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第四十三章 기패(棄牌) (3)
휘이이익! 휘이익!
몽설은 빠른 속도로 산을 탔다.
왜살이 머무는 봉산은 산세가 무척 급하다. 특히 물이 없어서 팍팍하다는 느낌이 든다.
물 없는 산은 짐승도 살지 않는다.
“여기 어디쯤인데…….”
산을 더듬어 올라가던 몽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몽설은 불빛을 찾아냈다.
아직 날이 어둡지도 않은데 모닥불을 거세게 피워 놓고 있다.
날이 추워서 피워 놓은 모닥불은 아니다. 저녁거리로 무엇인가를 잡아서 굽고 있다.
쉬이이익!
몽설은 불빛이 비친 곳으로 재빨리 쏘아 갔다.
서리형개! 그가 노숙하고 있다.
씻지 않은 얼굴, 다듬지 않은 수염, 거칠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피와 땀이 짙게 밴 구겨진 옷.
서리형개의 모습은 걸인이나 다름없다.
‘아! 일홀도!’
몽설은 서리형개의 모습에서 일홀도를 읽었다.
한때, 아버지도 참 안목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첫째 서리가헌은 일홀도를 추구할 인물이 아니다. 둘째 서리형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오로지 권력, 야욕에 눈이 멀어서 짐승처럼 살아간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저런 자들을 제자로 거뒀나?
그런데 서리가헌이 무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자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리가헌은 일홀도를 추구하고 있다.
그도 한때는 야욕에 들떴지만, 야욕이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다시 일홀도로 돌아섰다.
처절한 절망감이 그를 돌려세웠다.
목숨이 종이보다 가볍다는 생각을 항시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게 일홀문도다. 하지만 풍도곡 살귀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권력을 주자, 그대로 안주했다. 더는 목숨을 잃을 염려가 없었다.
그런 안전장치가 풀어지자, 서리가헌은 다시 일홀도를 찾았다.
서리형개도 마찬가지다. 산에서 노숙을 하며, 산짐승을 잡아먹고 사는 모습에서 일홀문도를 본다.
사박! 사박!
몽설은 서리형개에게 걸어갔다.
서리형개는 자신의 위치를 숨기지 않았다. 봉산에서 벌어지는 일은 취화원도 주시하고 있다. 서리형개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
팟!
서리형개가 고개를 들어 몽설을 쳐다봤다.
‘맹수……!’
몽설은 서리형개의 눈빛에서 소름 끼치는 살광을 감지했다. 지극히 사나운 냉수의 눈빛이다.
지금 서리형개는 철저하게 일홀도 속에 파묻혀 있다.
옛날 꼬마 시절에 매우 사나운 맹수를 봤던 기억이 있는데, 짐승이 아니었다. 서리형개였다. 바로 이런 모습을 보고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서리형개가 맹수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세파에 찌든 때를 다 벗겨 내고 야성을 찾아가고 있다.
“보기 좋네.”
몽설이 말했다.
“웬일이냐?”
서리형개가 싸늘하게 말했다.
“아걸을 만나려고.”
순간, 서리형개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몽설이 서리형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걸을 만나러 가는 사람은 모두 죽이고 있잖아. 나도 죽일 거야?”
파팟! 팟!
서리형개의 눈에서 귀광이 번뜩였다.
몽설이 아걸의 정혼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걸과 몽설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안다.
스읏!
서리형개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몽설 앞에 섰다.
퀴퀴한 냄새가 풍긴다. 쓰레기 냄새 같기도 하고, 피 냄새 같기도 하다. 맹수의 비린내인가?
좌우지간 매우 역겨운 냄새다.
“아걸에게 전할 거라도 있나?”
“정혼녀가 정혼자를 찾아가는 거야.”
“칼이 약한 자의 비애군. 굴종인가? 칼이 강했으면 뚫고 나갔을 텐데. 그렇게 애잔한 표정으로 사정하지 말고 당당하게 혈검을 써 보는 건 어때?”
서리형개가 손을 들어서 몽설의 얼굴을 만졌다. 순간,
쫘악!
거친 소리와 함께 서리형개의 뺨에서 불이 튀었다.
서리형개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았다.
