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第四十三章 기패(棄牌) (5)
“쥐새끼! 받아 보라!”
왜살이 먼저 검을 쳐 냈다.
섬광이 번뜩였다.
일 초, 이 초, 삼 초, 사 초…… 연이어 십이 초까지 쾌검과 환검의 조화가 쭉 펼쳐졌다.
찰나만에 고조시 앞에 수많은 검영(劍影)이 그려졌다.
너무 검이 많아서 어떤 검이 진짜 검인지, 어디쯤에서 공격이 시작될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환검 중에서도 환검, 십이연환검(十二連環劍)이다.
왜살은 십이연환검을 찰나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펼쳤다.
보통 무인은 검초 한 번 펼치기도 부족한데, 무려 십이 초나 전개해 냈다.
말할 것도 없이 쾌검의 정화다.
비밀은 협척에 있다. 검이 큰 움직임을 그려내지 않는다. 아주 섬세하고 작은 움직임이 연달아 펼쳐진다.
정중동, 동중정의 움직임은 협척검법에서는 필수다.
그때, 쎅! 하고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렸다.
검 한 자루가 환검을 찢으면서 달려들었다. 정확하게 검초와 검초가 이어지는 연결 부분을 공격한다.
순간의 틈!
이곳을 공격하려면 고조시 또한 왜살처럼 빨라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살의 협척검법에 정통해야 한다.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웃!”
왜살은 깜짝 놀라면서도 검초를 늦추지 못했다.
십이연환검을 펼쳐 내면 마지막 검초가 끝날 때까지 왜살 자신도 멈추지 못한다. 처음부터 십이연환검을 끝내게끔 수련했다. 중간에 멈출 이유도 없었다.
쒜에에엑!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검이 왜살의 검을 후려쳤다.
말이 안 되지만, 고조시는 협척검법을 알고 있다. 정확하게 십이연환검의 맥을 찔러왔다.
까앙!
쇠와 쇠가 부딪치는 거친 소리가 울리면서 검 한쪽이 뚝 떨어져 나갔다.
왜살은 즉시 신형을 뒤로 뒤집으면서 물러섰다.
하지만 고조시가 이미 잡은 승기를 놓칠 리 없다. 물러서는 왜살을 쫓아서 즉시 뒤따라왔다.
쎄에엑! 쒝! 쒝! 쒜에엑!
검초가 사초나 연속으로 펼쳐졌다.
조명천검에도 연환검이 있다. 십칠연검이라고 하는데, 이미 군대에 보급된 검초다.
바로 그 십칠연검 중 사초가 왜살을 타격했다.
일 검에 베이고, 이 검에 찔렸다. 검이 빠져나가면서 핏줄기가 쫘악 뿜어졌다.
왜살은 눈을 부릅떴다.
조위 장군이 믿고 죽으라고 했지만, 굳이 죽을 생각을 하지 않아도 죽어야 할 판이다.
고조시 무공이 이렇게 강했나? 협척검법은 어떻게 알고 있나? 이럴 수 없다. 협척검법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검법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맥을 찍어온다. 분명히 검초를 알고 있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검초를 안다.
“쥐새끼, 내 검법을 알고 있구나.”
왜살은 고조시가 들고 있는 피 묻은 검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너는 조명천검을 모르나? 이미 알고 있잖아?”
고조시가 웃었다.
“그리고 네 말대로라면 상당히 비겁한 검이지. 초식이 드러나지 않을 때만 위력을 떨친다면 그게 무슨 검초야, 세상을 미혹시키는 사검(邪劍)이지.”
“큿!”
왜살은 웃었다.
고조시 말이 백번 맞다.
왜살도 조명천검을 알고 있다. 다만 이기기 위해서 분석을 하지는 않았다. 고조시가 협척검법을 분석했다면, 그것은 철저한 준비에 속한다.
베기 위해서 상대방의 약점을 찾은 것이니 당연한 행동이다.
“그럼 어디 이것도.”
왜살이 반 토막 남은 검으로 고조시를 겨눴다.
첫 번째 초식을 알고 있다면 두 번째 초식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싸운다.
츠읏!
