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第四十四章 오탁(五託) (1)
고조시가 떠나자 일단의 무리가 튀어나와 왜살의 상처를 살폈다.
“어때?”
“어떻긴 뭐가 어때! 생명이 촌각에 달렸지. 위급해.”
그들은 재빨리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능숙한 솜씨로 찢어진 상처를 막았다. 갈라진 장기에는 알지 못할 가루를 뿌렸다.
치료를 주도하는 사람은 두 명이다.
그들은 의원인 듯 핏물이 펑펑 쏟아지는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이쪽 상처는 매우 심한데…….”
“다행히 검이 깊게 들어가지 않았어. 살가죽을 두껍게 만드는 공부가 있다고 해서 믿지 않았는데, 정말 이런 기공이 있네. 무림이란 정말…….”
“이 정도면 매우 깊게 들어간 것 같은데?”
“성검문 검공은 실수가 없다고 들었어. 더욱이 고조시는 소축십검이야. 실수할 리 없잖아. 요행히 목숨을 구하면 정말 운이 좋은 거라고 봐야지.”
그들은 두런두런 말까지 주고받으며 치료했다.
이런 치료에 대한 경험이 매우 많아 보인다.
“됐어. 여기서는 더 할 게 없어.”
두 사내가 일어섰다.
그러자 다른 두 사내가 재빨리 들것을 가지고 와서 왜살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우리를 따라올 수 없을 텐데?”
들것을 가져온 사내가 의원들에게 말했다.
“우린 천천히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셔. 설마 이 나이에 길을 잃을까 봐?”
“아니. 주변이 너무 흉흉해서 하는 말이지.”
“후후! 보아하니 여기 누군가 나타나면 당신들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은데? 이 사람들, 우리 세계 사람들이 아니라고. 척 보면 몰라? 귀신들인 거.”
“그럼 우리 먼저.”
들것을 든 사내들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신속히 경공을 펼쳤다.
시간이 금이다. 시간이 생명이다.
시간을 얼마나 앞당길 수 있느냐에 따라서 왜살을 살릴 수도 있고 죽게 할 수도 있다.
빨리 약속된 장소로 데려가서 집중 치료를 해야 한다.
쒜에에에엑!
그들은 바람처럼 움직였다.
아걸은 낯선 자들의 움직임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저들이 왜살을 치료하고 데려가는 모습을 모두 봤다.
왜살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다.
‘살았어.’
저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다.
왜살은 자신 외에 성검문 잠기일력타를 맞고도 살아난 두 번째 인물인 셈이다.
조위 장군은 서신에서 다섯 가지 부탁을 해 왔다.
첫 부탁은 간단하다. 매우 쉽게 들어줄 수 있다.
왜살이 두 번째 공격에서 살 수 있게끔 공격을 막아 달라는 부탁인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허도기가 암살자를 보낸다. 왜살은 그에게 죽을 것이다. 그 후, 또 다른 자가 나타나서 왜살의 죽음을 확인할 것인데, 그것만 막아 달라고 한다.
조위 장군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다.
왜살이 고조시에게 당할 것도 알았고, 누군가가 나타나서 왜살의 목을 그을 것도 짐작했다.
하지만 허도기가 보낸 암살자가 고조시라는 것은 모른 듯했다.
왜살이 고조시 손에서 살아난다면 그것은 순전히 왜살 본인의 능력이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공부를 봤다.
왜살은 잠기일력타를 당하고도 심장이 베이지 않았다. 만약 심장이 갈렸다면 의원들이 저런 식으로 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벌써 목숨이 끊어졌을 테니까.
잠기일력타가 심장을 비껴갔다.
자신이 그런 식으로 살아났다. 잠기일력타에 찔리는 것은 어떻게 하지 못했지만, 심장만큼은 지켰다. 순간적으로 미세한 움직임을 일으켜서 찔러오는 칼을 옆으로 밀어냈다. 심장에서 한 치나 두 치쯤 이동시켰다.
왜살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잠기일력타를 막았다.
‘살가죽을 두껍게 만드는 공부라, 하하. 그런 공부도 있군.’
아걸은 의원들이 주고받는 말에서 왜살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대충 짐작했다.