“내 몸에 손대지 마. 한 번만 더 손대면 손목을 잘라버릴 거야. 아버지를 죽인 손으로 어딜 만져.”
“……그런가? 정인을 만나러 가겠다고 아비 죽인 원수에게 사정하는 네 꼬락서니는 뭐냐?”
“조금만 기다려. 그렇게 사정하지 않아도 곧 혈검을 써 줄 테니까.”
몽설이 횅하니 몸을 돌려 산에서 내려갔다.
몽설은 아걸이 있는 단곡으로 향하고 있다. 그녀를 베려면 지금 베어야 한다.
서리형개는 다시 불가에 주저앉았다.
몽설이 오기 전에 진개가 밀지를 가져왔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방문할 것을 알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서리형개는 두 사람을 베어야 한다.
몽설과 사형 서리가헌을.
허도기는 사형제 간의 싸움도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몽설이 느닷없이 아걸에게 가는 이유를 모르겠다. 또 사형이 왜살을 찾아가는 이유도 모른다. 하지만 이 두 움직임에는 같은 뜻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눈치로 봤을 때는 그렇다.
이번에는 서리형개도 허도기의 명령을 쫓지 않았다. 칼을 쓰지 않았다.
몽설을 놓아주고, 사형도 놓아준다.
두 사람이 두려워서 놓아주는 것은 아니다. 온전한 사형 같으면 두렵기도 했지만, 한 팔을 잃은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사형을 살려주는 것이다.
서리형개는 사형과 왜살이 싸우기를 원한다.
사형 성격에 왜살을 만나는 이유는 딱 하나, 절정에 이르렀다는 검을 보기 위해서다.
싸워라! 싸우고, 싸우고, 싸워라! 모두 싸워라!
미치고 환장해 보자.
“크크크……! 이 세상 한 번 미쳐 보는 것도 괜찮지.”
만약 지금 진개가 나타난다면 자신도 싸울 참이다. 허도기의 명령은 앞으로도 한 달이 찰 때까지는 들어주겠지만, 검을 뽑는 자에게는 칼을 들이댄다.
이번 일에 대해서 뭐라고 한마디만 해도 진개는 죽는다.
더는 양보하지 않는다. 미치고 환장해 보자.
“크크크!”
서리형개는 야수처럼 웃었다.
* * *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다.
‘이런 자도 있었군.’
‘강자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자마자 당장 손부터 꿈틀거렸다.
검초를 펼치고 싶다. 칼을 뽑고 싶다. 내 검이 강할까, 저 칼이 강할까.
승패를 전혀 점칠 수 없는 강자를 만났다.
“왜살이니?”
서리가헌이 물었다.
“나이도 젊은 새끼가 눈에 뵈는 게 없나, 혓바닥은 왜 이렇게 짧아? 팔때기 하나 떨어진 꼴을 보니 네 놈이 서리가헌인가 뭔가 하는 풍도곡 칼잽이구나?”
순간, 서리가헌이 칼을 낚아채려다가 멈췄다.
손은 칼을 뽑으라고 한다. 하지만 가슴의 떨림을 꾹 누르고 품에서 밀봉된 서신을 꺼내 왜살에게 던졌다.
“이것부터 봐. 누가 네게 전해 주라고 했다.”
왜살은 날아온 밀지를 받았다.
“이걸 준 사람이 누구냐?”
“물건을 전해 줬으면 됐지, 귀찮게까지 하니?”
“하하하하! 너 정말 마음에 든다. 너 같은 놈 심장을 쪼개는 맛이 아주 일품이지. 잠시만 기다려.”
왜살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적셨다.
정말 싸우고 싶은 사내다. 일홀도가 강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놈은 특히 강하다.
일홀도가 이런 칼이었다면 진작 맞서봤을 텐데. 왜 이런 칼이 허도기 아래 묻힌 것일까? 이런 칼을 가지고도 숨죽이고 사니 세상이 모르는 거지.
일홀도가 죽음의 칼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저 강호에 흘러 다니는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놈을 보니 정말 싸우고 싶어진다.
이놈의 칼이 정말 궁금해진다.
더불어서 이런 칼을 숨죽이게 만든 허도기의 검도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왜살은 입맛을 다시면서 밀지를 뜯었다. 그리고 곧 눈을 퉁방울처럼 크게 부릅떴다.
