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第四十四章 오탁(五託) (4)
“왜살은 잠기일력타를 막지 못했습니다. 사부님께서 검초를 미리 알려 주신 덕분에…….”
지나가는 바람 소리처럼 의미 없는 보고다.
고조시가 한 일은 이미 보고를 통해서 상세하게 전해 들었다. 고조시가 보고하는 것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싸움 현장을 목도한 것처럼 생생하게 보고 받았다.
그런데도 고조시가 계속 보고하도록 내버려 둔다.
“제가 왜살을 쓰러트린 후, 낯선 자가 나타나서 완살(完殺)을 시행했습니다.”
“내가 시켰다.”
“네.”
“널 믿지 못해서 보낸 게 아니야. 죽일 놈은 확실하게 매듭짓는 게 좋지. 잠기일력타는 시전자를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잖아. 그동안 누가 빼내 갈 수도 있고.”
“네.”
“…….”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내가 단검으로 완살을 시행하고 있을 때, 아걸이 나타났습니다. 왜살과 비무 약속이 되어 있었던 듯한데, 정확한 것은…….”
“…….”
고조시는 봉산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고조시가 보고를 마치자, 허도기가 그를 쳐다봤다.
“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고조시는 얼핏 대답하지 못했다. 사부가 어떤 뜻에서 이런 물음을 던지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불만이 많지?”
“아닙니다. 불만 없습니다.”
“쯧!”
허도기가 혀를 찼다. 그리고 고조시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완살이 행해지기 전에 네가 본 것을 말해 봐. 왜살이 죽은 것 같더냐?”
“심장이 갈라진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고조시가 엉겁결에 말했다.
사실, 고조시는 심장이 갈라진 것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잠기일력타를 맞고 나가떨어졌으니 당연히 심장이 갈라졌으려니 하고 생각할 뿐이다.
왜살은 일격을 당한 후,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했다.
또 아걸도 말했다. 심장이 갈라진 것을 보고도 이토록 잔인하게 칼질을 하느냐고.
그 말이 퍼뜩 떠올라서 대답했다.
“심장이 갈라진 것을 봤다?”
허도기가 되물었다.
“네.”
“너는 내가 조명천검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네?”
“후후! 잠기일력타를 사용하는 순간에는 타점만 보게 되지. 검이 타점에 꽂히는 순간까지밖에 못 봐. 그 후에는 진기가 빠져나가서 잠시 머릿속이 텅 비게 돼.”
“…….”
고조시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로 네 검이 심장을 뚫었느냐?”
“……죄송합니다.”
고조시가 즉시 머리를 숙였다.
사부는 잠기일력타를 사용한 후에도 검이 어디를 가격했는지 본다. 검이 타점을 뚫은 후까지 확실하게 본다. 잠기일력타라서 보지 못하는 게 아니다. 공부의 차이다.
너는 아직 수련이 덜 되었다는 뜻이다.
정말로 검이 뚫는 것을 볼 정도로 검이 수련되었느냐는 물음이다.
사부는 속이지 못한다. 걸음걸이만 보고도 무공 경지를 짐작해 내는 분이다.
허도기가 고조시에게서 눈길을 돌려 창밖을 보며 말했다.
“넌 너무 착하구나.”
고조시는 침묵했다.
“북군(北軍)에 배치해 주마. 거기 가서 마음껏 검을 휘둘러 봐. 쯧! 소축십검이라는 놈이. 내게 무공을 그만큼 배웠으면 지금쯤 자리를 잡았어야지.”
“죄송합니다.”
고조시는 즉시 허리를 숙였다.
허도기가 말한 북군은 멸군(滅軍)이라고도 불린다.
북방 유목민족과 한시도 싸움이 끊이지를 않는다. 매일매일 싸움이 벌어진다.
이기는 날도 있고, 지는 날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병사는 쓰러진다. 많이 쓰러지고, 적게 쓰러지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항시 죽는 자가 나온다.