고조시가 전력을 모두 쏟아 내서 쳐 낸 일격인데, 그런 일격이 살가죽을 깊게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두 번째 사내가 단검으로 찌르면서 ‘살찐 돼지를 찌르는 것 같다’라고 중얼거린 말속에 해답이 있다. 돼지나 하마처럼 기름기로 뭉쳐진 가죽은 단검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왜살은 살찌지 않았다. 오히려 깡말랐다.
기공을 운용해서 단검이 들어갈 수 없게끔 기름기처럼 유들유들한 강기막을 둘러쳐 놓았다.
희한한 기공이다.
어쩌면 조위 장군은 왜살에게 이런 기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죽음을 주문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딱 그렇다.
왜살을 구해서 데려간 자만 봐도 그렇다.
상처를 치료한 자는 틀림없이 의원들이다. 굉장히 익숙한 솜씨로 응급치료를 했다. 왜살이 기공으로 심장을 보호했다고 하지만 고조시가 성공했다고 착각할 정도로 심하게 당한 것은 맞다. 검에 정통으로 찔렸다.
그런 자를 치료하기는 쉽지 않다.
의원도 보통 의원이 아니고, 창상(創傷)에 매우 경험이 많은 의원들이다.
들것을 옮긴 자들은 경공 대가다.
두 사내의 경공은 절정 고수처럼 빨랐다. 다른 무공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경공 하나만 놓고 보면 절정 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러 경공에 능한 자들을 대기시켜 놓았다.
왜살이 매우 위중한 상태에 빠질 것으로 예측했다.
아걸은 혀를 내둘렀다.
앞날에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환히 예측하고 일을 꾸미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오차 없이 맞아떨어지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만족할지 모르겠다. 또 이런 능력은 비상한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손가락질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아걸은 재미없다. 흥미도 없다.
조위 장군이 아들이 죽은 것에 대해 오해를 풀었다고 해서 그 대가로 밀지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하나는 끝났나?”
아걸은 이미 까마득히 멀어진 들것을 지켜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조위 장군은 밀지에 다섯 가지 부탁을 적어 놨다.
부탁들은 한꺼번에 들어줄 수 없다. 또 선택해서 들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부탁은 순차적으로 일어난다.
첫 번째 부탁, 왜살을 살려 주는 것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다섯 번째 부탁까지 쭉 이어진다.
한 사람을 살려달라는 것이 첫 번째 부탁, 한 사람을 죽여달라는 것이 두 번째 부탁이다.
두 번째 부탁을 이행하기 위해서 걸음을 옮긴다.
저벅! 저벅!
아걸은 짐승들이 다니는 길로 들어섰다.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삶의 길을 찾는다. 살 수 있는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이런 길이니, 짐승들만 다니지.
이게 사람의 생각인데, 짐승은 오히려 가파른 산길에서 생존을 추구한다.
산길 곳곳에서 짐승의 흔적이 발견된다.
짐승 발자국이나 똥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끔 노루 울음소리도 들린다. 멧돼지가 뒹굴었을 법한 진흙더미도 보인다. 칡뿌리를 캐 먹은 듯 땅이 마구 파헤쳐 있다.
몽설이 이런 길을 걸어갔다.
자신이 걷고 있는 산길은 아니겠지만, 이와 흡사한 길을 통해서 서리형개에게 갔다.
조위 장군은 서신에 서리형개가 머무는 곳을 말해 주었다.
사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말해 주지 않아도 안다.
몽설이 더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다.
지금도 서리형개가 몽설과 만났던 곳에 머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걸은 숲을 헤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타악! 탁! 탁!
칼로 나무를 두들기는 소리가 울렸다.
분명히 칼로 나무를 치는 소리인데, 마치 도끼로 장작을 패는 듯 나무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빠직! 빠악!
아걸은 나무 패는 소리 속에서 예민하게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찾아냈다.
사아앗!
잘 든 면도날로 종이를 가르는 듯 형체를 베어 내는 소리다. 모든 소리의 저변에 깔린 진짜 칼 소리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아니라 나무를 파고드는 소리다.
사아앗! 사삿! 사앗!
소리가 세 번 울렸다.
서리형개의 일홀도, 삼도일살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더 강해졌네.”
아걸이 중얼거렸다.
