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221화 (221/600)

#221화. 第四十五章 살자(殺者), 사자(死者) (1)

어지간해서는 놀라는 일이 없는 허도기지만 이번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도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정원장군, 통정태상, 선위부사께서 지난 밤에 암살당하셨습니다.”

사구정이 차분하게 말했다.

“방금 암살이라고 했냐?”

“네.”

“암살……?”

허도기는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뿔싸! 이거 보기 좋게 뒤통수를 얻어맞았군. 아냐. 이건 조위 수법이 아냐.”

허도기가 고개를 도리도리 내둘렀다.

“후후! 전보영에 여우 새끼가 있지. 탁호 그놈이군.”

허도기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번 암살 사건은 타격이 매우 크다.

정원장군은 실질적으로 군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실권자다. 현재는 병권을 놓고 도성에 머무는 듯이 보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입김이 세다. 여차하면 도성 인근에 십만 대군을 끌어모을 수 있는 병부 실세다.

통정태상은 종사품이다. 품계도 낮고, 실제로도 권력 같은 것은 쥐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유림 대학사다.

그가 말 한마디만 중얼거려도 당장 움직일 유생이 수만 명이다.

정원장군이 군을 움직이고, 통정태상이 여론을 움직인다면, 선위부사는 돈을 움직인다.

선위부사의 조부는 중원 제일 거상(巨商)이다.

중원에 유통되는 돈의 삼분지 일을 주물럭거린다는 말이 돌 정도로 사업을 크게 한다.

이 세 명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당장 매우 곤란해졌다.

예전, 이부상서 류장촌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죽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타격이 크다.

“너무 방심했어…….”

허도기가 다시 중얼거렸다.

암살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위 장군에게도 막상 암살을 시행할 배짱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세 명은 누가 죽더라도 아주 큰 혼란이 일어난다.

당장 군부가 요동칠 것이다. 만상(漫商) 소강추(蘇崗錐)는 화폐를 움켜쥘 것이고, 유림은 살수를 찾아내야 한다고 상소를 빗발치듯 올릴 것이다.

단 세 명이 죽었을 뿐이지만 온 나라가 들썩거린다.

그래서 조위 장군도 이들은 죽이지 않는다. 죽일 수가 없다. 만약 암살에 털끝만큼이라도 가담한 게 발각된다면, 그 이후는 삶을 장담하지 못한다.

그런데 암살이 일어났다. 상대는 자연사로 위장하지도 않았다. 세 명 모두 똑같이 목을 베어서 같은 문파에서 일으킨 살행이라고 분명히 알렸다.

이 암살에 조위는 가담하지 않았다.

탁호는 가담했을 터이지만, 흔적을 찾지는 못한다.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감히 뒤통수를. 탁호 이놈……!”

허도기는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마치 송충이에게 쏘인 느낌이다. 별것 아닌 놈에게 아작 깨물렸는데 매우 아프다.

“취화원을 멸절시켜.”

허도기가 말했다.

“취화원이 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사구정.”

“네.”

“취화원을 멸절시켜.”

“……네.”

결국, 사구정이 대답했다.

허도기는 취화원을 멸절시키기로 작심했다. 사실, 취화원이 아니면 이토록 대담하게 허도기의 손발을 자를 사람이 없다. 알면서도 죽이지 못하는 인물들이지 않은가.

허도기가 입술을 잘끈 깨물며 말했다.

“적위군을 모두 끌고 가서 일시에 공격해. 몽설, 구곡주, 장로. 이 열한 명은 절대 놓치지 마라. 그것들 목을 내 앞에 펼쳐 놔. 내 눈으로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사구정이 대답했다.

허도기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쁘게 움직여야 할 사람은 조용히 있고, 조용히 구경만 해야 할 사람이 바삐 움직인다.

조경, 왜살. 이쪽에서 다 죽였다.

그러면 조위가 길길이 날뛰면서 움직여야 하는데,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반면에 자신은 끊임없이 소축십검을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은 적위군까지 쓴다.

‘이거 뭐가 잘못되었는데. 음……!’

허도기는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찾아내야 한다.

“가 봐.”

허도기가 사구정에게 손짓을 했다.

어떤 고민을 하더라도 취화원을 멸절시킨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눈엣가시였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쓸어버린다. 아주 깨끗하게.