그래서 북군에 배치되면 제일 먼저 유서부터 쓴다.
대단히 고달프고 힘들다.
하지만 고조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통이 확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군대를 따라다닌 세월이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다. 거의 이십 년에 가깝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싸움을 치러봤겠나. 전쟁이라면 환히 안다.
자신에게는 전쟁이 적성에 맞는다.
무림에서 강자를 만나 싸우는 것보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이 더 활기차다.
“알겠습니다.”
고조시가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툭!
허도기가 고조시에게 비급 한 권을 던졌다.
“수련해라. 다음에도 네 무공이 지금 같으면, 내가 벤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소축십검이라는 이름에 흠집을 내지 마. 내게 무공을 사사 받았으면 이름값을 하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고조시가 비급을 받아서 품에 넣었다.
그는 사부가 건넨 비급에 어떤 무공이 기재되어 있는지 들춰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만큼 허도기의 표정은 냉혹했다. 싸늘하고, 살벌했다.
“오늘은 다들 가관이군.”
허도기가 인상을 찡그렸다.
고조시가 물러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진개가 들어섰다.
허도기는 진개가 입을 열기도 전에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충 짐작했다.
팔이 잘려서 왔다.
진개는 오른손잡이인데, 검을 쓰는 오른손이 손목 위에서부터 잘려 나갔다.
“졌구나.”
“네.”
진개가 이를 꽉 깨물며 대답했다.
“이해가 안 되는데? 네 검이라면 서리형개를 벨 수 있었을 텐데, 왜 졌을까?”
허도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아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 왜 졌느냐는 추궁이다.
“삼도일살은 충분히 준비했는데, 서리형개와 싸운 것이 아니라 서리가헌과 마주쳤습니다.”
“가헌이와?”
“네.”
진개는 봉산에서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말했다.
어차피 사부의 눈과 귀는 속이지 못한다. 지금 당장 보고를 받지 못했어도 곧 알게 된다.
아니, 영원히 보고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사부도 인간인 이상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요행에 운을 걸기보다는 이실직고하는 게 속 편하다. 사실대로 말하면 대책을 세워 준다. 혼자 발버둥 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길들었다.
“폐관 수련을 한 번 더 해야겠다.”
사부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팔을 잃었으니 모든 게 달라지겠지. 지금까지 수련한 무공은 버리고 좌수 검법을 익혀.”
“가능하겠습니까?”
가능은 하다. 무인으로 계속 살아갈 생각이면 좌수 검법을 반드시 수련해야 한다. 문제는 시간이다. 좌수 검법을 수련하느라고 십 년, 이십 년이 걸린다면 견디지 못한다.
진개는 단시일에 수련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후후!”
허도기가 웃었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어서 비급을 꺼냈다.
“이번에는 널 괴물로 만들어주지. 다음에는 서리가헌이든 서리형개든 누구든 벨 수 있을 것이다.”
휘릭!
허도기가 비급을 던졌다.
진개는 왼팔로 날아오는 비급을 받았다.
‘역시.’
진개는 한숨 돌린 듯 안도했다.
사부가 비급을 줘서 안도한 것이 아니다. 사부는 이미 좌수 검법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실직고한 게 천만다행이다.
진개는 사부가 건네준 비급을 살펴봤다. 그리고 깜짝 놀라서 경악성을 토해 냈다.
“웃!”
진개는 너무 놀라서 눈만 끔뻑거렸다.
- 분뢰절맥(分雷絶脈)
분뢰절맥은 잔악함이 지나쳐서 사용이 금지된 마공 중의 마공이다.
초식이 아니라 조명십해처럼 초식 속에 녹아드는 신공, 아니, 마공이다.
분뢰절맥을 수련하면 심성이 변한다고 한다.
아무리 착했던 사람도 악마가 된다. 불심 깊었던 승려도 사악하게 변한다.
분뢰절맥은 신경을 건드린다.