익숙한 글씨, 조위 장군의 친서다.
왜살은 급히 친서를 읽어 내려갔다
왜살은 화습자를 꺼내 밀지를 태웠다.
한동안 침묵하던 왜살이 고개를 들어서 서리가헌을 쳐다봤다.
왜살의 눈동자에는 이미 투지 같은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칼에 대한 흥미도 사라진 듯했다.
“……상황이 좋지 않`군.”
왜살이 말했다.
“아걸을 죽이라는 명령 아냐?”
서리가헌이 서신 내용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말했다.
“넌 아걸을 잘못 알고 있어. 내 팔을 자른 놈이 바로 아걸이야.”
왜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형제 간에 싸워서 팔 하나 빼앗는 거야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니 신경 쓰지도 않았다. 다만, 아걸이 소축십검을 쓰러트렸다는 말을 듣고는 제법 싸울만한 놈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널 보니 아걸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하겠어. 승산보다는 패배가 짙을 것 같군.”
“후후! 좋아. 그럼 우선 내 칼부터 거치는 것도 괜찮겠지?”
스읏!
서리가헌이 칼을 잡았다.
그러자 왜살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이번 싸움은 피하지. 다른 놈과 싸워야 해. 너와 싸우면 내가 질 수도 있거든. 그럼 이 서신을 보내준 분의 명을 어기게 되어서 말이야. 일단 다른 놈과 승부를 내고. 그 후, 아걸과 만나기 전에 꼭 너부터 찾지.”
서리가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살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진심이다. 서신을 읽어 본 후부터 급격히 투지가 사라졌다.
싸우려는 의지가 없는 자와 억지로 싸우는 것은 맥이 빠진다.
“좋아. 그럼 우리 싸움은 못 하겠군. 대신 눈 구경이나 시켜 주지. 이것이 일탄십검!”
탁! 탁! 타탁! 타타탁! 타타타타탁!
서리가헌이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그러다가 곧 빠르게, 매우 빠르게, 화살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쒜에에엑! 꽈앙!
서리가헌의 칼이 고목을 후려쳤다.
고목은 거센 폭풍에 휩쓸린 듯 마구 흔들렸다.
우지직! 쿵!
절반 넘게 잘린 나무가 잘린 힘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부러져서 쓰러졌다.
“음!”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던 왜살이 기어이 신음을 흘렸다.
“이런 칼이 당했다고?”
왜살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서리가헌의 잘린 팔을 지켜봤다.
팔이 잘리기 전, 서리가헌은 더 강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 더 강할지도 모르지만, 두 팔이 멀쩡했을 때는 빠름이나 파괴력에서 크게 앞섰을 것 같다.
이런 칼을 무너트린 아걸의 칼은 무엇인가!
스릉!
왜살도 검을 꺼냈다.
“내 무공은 협척검법이라고 한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계승자도 나뿐이고.”
스읏! 스스슷!
왜살이 빠르게 움직였다.
움직이는데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가만히 서 있는데, 자세히 보면 움직인다.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
고요한 가운데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고요하다. 움직이지 않으나 움직이는 것 같고, 부동(不動)을 유지하면서도 검이 목표를 향해 흐르고 있다. 순간!
파앗!
허공에 푸른 광망이 명멸했다. 파란빛이 번쩍 흘러나왔다가 사라졌다.
‘일순에 열두 초식!’
눈부시게 빠른 검초다.
“몇 개나 봤어?”
왜살이 검을 거두며 물었다.
“열두 개.”
“하하하! 역시! 맞아, 열두 개야.”
“하나 더. 암수가 있었어.”
“암수라고 하면 조금 추잡해 보이고. 은수(隱手)라고 하지. 공격용은 아니고 초식을 이끄는 숨겨진 힘이야. 그것까지 봤다면 다 본 거네.”
“좋다. 이번에는 동수로 치지. 다음 싸움이 궁금해지는데.”
서리가헌이 웃었다.
왜살도 웃었다.
두 사람은 싸우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지만 싸우지 못한다.
왜살이 싸움을 피했다. 서리가헌도 압박하지 않는다. 이번 일에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방해하지 않는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그래. 꼭 찾아가지.”
서리가헌이 피식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