. 자네는 잠시 물러가 있지.”
“네?”
탁호가 장군을 쳐다봤다.
장군은 전보영에 비밀이 없다. 모든 것을 터놓고 진행한다. 그런데 물러가 있으라? 탁호로서는 참 듣기 힘든 말을 들어서 다소 낯설게까지 느껴진다.
“뭘 그리 놀라? 잠시 생각 좀 정리하게 나가 있게.”
“네.”
탁호는 부복한 후, 물러났다.
대략 시간이 반 시즌쯤 흘렀을 때, 시녀가 와서 말했다.
“대감께서 드시랍니다.”
“음. 그래.”
탁호는 차를 마시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장군은 달필이다. 글을 매우 잘 쓴다. 문자를 정확하게 구사하면서도 빨리 쓴다. 무인이 아니라 문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명필이다.
반 시진이라면 서신을 열 통 넘게 작성한다.
‘취화원에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
탁호는 장군이 시킬 일을 떠올려 봤지만, 지금으로써는 그림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장군은 서신 두 통을 작성해 놨다.
두 통 모두 외인이 뜯어볼 수 없게끔 밀랍으로 봉인까지 해 놓은 상태다.
‘서신 두 통을 쓰는 데 반 시진?’
탁호가 총총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거는 왜살에게 전하고.”
장군이 서신 한 통을 내밀었다.
“왜살에게 내린 명령이 있는데…… 또 보냅니까? 제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인가요.”
“안 되지. 틀림없이 반대할 거니까.”
“하! 더 궁금해지네요. 그럼 이건?”
탁호가 다른 한 통을 가리켰다.
“이건 명부판관에게 전하라고 해.”
“명부…… 판관요?”
탁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살이 아걸을 죽이려고 간다. 그런데 장군은 서신을 왜살에게 한 통, 아걸에게 한 통을 보낸다. 두 사람에게 긴히 전할 말이 있어 보인다.
서신 두 통을 쓰는데 반 시진이 걸렸다는 말은 그만큼 장군이 고심했다는 뜻이다.
편지 쓰는 시간이 오래 걸린 게 아니다. 이 말을 전해야 하느냐 하는 고심을 한 것이다. 전할 말이 옳은지 그른지 장군조차도 심각하게 고심했다.
“혹시…… 아걸과 왜살의 싸움을 말리는 묘책입니까?”
“싸움을 말려?”
“아걸이 장군님을 죽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후후! 그런 명령 같으면 오죽 좋겠나. 그런 말을 전할 것 같으면 서신으로 쓰지도 않았지. 어쨌든, 이 편지들 꼭 전하라고 해.”
장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탁호는 밀지 내용이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봉인을 뜯어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장군이 재차 서신의 중요성을 당부했다.
“이 편지 두 통에 여러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어. 어쩌면 공부와 나의 승패도 결정지을 수 있고. 매우 중요한 서신이니 꼭 봉인된 채로 전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탁호가 편지를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 * *
한성에 뱀 가죽을 파는 행상(行商)이 나타났다.
뱀 껍질을 벗겨서 잘 다듬은 후, 예쁜 가죽으로 재탄생시켰다.
뱀 가죽을 파는 사람은 흔치 않다. 뱀 껍질이라서 징그러운 면도 있지만, 아름답기도 하다.
취운이 행상 앞에 앉아서 뱀 가죽을 살폈다.
“비사(飛蛇) 가죽은 구할 수 없나요?”
“구할 수 있죠. 그런데 그건 너무 귀해서 스물일곱 냥은 주셔야 하는데.”
“두 냥 더 드릴게요. 언제 구할 수 있죠?”
“흐흐! 분명히 두 냥 더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 밑에 눌려 있는 거…… 그거요. 회색. 그게 비사 가죽이에요.”
취운은 뱀 가죽 장사가 일러준 대로 가죽 더미 밑바닥에서 회색 가죽을 꺼냈다.
취화원은 전보영과 밀마 열 개를 정했다.
각 밀마에는 세 번의 응답이 오고 간다.
뱀 껍질이 첫 번째 밀마이고, 비사, 스물일곱, 둘이 뱀 껍질에 따라붙는 응답이다.
두 번째 밀마는 누룩이다.
전보영에서 다음 소식을 전해 올 때는 누룩과 연관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밀마 열 개는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밀마가 진행될 때는 반드시 행동을 요구한다. 취화원이 움직여야 한다.