적위군이 출동한다!

이번 암살을 누가 시도했는지 적어도 고민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다짜고짜 취화원 소행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리고 맹수들, 적위군을 출동시켰다.

사구정이 이끄는 적위군은 매우 강하다.

이들은 고작 서른 명에 불과하지만, 소축십검 서른 명이 뭉쳐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들이라면 취화원을 멸절시킬 수 있다.

더욱더 무서운 것은 적위군 뒤에 사령(死靈), ‘죽음의 영혼’이 따라붙었다는 것이다.

사령의 힘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무엇을 하는 자들인지, 어떤 공부를 수련했는지 일체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조위 장군이 허도기의 무공이 두려워서 그를 내버려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허도기의 인맥이 워낙 두터워서? 허도기가 장악한 군대를 두려워해서?

모든 것을 전부 고려하지 않아도 허도기에게는 진실로 세상을 뒤엎을 만한 힘이 있다. 다만 그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서 어떤 힘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중 일부가 적위군을 보호한다.

분명하게 말하면 적위군이 아니라 사구정을 보호하고 있다.

적위군이 쏟아져 나갔으니 취화원이 매우 급하게 됐다. 자칫하면 모두 멸절당한다.

“가라. 네놈이 빨리 가야 많은 사람이 살아.”

왕우(王佑)는 비둘기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주위를 살펴본 후, 재빨리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때,

“쯧……! 어리석은.”

왕우의 등 뒤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왕우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낯선 사내다. 진공부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다. 하지만 강자다. 척 보기만 해도 단단한 기운이 물씬 풍긴다. 생사를 수십 번도 넘게 건넌 자다.

낯선 사내가 말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간자부터 색출한다는 걸 몰랐나? 이건 기본이잖아? 전보영 간자가 꽤 많이 들어와 있는 줄은 알아. 네가 제일 먼저 걸렸는데, 죽음을 허락하지.”

왕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사내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이런 자를 왜 처음 보는 거지? 대단히 강한 자인데. 진공부에서 본 적이 없는 자, 누구지?

한편으로는 자신이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고민했다.

무공으로는 절대 살 수 없다. 어떻게든 살고자 한다면 입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거짓말을 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어야 한다.

한데 현장을 들켰으니 시치미를 떼는 것은 소용이 없다.

“뉘신지?”

“죽는 놈이 그런 건 알아서 뭐 하게? 기껏 죽음을 허락했는데, 죽지 않겠다는 거야?”

‘아!’

왕우는 비로소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다.

허도기는 군에서 장수 두 명을 제자로 거둬서 소축십검과 비등한 무인으로 키웠다. 그중 한 명이 적위군장 사구정이고, 또 한 명은 일기장군 하원랑이다.

말상 얼굴에 눈빛이 심유하게 가라앉아 있으며, 하관이 검은 수염으로 뒤덮인 자, 일기장군 하원랑이다.

왕우는 단검을 꺼냈다.

“자진할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우는 마지막으로 반항을 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내둘렀다.

하원랑 앞에서는 모든 반항이 무의미하다.

반항하면 그때는 죽이는 게 아니라 생포해서 진공부 뇌옥으로 끌려가 고문을 받는다. 그러다가 결국은 죽는다. 역시 자진이 가장 깨끗하다.

푸욱!

왕우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심장에 검을 쑤셨다.

하원랑은 전서구가 날아가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전서구는 전보영으로 날아간다. 전보영에서 일단 소식을 받고, 그 후에 취화원으로 전달한다. 이미 한 다리 건너간다. 그만큼 시간은 오래 걸린다.

사구정은 벌써 출발했다.

전보영이 어떤 조처했을 때는 이미 취화원이 멸절된 후이다.

차라리 취화원 간자가 전서구를 날렸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전보영 간자가 날린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왕우는 개죽음을 당한 것이다.

“취화원 간자도 전서구를 보냈을 텐데.”

하원랑이 왕우의 시신을 두고 물러섰다.

사실, 이런 일은 하원랑이 하기에는 너무 하찮은 일이다. 겨우 간자를 색출해서 죽이는 일이라니.

하지만 허도기는 이 일을 직접 하원랑에게 지시했다.