서리형개와는 이미 몇 번에 걸쳐서 칼을 맞댔다.
화염도가 얼마나 강한지, 어떤 칼인지 아걸처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서리형개는 웃통을 벗고 나무꾼처럼 거목을 찍고 있었다. 단지 손에 들린 것이 도끼가 아니라 칼이라는 점이 다를 뿐,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나무꾼 모습이다.
처벅! 처벅! 처벅!
아걸이 서리형개를 향해 걸어갔다.
문득 칼 휘두르는 소리가 멈췄다. 서리형개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귀를 기울인다.
아걸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쉬잇! 퍽!
서리형개는 나무에 칼을 박아 놓았다. 그리고 수건을 들어서 땀으로 범벅된 상반신을 닦았다.
“왔냐.”
그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서리형개는 완전히 야인 모습이다. 사람을 전혀 만난 적이 없는 야인처럼 거칠고 난폭한 모습이 엿보인다.
숲에서 태어나 숲에서 자란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보기 좋네.”
아걸이 말했다.
서리형개는 수건으로 몸을 닦다가 힐끔 돌아봤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네놈이 올 줄 알았다. 이번에는 전처럼 싱겁게 나가떨어지지 마. 너무 우습잖아. 일홀도를 가졌다는 놈이.”
“그러려고.”
아걸이 차분히 대답했다.
서리형개의 칼은 화염도(火焰刀)다. 화(火)가 칼을 물들인다.
도신일체가 되면서 감정까지 칼에 싣는다. 화가 지닌 강렬한 분노까지 칼에 집중시킨다. 분노가 포함된 칼은 당연히 매우 잔인하고 난폭하다.
하지만 지금은 화가 보이지 않는다.
화염도에서 벗어나 야도(野刀)를 추구하고 있다.
이것만 봐도 서리형개의 칼은 예전보다 최소한 한 단계 이상은 발전했다.
서리형개가 땅에 벗어 놓은 웃옷을 집어 들어 입었다.
“몽설 그놈 입이 꽤 싸군. 그새 내가 있는 곳을 알려준 거야? 날 죽이라고?”
“아니. 당신 인생 참 더럽게 산 것 같아. 당신 죽이라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야.”
“몽설이 약이 올라서 서방에게 고자질했다면 이해하겠는데, 다른 놈?”
“당신이 그 사람을 건드리니까. 그 사람도 당신을 죽여달라고 하는 게 맞지.”
서리형개는 무엇인가 짐작되는 게 있는 듯 피식 웃었다.
“너도 관부의 개가 된 거냐?”
“뭐가 되었든 허도기의 개보다는 낫지.”
“하하하!”
서리형개가 크게 웃었다.
“네놈이 말하는 걸 들어보니 누가 시켰는지 알겠는데. 장군가에서 사람을 보냈다면 이해가 돼. 하지만 그게 너라는 게 상당히 놀라운데? 넌 관부와 인연을 맺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거 하나는 믿어도 돼. 난 칼을 팔아먹지 않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서리형개가 옷을 다 입고 허리띠까지 찼다. 그리고 나무에 박아 놨던 칼을 쭉 잡아 뺐다.
“우리 사이에 긴말은 필요 없지?”
휘링!
서리형개가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몽설이 서리형개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몽설이 말해 주기 전까지, 아걸은 서리형개가 봉산에 와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서리형개가 허도기의 명을 쫓아서 왜살과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을 죽여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가 막히다 못해서 분노까지 치밀었다.
허도기 명을 받고 사람을 죽인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부를 죽인 자를 돕는다.
조위 장군은 서리형개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중간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 솔직히 이 부탁은 들어주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일홀문을 베는 짓은 하지 않는다.
특히, 관부와 결탁해서 행동하는 일은 없다. 위정자의 말을 들어줄 이유도 없다.
단순한 부탁이라면 절대로 칼을 들지 않았다.
아걸이 서리형개를 찾아온 것은 조위의 부탁 때문이 아니다. 몽설에게서 서리형개가 행하고 있는 일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허도기의 개이지 않나.
원수에게 빌붙어서 칼잡이 노릇을 하는 개.
서리형개를 딱 그 정도로 본다.
아걸이 반철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지금까지만 해도 말 많이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