이 밀마 열 개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세 명, 전보영주와 취화원주, 그리고 취운뿐이다. 전보영에서 몇 사람 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뱀 가죽을 파는 자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보영에서 뱀 가죽을 팔라는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응답 세 가지만 들었다. 그 외에 밀마에 포함된 사항은 전혀 알지 못한다.
밀마를 이토록 신중하게 정한 것은…… 세상에는 비밀이 없기 때문이다.
전보영이 하는 일은 곧 세상에 공개된다. 취화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 허도기,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항시 감시하고 있다.
이런 일은 취화원과 전보영도 한다. 허도기 곁에 사람을 심어놨으니 피차일반이다.
지금도 허도기의 눈이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취운은 스물아홉 냥을 지불하고 비사 가죽을 샀다.
“그런데 그건 어디 쓰시려고?”
“이걸로 검집을 만들면 매우 화려하대요. 저도 한 번 만들어 보려고요.”
“아, 네.”
뱀 가죽 장사꾼이 활짝 웃었다.
몽설은 서신 세 개를 받았다.
가벼운 비사 가죽에 봉해져서 전달된 서신이지만 무거운 돌덩이처럼 마음을 짓눌렀다.
서신 두 통은 밀랍 봉인되어 있다. 다른 한 통은 조위 장군이 자신에게 보내온 청부 의뢰서다. 청부금으로 은 만 냥까지 지급한다고 적혀 있다.
의뢰서에는 자신이 말한 대로 광록대부의 관인이 찍혀 있다.
공식적으로 광록대부가 취화원에게 청부한 것이다. 사람을 죽이라는 청부는 아니다. 단순한 심부름이지만 일회성이 아니고 일정한 기한 동안 움직이게 되어 있다.
물론 조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조위 장군 개인적인 일이다.
심부름 자체가 무림에서 벌어진 일이다. 나라 기관이 전보영을 활용하지만, 그것 역시 조위 장군이 개인적으로 남용한 것이라는 글귀까지 적혀 있다.
이 서신만 있으면 절대로 멸문당할 일이 없을 것 같다.
정말 그럴까?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서신을 가졌기 때문에 오히려 척살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몽설은 봉인된 서신 두 개를 놓고 고민했다.
“서리형개가 우리를 놔줄까?”
취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재, 서리형개는 아걸이나 왜살에게 접근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처단하고 있다.
물론 허도기의 명을 받고 행하는 일이다.
서리형개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무조건 허도기가 죽이라고 하면 달려가서 죽이고 있다.
허도기의 접근 금지자 명단 속에는 취화원도 포함되어 있다.
“이건 내가 전할게.”
몽설은 아걸에게 전하는 서신을 챙겼다.
“원주님,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팔 장로가 나섰다.
몽설이 나선다고 해도 서리형개는 칼을 늦추지 않을 것이다. 취화원과 일정한 약조가 맺어져 있지만, 그것 역시 허도기 명령보다 앞서지는 못한다.
서리형개의 눈을 피해서 잠입하는 게 아니다. 허도기의 눈을 피해야 한다.
몽설은 생각에 잠겼다.
아걸과 왜살은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있다. 하지만 두 곳을 동시에 방문하는 것은 자살 행위다. 무림에서 벌어지는 일은 취화원이 맡기로 했지만, 첫 번째 심부름부터 곤란해졌다.
‘오빠에게까지 서신을 전하라고 할 줄은 몰랐는데. 한 군데라면 몰라도 두 군데를 잠입하는 건 불가능해. 허도기 눈을 속이지 못해. 절대로.’
몽설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허도기의 눈은 속일 수 없다. 그렇다면 서리형개를 누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서리가헌이다.
* * *
서리가헌은 눈썹을 찡그렸다.
“결국, 형개를 베라는 소리니?”
“서신만 전달하면 돼. 굳이 싸울 필요는 없어. 허도기 눈만 속이면 되는데, 방법이 없어서.”
“그 말이 그 말이지. 말장난하니? 가만? 방금 왜살이라고 했니?”
“맞아.”
순간, 서리가헌의 안면 근육이 실룩거렸다.
너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변화라서 잘못 보지 않았나 의심스럽기도 한데, 분명히 실룩거린 것 같다.
서리가헌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아. 내가 전달하지.”
왜살에게 서신을 전하려고 한다.
서리가헌은 왜살을 안다. 그래서 전하려는 것이다. 왜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눈썹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봤다. 일생에 다시 없는 적수다.
“어쩌면 이번 출행이 저승길일 수도 있겠군. 서리형개에 왜살에. 지척에 아걸도 있다고? 후후후! 기왕이면 셋 다 부딪쳐 볼까? 하하하!”
서리가헌이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