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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217화 (217/600)

#217화. 第四十四章 오탁(五託) (2)

휘링! 휘링!

아걸이 반철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진기가 실리지 않는 칼이다.

이번에 휘두르는 칼에는 은거 무인 중 승표의 달인인 황렬의 무공이 가미되어 있다.

승표는 줄 달린 표두(鏢頭)다. 승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줄부터 움직여야 한다. 표두로 사람을 살상한다고 해서 표두부터 움직일 수는 없다.

줄을 움직이면 줄에 달린 표두가 움직인다.

아걸은 반철도 손잡이 밑부분에 파 놓은 도환(刀環)에 손가락을 걸었다.

휘리릭! 휘릭! 휘리릭!

줄 달린 표두를 돌리듯이 손가락으로 무거운 반철도를 휘휘 휘돌렸다.

“일홀도가 바뀌었군.”

“좋아졌다는 말로 알아듣지.”

아걸은 서리형개를 향해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걸의 전신은 허점 투성이다. 싸울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무작정 걸어온다.

아걸에게 어떤 계획이 있든, 이런 모습으로 서리형개 같은 고수와 싸운다는 것은 무리해 보인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사람과 싸울 때가 가능한 모습이다.

“……네놈이 날 능멸해?”

서리형개가 눈썹을 찡끗 추겨 올렸다.

“능멸인지 아닌지는 칼을 대보면 알지. 그런데 왜 이렇게 말이 많아졌을까?”

“후후! 한 방 먹었군. 좋아!”

쉐에에엑!

서리형개가 신형을 쏘아 왔다.

일순, 서리형개의 신형이 눈앞에서 싹 사라졌다. 그리고 칼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걸의 칼이 변했듯이 서리형개의 칼도 변했다.

이 칼을 막으면 두 번째, 세 번째 칼이 연이어 터진다.

칼을 막지 않고 피해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세 번째 칼이 도주할 길을 차단하고 달려든다.

휘익! 휘링!

아걸은 재빨리 몸을 휘돌렸다. 그리고 몸이 휘도는 회전력을 이용해서 반철도를 던졌다. 무작정, 본능적으로 던진 듯 서리형개를 정확히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걸은 서리형개의 칼을 받아 낸 적이 없다. 모든 칼을 절명 직전까지 얻어맞기만 했다.

따앙!

거센 쇳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칼을 받아 냈다.

아걸의 반철도에는 진기가 실리지 않은 것 같지만 실은 진기가 실려 있다. 서리형개를 쳐다보지 않은 것 같지만, 서리형개의 칼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던졌다.

따앙! 땅!

두 번째 칼도, 세 번째 칼도 막았다. 삼도일살이 몸을 덮치기 전에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아걸은 도신일체를 넘어서 기령일체(氣靈一體)가 되어 있다.

정신과 육체와 칼이 하나다. 마음이 움직이면 몸이 움직인다. 칼도 움직인다. 반대로도 작용한다. 칼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며, 마음이 따라간다.

어떤 사람은 이게 무슨 헛소리냐고 할지도 모른다.

몸이 먼저 움직인 다음에 칼이 움직여야지, 어떻게 칼이 먼저 움직이냐고 말한다.

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지만, 어떤 힘이 가해지면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는 성질이 있다.

칼을 허공으로 쳐들었다가 후려치면, 어느 순간부터는 칼이 손보다 앞서 나간다. 칼이 원심력을 일으키면서 달려 나가고, 몸은 구심력을 작동시켜서 칼을 끌어당긴다.

이때는 분명히 칼과 몸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몸이 칼에 딸려가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치를 활용하면 전심전력으로 칼을 쳐 내는 것보다 두 배 빠르게 칼을 움직일 수 있다. 전력을 다해서 뻥 차는 것보다 힘없이 톡 차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

따앙! 땅땅! 따아앙!

두 칼이 거세게 얽혔다.

아걸은 서리형개가 전개한 칼을 아홉 차례나 막아 냈다. 삼도일살을 세 번 막은 것이다.

몰안은 더욱 정심하게 작동한다.

육신의 힘만 쓰는 것이 아니라 칼이 지닌 본래의 힘을 끌어쓰기 시작한 후부터 몰안은 더욱 차분하고 예리해졌다.

서리형개의 움직임이 환히 읽힌다.

삼도일살을 펼치는 모습, 칼이 움직이는 방향과 속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따앙! 땅땅!

삼도일살을 또 한 차례 막았다.

서리형개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칼을 뻗어 내지만, 모든 움직임이 읽히고 있다.

‘삼도일살이 보여. 당신의 패배야.’

땅! 땅! 땅!

열다섯 번째 칼에서 진기를 쏟아 냈다. 서리형개의 칼을 강하게 밀어냈다.

칼에 전해지는 압박이 거세자, 서리형개가 놀랐는지 눈을 부릅떴다.

쒜에에엑!