왜살이 밑으로 납작 가라앉자, 키 작은 모습이 더 작아졌다. 아예 작은 밤처럼 똘똘 뭉쳤다. 검을 쥐고 잔뜩 웅크리고 있어서 가시 돋친 고슴도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화르르륵!
왜살이 데구루루 굴러서 공격해 왔다.
전쟁터에서는 마른 나뭇가지를 묶어서 불을 붙인 후에 굴러 떨어트리기도 한다. 그러면 기름 먹인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번지면서 적진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왜살의 몸이 마치 불붙은 불똥 같다.
파파파팟! 파파팟!
둥그런 공에서 검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사방으로 맹렬히 쏟아져 나갔다.
고조시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공격할 곳이 없다. 둥그런 공에 강침이 천여 개 이상 박혀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굴러오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십이연환검을 훨씬 능가한다.
“왜? 이거는 못 치겠니?”
쒜에에엑!
왜살이 다시 덮쳐왔다.
고조시는 즉시 검을 정리했다.
조명천검 중 가장 빠른 쾌검, 비조복개를 펼친다. 하늘을 나는 새도 갈라버릴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검초다.
왜살은 고조시의 기수식만 보고도 이후에 펼쳐질 검초를 눈치챘다.
고조시가 비조복개에 잠기일력타를 실었다. 이번 검초에 생사를 가를 생각이다.
‘이건 막지 못해.’
왜살이 방금 펼친 무공은 철구탄검(鐵球彈劍)이라는 검초다. 전신을 둥글게 말아서 강기를 밀집시키고, 응축된 힘을 터트리면서 검을 쏘아 낸다.
하지만 잠기일력타는 일격필살, 철구탄검을 부실 수 있다.
피할 수가 없다. 조금 전에 펼쳤던 검초를 다시 펼친다고 해도 통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여지없이 둥그런 몸체 한가운데를 찔러 올 것이다.
응축된 힘을 검으로 전달하면 막을 수 있을까? 막지 못한다. 검도 부서진다.
‘여기서 끝내자.’
왜살은 검에 진기를 집중했다. 순간,
팟!
고조시가 달려들었다.
역시 예상대로 잠기일력타다. 쾌검 중 쾌검이라는 비조복개에 실려서 터졌다.
츄웃!
왜살은 철구탄검을 전력으로 펼쳤다.
둥글게 말았던 몸이 쭉 펴졌다. 단단하게 응축되었던 진기가 일시에 풀려나갔다. 성검문에 잠기일력타가 있다면 협척검법에는 철구탄검이 있다.
까앙!
검과 검이 부딪쳤다.
왜살의 검은 가루가 되어서 흩날렸다. 부서진 검편(劍片)을 뚫고 검 한 자루가 쑥 들어섰다.
“크윽!”
왜살이 비명을 쏟아 냈다.
검이 가슴을 쑤신다. 아주 깊게, 치명적인 부위를 뚫는다. 역시 용서 없는 살인검이다.
‘장군……!’
조위 장군이 믿고 죽으라고 하지 않았나.
‘아……!’
왜살은 검에 찔려서 나가떨어지면서도 손을 꿈지럭거렸다.
손에 들렸던 검은 조각조각 나뉘어서 흩어졌지만, 여전히 검초를 그려 냈다.
타앙! 탕!
왜살의 머릿속에서 거친 충돌음이 들렸다.
환상으로 펼친 검이지만 고조시의 검을 막아낸다. 그리고 오히려 역공을 취해서 가슴을 노린다.
그 뒤는 이어지지 않는다.
후수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전력을 다했다면 잠기일력타를 막을 수 있었다. 철구탄검으로 일 초를 막아내고 역공까지 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터엉!
왜살이 튕겨 나갔다.
“휴우!”
고조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협척검법을 파악하고 싸움에 임했는데, 전력을 다한 후에야 간신히 잠재웠다.
협척검법을 알지 못했어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아니, 그때는 왜살의 검을 분지르지 못할 것이니, 승패가 갈렸으려나? 어쩌면 양패동사?
‘좀 더 재미있게 싸울 수 있었는데…….’
고조시는 아쉬움이 치밀었다.