이번 기회에 진공부에 스며든 간자들을 모두 뿌리 뽑을 생각이다. 아니면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게 손발을 꽁꽁 묶어 놓거나. 왕우의 죽음을 본 자라면 누구라도 움직이지 못할 테니 말이다.

오석(吳石)은 침통했다.

진공부에 전보영 간자가 많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왕우가 전보영 간자일 줄은 몰랐다.

‘잘 가게.’

오석은 왕우의 시신을 멍석에 둘둘 말아 감았다.

간자인 것이 발각되어서 자진한 자는 그야말로 쓰레기 취급을 당한다. 묘비도 없이 땅이 묻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뒷간에 던져지기도 하고, 화원에 묻혀서 꽃의 거름이 되기도 한다.

왕우를 뒷산으로 옮겨서 산에 묻을 생각이다.

‘왕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되는데…….’

하지만 지금은 어떤 소식도 전할 수 없다. 하원랑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한, 어떤 움직임도 일으키지 못한다. 전서구를 날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다.

‘여기서 소식을 전하면 나도 발각된다, 급한 일도 아니고, 일단 이번 일은 나중에 보고해야겠어.’

오석은 침착하게 멍석을 묶었다.

그때, 하늘 높이 비둘기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가 하원랑이 돌아다니는 줄 모르고 소식을 전한 것 같다.

‘후유! 어떤 놈인지 또 한 놈 죽었네. 전보영 간자만 아니라면 좋겠는데.’

오석은 멍석에 말린 왕우를 들고 일어섰다.

* * *

전보영은 전서를 받았다.

“응?”

탁호는 전서를 읽자마자 미간을 찡그렸다.

취화원은 암살하면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허도기는 다짜고짜 취화원 멸살을 명령했다. 벌써 사구정이 적위군을 이끌고 출발했다는 보고다.

‘허도기가 이성을 잃었나?’

그만큼 세 명의 죽음이 큰 충격을 주었다는 뜻이다.

취화원은 살겁의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허도기는 취화원처럼 눈앞에 어슬렁거리는 것이 있으면 모조리 힘으로 치워 버릴 것이다.

취화원이 그 첫 시작에 걸려들었다.

취화원이 괘씸해서 멸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허도기의 성정이 바뀐 것이다.

적에 대한 공략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사실을 취화원에 알려야지.”

“늦었습니다.”

안다. 탁호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나. 지금 취화원에 소식을 전한다고 해도 이미 싸움이 끝난 다음에나 도착할 것이다.

탁호는 일어섰다.

“그래도 전해야지. 이건 신의 문제야. 취화원주와 난 신의로 맺어진 인연이다. 일개 살수 문파와 전보영주의 만남이 아니야. 나 탁호와 몽설의 만남이었던 거지. 나는 취화원주에게 신의를 지키고 싶다. 목숨을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할 뿐.”

탁호가 일어섰다.

탁호는 호위청사(護衛廳使) 허굉우(許硡宇)의 거처를 찾았다.

“움직일 수는 있나?”

“간신히 움직이긴 합니다.”

“부탁이 있네만.”

“…….”

부탁이라는 말에 허굉우가 고개를 들어 탁호를 쳐다봤다.

“자네는 지금 휴가를 내고 요양 중이니 독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겠지. 우리 전보영과는 상관없는.”

“단곡입니까, 대별산입니까?”

허굉우는 단번에 탁호의 말뜻을 알아챘다. 아걸에게 가느냐, 몽설에게 가느냐고 묻는다.

“지금 취화원이 위기에 처했어.”

탁호가 취화원 사정을 말해 주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죠.”

허굉우가 웃으며 검을 잡았다.

이런 일에 전보영은 움직이지 못한다.

전보영이 불똥이 튀는 것은 감내할 수 있지만, 장군에게까지 화가 미치는 것은 감당하지 못한다.

몽설에게 일검을 맞은 인연으로 허굉우 개인이 취화원을 찾아간 것으로 한다.

물론 허굉우가 간다고 해도 별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적위군 한복판으로 뛰어들 수도 있다. 그러면 허굉우도 죽는다. 혼자 적위군을 상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탁호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 시신이라도 거둬 주려는 것이다.

“아픈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네. 내가 빚 하나 졌어.”

탁호가 허굉우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