열여섯 번째 칼이 서리형개의 옆구리를 찢어 내며 지나갔다.

아걸은 등 뒤로 돌아가서 열일곱 번째 칼로 왼쪽 어깨뼈 밑에서부터 오른쪽 어깨뼈까지 북 그었다.

이런 칼은 척추를 잘라 버린다.

즉사를 노린 칼이며, 즉사하지 않더라도 평생 불구 신세를 면치 못한다.

척추가 무너지면 치료할 수 없어진다.

“크윽!”

서리형개가 비명을 내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하지만 그는 다시 튕기듯이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쓰러지면 죽는다는 경계심이 작용했다. 하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서리형개가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크크큿……!”

서리형개가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사형이 네놈에게 팔이 잘렸을 때, 이미 내 경계를 넘어섰다는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형편없이 무너질 줄은 몰랐는데. 크읏, 후후……. 날 이렇게 만든 칼을 가지고도 허도기에게 당한 거야? 그놈 정말 검귀군.”

서리형개의 칼은 근처에 떨어져 있다.

서리형개가 칼을 잡기 위해서 바둥거렸다.

“일부러 살수를 피했다. 당신 목숨은 내 것이 아니라 몽설 것이라서. 척추도 가르지 않았다. 불구를 베게 할 수는 없으니까. 살아서 몽설과 싸워라.”

스읏!

아걸이 반철도를 거뒀다.

“하……! 내가 언제부터 이런 꼴이 되었지. 내 목숨을 이놈 저놈이 주고받네.”

저벅! 저벅!

아걸은 서리형개를 남겨 두고 미련 없이 걸었다.

조위 장군은 서리형개를 죽이라고 했지만, 굳이 죽일 필요가 없다. 저 정도로 다쳤으면 당분간 칼을 쓰지 못한다. 누가 봉산을 기웃거리든 막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서리형개를 몽설에게 양보한 것도 거짓이 아니다.

서리형개가 죽으면 몽설은 부모의 원수를 놓치게 된다. 자신의 손으로 복수하지 못한 것이 평생 한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는 혈검도 더는 발전하지 못한다.

서리형개가 살아 있어야 혈검이 절정에 이를 수 있다.

복수하려면 최소한 서리형개 수준까지는 혈검을 끌어올려야 하지 않겠나.

서리가헌, 서리형개는 몽설 몫이다.

서리가헌의 팔을 자르고, 서리형개를 베었으니 두 사람에 대한 복수는 끝났다.

원래 악재는 연속해서 닥치는 법이다. 흔히 산 넘어 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기껏 호랑이를 피했더니 이제는 늑대가 나타나서 목숨을 노린다.

아걸이 사라지자 또 다른 자가 나타났다.

“이 여우 같은 놈!”

서리형개가 진개를 쏘아봤다. 하지만 몸은 이미 칼이 떨어진 곳을 향해 움직였다.

몸을 움직일 수 없지만, 그래도 칼은 잡아야 한다.

몸에서 피가 펑펑 쏟아졌다. 지혈해야 하는데, 그만한 시간도 없다. 보통 무인들 같으면 상처를 치료하도록 시간을 주겠지만 진개는 그런 놈이 아니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있으면 당장 검을 들어서 목을 칠 놈이다.

스읏!

진개가 서리형개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내 신조가 뭔지 알아? 송양지인(宋襄之仁)은 필요 없다는 거야. 난 내 분수를 잘 알거든.”

강을 건너느라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면 즉시 공격한다. 위급할 때 공격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미친 헛소리다. 강을 건넌 후에 지쳐 있으면 즉시 공격해야 한다.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면서 몸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사람은 없다.

세상 사람들은 송양지인을 비웃는다.

그렇다면 지금 진개가 하는 행동도 비웃어서는 안 된다. 이게 당연하다.

“나는 네가 칼을 잡으면 한두 수 정도는 더 뽑아낼 걸 알고 있어. 그걸 왜 봐야 할까? 그냥 지금 공격하면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목을 벨 수 있는데.”

“후후후! 너 같은 놈에게 이런 말을 들은 줄은 몰랐군.”

“넌 사부님의 명령을 무시했어. 몽설과 서리가헌을 죽이지 않았지? 그러면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거야. 그럴 때는 어떻게 된다고 했지? 날 만난다고 했지?”

스릉!

진개가 검을 뽑았다.

“후후후! 아걸 그놈은 이 모가지를 몽설에게 주라고 했는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여우가 달려드네. 정말 내가 인생 한번 개처럼 살았던 모양이군.”

서리형개가 투덜거렸다.

죽음이 임박했다. 진개 이놈은 절대로 검을 거둘 인간이 아니다.

그때, 숲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야! 쓰레기! 네가 언제부터 우리한테 칼을 겨눴니? 네 배때기에는 칼이 안 들어가니?”

서리가헌이다.