어쨌든 이 싸움은 비무가 목적이 아니다. 죽이는 게 목적이다.
일차 목적은 달성했다. 잠기일력타에 심장을 가격당했으니 살아날 방법이 없다.
예전에 아걸이 잠기일력타를 맞고도 살아난 적이 있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일단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
지금은 전신 기력을 쏟아낸 후라서 손가락을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때, 숲에서 한 명이 튀어나왔다.
그는 고조시와 왜살을 쳐다보더니 대뜸 왜살에게 달려들어서 단검으로 푹푹 찔러 댔다.
“응? 뭐야? 이거 뭐 살찐 돼지를 찌르는 기분이네. 뭐가 이렇게 안 들어가.”
왜살의 몸은 매우 단단하다.
이미 절명했지만, 아직도 살이 고무처럼 탄력 있다. 단검이 깊이 쑥 들어가지 않고 자꾸 옆으로 미끄러진다.
어떻게 보면 단검을 잘 쓰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내는 이런 일에 능숙하다. 결코 단검에 서투른 사람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잘 쓴다.
“쉽게 죽이려고 했는데…….”
사내는 힘 잃고 쓰러져 있는 고조시는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왜살을 죽이는 데만 집중했다. 이미 죽은 사람인데, 더 확실하게 숨을 끊을 생각이다.
그는 단검을 들어서 왜살의 목에 댔다. 목줄을 뜯어내거나 머리를 자를 생각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곧 손을 멈췄다.
스으읏!
그가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느낌이 좋지 않다. 등 뒤에서 싸한 느낌이 일어난다. 분명히 누군가가 서 있다.
스읏!
그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웃!”
아걸! 아걸이 서 있다.
“네가 어떻게?”
아걸은 사내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져 있는 왜살을 쳐다봤다.
“네 눈에는 갈라진 심장이 보이지 않은 거야? 죽은 사람에게 뭐 하는 짓이야?”
“그게…….”
“날 단번에 알아보는군. 어떻게 알았어?”
“……혈무대에서.”
사내가 사색이 되어서 벌벌 떨었다.
“왜살이 날 죽이러 왔다기에 내가 먼저 찾아왔는데, 훗! 그건 그렇고, 이건 무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치사하게 죽은 사람을 건드리는 건 뭐야?”
츠읏!
아걸이 반철도를 들어 올렸다.
“이익!”
사내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다짜고짜 뒤돌아서 치달리기 시작했다. 한데,
쒜에에엑! 퍼억!
아걸이 반철도를 냅다 내던졌다. 허공을 가른 반철도가 사내의 등에 정확히 꽂혔다.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아걸을 반철도를 회수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고조시를 쳐다봤다.
“칠군?”
“후…….”
고조시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는 아직 진기가 회복되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수습된다. 한데 이때 아걸을 만났으니…… 그가 손가락만 까닥 움직여도 숨이 끊어진다.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아쉽네. 잠기일력타를 썼다면 상당히 재미있는 싸움이었을 텐데.”
“재미있었지.”
“기력 빨리 회복하고 가라.”
아걸이 등을 돌렸다.
“그냥 가나?”
“그냥 가지 그럼? 맥이 다 빠진 사람을 앞에 놓고 뭘 해. 멀쩡해야 칼을 겨뤄보지. 이 사람, 오늘 죽을 팔자였나 보네. 후후! 네가 죽이지 않아도 내가 죽였어.”
아걸은 미련 없다는 듯 걸어갔다.
그가 죽은 사내에게 걸어가서 반철도를 뽑았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잠시 후, 고조시가 일어섰다.
사부가 치밀한 줄은 알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죽은 자를 다시 죽이는 일까지 벌일 줄은 몰랐다.
왜살을 ‘상’으로 봤기 때문에 확실하게 죽이려는 거다.
단지 왜살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않았겠지만, 조위가 던진 상이기 때문에 뒤끝 없이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걸음을 옮길 때도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일 것이다. 이미 상이 던져졌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고조시는 죽은 사내를 힐끔 쳐다봤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했다. 아걸 말대로 비조복개에 당한 상처가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그는 마지막으로 죽은 왜살을 쳐다본 후,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