얌전한 사람이나 겁 많은 사람조차도 폭군으로 만들어 버리는 공부다. 반미치광이가 되어서 아무나 두들겨 패고 죽이는 살인귀로 변한다.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후후! 겁나느냐?”
“……아닙니다.”
진개가 허리를 숙였다.
“지금은 그게 아니면 소축십검으로 돌아올 수 없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부분은 수정해 놨으니 마성에 흔들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아! 감사합니다.”
진개는 진심으로 사부에게 감복했다.
수련하고 수련해도, 앞으로 백 년이 지나도 결코 사부의 발꿈치조차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수련해라. 무인이 무공을 펼치지 못하면 인생 끝난 것이야. 여기서 인생을 끝낼 수는 없지. 어떤 악마가 되더라도 무공은 다시 이어가야겠지.”
“깊이 있게 수련하겠습니다.”
“지금 한참 사람 손이 부족할 때야. 한 달 안에 연공을 마치고 나올 수 있도록 해.”
“한 달입니까?”
진개는 이번에도 놀랐다.
아무리 마공이라고 해도 최소한 일이 년은 수련해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한 달이면 수련한다고? 세상에 이런 속성 검법도 있었나? 더욱이 마성까지 제거했다면 수련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당장 수련할 생각이다.
“다만 그 무공을 수련하면 다시는 양지로 나올 수 없다. 음지에서 살아야 해.”
“네!”
진개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면 어떤가. 아무 상관 없다. 마성을 제거했다고 해도 마공은 마공이다. 무림에서 수련이 금지된 마공을 연성했으니 드러내 놓고 무공을 펼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연공에 들면 좋은 약 몇 개 보내 주마.”
“감사합니다.”
먼젓번 연공에서 마단(魔丹)을 복용했다. 소축십검 전부가 연공에 들었고, 모두 마단을 사용했다.
소축십검이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
풍도곡 칼 귀신들에 이어서 아걸에게까지 처참하게 무너졌다. 아걸에게만 다섯 명이 죽었다. 그래서 모두 연공에 들었고, 마단을 기꺼이 삼켰다.
덕분에 진기는 이십 년 이상 급신장했다.
마단은 잠력을 폭발시킨다. 그래서 짧은 시일에 아주 큰 성취를 이뤄 준다. 마단의 폭발력이 너무 강해서 경맥이 손상될 위험이 크지만, 한고비만 넘기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소축십검은 대부분 마단을 통제했다.
물론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다. 잠력이 폭발하면서 경맥이 약간 손상되었다. 그래서 진기를 일으킬 때마다 경맥이 긁힌다. 짜증이 치민다. 성격은 난폭해지고, 무공이 사악해졌다. 하지만 그런대로 성공한 셈이다.
그러고도 구군 호금연이 아걸에게 당했다.
내공 문제가 아니다. 무공을 전면적으로 다시 살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분뢰절맥은 좋은 타개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조명천검은 수련에 한계가 있다.
사부의 조명십해와 소축십검의 조명십해는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다.
조명십해는 용골을 위한 무공이다.
절대적인 기재, 무공을 보기만 해도 당장 습득해서 사용할 수 있는 천부적인 무인을 위한 공부다.
그렇다고 소축십검의 무공이 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소축십검은 무려 이십여 년 동안 무림을 지배했다. 혈무대에 오르는 자들을 모두 꺾었다.
다만 몇몇 인간 같지 않은 자들에게만 상대가 안 될 뿐이다.
그것도 지금은 거의 따라잡았다. 지금도 서리형개와 만나면 이길 수 있다. 서리가헌의 일탄십검도 부지런히 연구하면 타개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뢰절맥을 수련하면 연구 같은 게 필요 없다.
사부가 용납하지 않아서 수련하지 못할 뿐이다. 사부가 직접 비급을 건네준 이상 기꺼이 수련한다.
이번에도 성공할 것이다.
허도기가 물러가라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진개는 기쁘게 한쪽 팔로 읍을 한 후, 물러섰다.
사부에게 올 때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지금은 한결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