서리가헌은 봉산에 서리형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왕 봉산에 발을 들인 김에 서리형개를 만나려고 왔다가 아걸과 싸우는 모습을 봤다.

그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칼과 칼의 싸움이다.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오히려 일홀도를 욕되게 하는 싸움이다. 그러니 누가 죽든 절대로 끼어들면 안 된다. 일홀문이라면.

서리형개의 일홀도가 많이 변했다. 하지만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

아걸의 일홀도는 매우 묘했다. 검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아니, 검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칼이 삼도일살을 쳐 낼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팔을 자를 때와는 전혀 다른 칼이라는 거다.

그 후, 진개가 나타났다.

이놈은 싸우려고 온 놈이 아니다. 강한 칼을 보려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려는 거다.

이건 참을 수 없지.

“넌 좀 빠져야겠다. 이놈 몸뚱이에 칼이 박히는지 봐야겠어.”

서리가헌이 말했다.

서리가헌이 나타났어도 진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입가에 조소를 베어 물었다.

“후후후! 팔이 제대로 붙어 있어야 싸울 맛이 나지. 한쪽 균형이 무너졌는데, 괜찮을까?”

“별 거지 같은 놈이 요상한 걱정을 하네. 너 돌았니? 네가 죽는다는 생각은 안 하니?”

쒜에엑!

진개가 잡가지 신형을 쏘아 냈다.

기습이다. 서리가헌이 말하는 도중에 공세를 취했다.

방법은 치사하지만 검은 놀랍다. 빛살이 일직선으로 쏘아 온다. 검이 아니라 빛살이 다가온다.

직사광류 속에 암수, 은장재계이살이 담겨 있다.

순간, 서리가헌이 평온한 모습으로 보법을 밟았다.

매일매일 걸으면서 수련한 보법이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보법이 다시 밟혔다.

슷!

어깨를 움츠렸다.

그 순간, 서리가헌의 신형은 마치 화약으로 쏘아진 대포알처럼 진개를 향해 부딪쳐갔다.

타타타타탁! 쫘아아악!

서리가헌의 검이 열 개로 쫙 갈라졌다.

“웃!”

진개가 깜짝 놀라서 물러서려고 했다.

방금 서리가헌이 보여 준 움직임은 예전의 서리가헌보다 두 배는 더 빨랐다. 그리고 진개는 이런 빠름이 터질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방심이다!

까앙! 쒜에에엑!

첫 번째 칼이 진개의 검을 쳐 냈다. 두 번째 칼이 진개의 검 든 손을 팔꿈치부터 싹둑 잘라 버렸다.

핏물이 쫙 뿜어졌다.

진개는 즉시 땅에 떨어진 팔을 집어 들었다.

몸에서 잘려 나간 손은 아직도 검을 꽉 쥐고 있다. 칼에는 아직도 진기가 밀집되어 있다.

진개는 망설이지 않고 신형을 뽑아냈다.

서리가헌은 진개가 도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쫓지 않았다.

“언제부터 일홀도가 이렇게 물러졌지? 패하고 죽이지 못하고. 후후……!”

서리형개가 웃었다. 그때,

“우욱!”

서리가헌이 갑자기 허리를 숙이며 입으로 피를 뿜어냈다.

서리가헌도 이번 격돌에서 내상을 입었다. 첫 번째 격돌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하다.

서리형개가 깜짝 놀라서 서리가헌을 쳐다봤다.

“저놈 내공이 돌덩이다. 바위에 부딪힌 것 같아. 도대체 뭘 수련한 거야?”

서리가헌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 풍도곡은 망한 건가?”

서리가헌은 대답 없이 서리형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품에서 금창약을 꺼내 등에 난 상처에 발랐다.

“뭐 하니? 옆구리 터진 것 막지 않고.”

서리형개는 옆구리 상처를 진기로 막고 있었다. 본인이 억누르려고 해서 억누른 게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진기를 이용해서 피를 누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아직도 혼절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자.”

문득, 서리가헌이 말했다.

서리형개는 움찔했다.

“우리는 서리 씨 아니니. 사부께서 우리 칼을 인정하고 서리 씨를 주지 않았니. 이미 우리 칼은 일홀도야. 우리 칼은 허도기를 능가할 수 있는 칼이야. 사부와도 겨루겠다고 방방 뜨던 칼이잖니. 허도기가 사부 칼을 두려워했다면 우리 칼도 두려워해야지. 난 내가 머물던 동굴로 갈 생각이야. 이미 절정도인데, 어디서부터인가 어긋났어. 처음부터 다시 살펴볼 생각이다. 너는?”

“나는……. 후후, 그럼 살아야겠네.”

서리형개가 기어가서 땅에 떨어진 칼을 집었다. 그리고 칼을 지팡이 삼아서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사형, 신세 좀 지지.”

“쯧! 네놈이 보통 무거워야 말이지.”

서리가헌은 인상을 쓰면서 서리형개를 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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