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第四十五章 살자(殺者), 사자(死者) (3)
비응이 날아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미 사구정은 ‘완전 잠적’ 사실을 알고 있다.
당연히 완전 잠적이 이루어지기 전에 낚아채려고 전력을 다해서 달려올 것이다.
“함께 움직이려면 시간이 빠듯해요. 준비된 사람부터 먼저 움직이라고 할까요?”
취운이 말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람은 몇이야?”
사곡주 규화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이곡주 소요, 칠곡주 적화도 손가락을 하나씩 펴 보였다.
“한성 은신처가 드러난 거야?”
몽설이 적화를 보면서 말했다.
일곡부터 사곡까지는 살행을 맡고 있다. 살수들 대다수가 여기에 소속되어 있다.
그러니 그들 속에 간자가 섞여 있는 것은 타격이 크지 않다.
칠곡은 다르다. 재화를 담당하고 있어서, 취화원 모든 움직임이 소상히 노출된다.
원래 돈을 좇으면 움직임도 보이는 법이다.
“이제 막 들어온 애라서 깊은 것은 알지 못해요. 한성에서 두세 조각은 떨어져 나갔어요.”
“어디가 발각됐는지 확인했어?”
적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음! 그럼 떨어져 나간 곳은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다는 말이잖아. 겨우 두세 곳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이미 무너진 제방이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면 재조정해.”
모두 이상하다는 눈으로 몽설을 쳐다봤다.
지금 바로 그곳으로 은신해야 한다. 모두 떠날 채비를 갖췄다. 그런데 전면 재조정? 한성에 사들인 모든 전각을 팔아 치우고, 다시 사라는 말인데.
“아! 모두 미안.”
몽설이 팔 장로와 구곡주를 보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완전 잠적 안 해. 싸우려고 하는데.”
구곡주가 어리둥절해서 다시 서로를 쳐다봤다.
반 시진 전만 해도 희생이 너무 커서 싸우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느닷없이 싸워? 싸운다고 하면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하지만 희생이 클 것은 예상해야 한다.
“우리가 싸울 거라고 하면 언니들, 놓아 줄 것 같아서 일부러 완전히 잠적한다고 말했어. 얘들을 어떻게 키우는지 내가 아는데, 죽이기 쉽지 않잖아.”
“그냥 말씀하셨어도…….”
규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몽설 말이 맞다. 만약 잠적하지 않고 싸운다고 했으면 간자도 전할 게 없다. 간자가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 드러났다고 해도 굳이 죽일 필요는 없었다.
‘놓아주었어. 가라고.’
규화는 은영을 떠올렸다.
만약 싸울 생각이었다면 은영을 놓아주었을 것이다. ‘네 뜻대로 잘 살아라’ 말 한마디 건네고 돌아서면 그만이다. 굳이 죽여서 뭐 하겠나.
다른 곡주들도 같은 생각이다.
몽설이 그런 마음을 읽고 미리 제동을 걸었다.
몽설이 항상 이런 식으로 구곡주를 대했다면 원래 성격이 이러려니 하겠지만, 늘 진심만 말하던 원주가 언니들을 속이고 죽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번 간자가 허도기의 간자이기 때문에 놓아줄 수 없었다.
허도기와는 세불양립, 공존할 수 없는 관계이고, 그러다 보니 언젠가는 다시 부딪칠 것이다. 그때 살수를 쓰려고 하면 더 안타깝고 힘들 수 있다.
“이번 일은 이해해 줘. 다시 한번 속여서 미안해. 정식으로 사과할게.”
몽설이 일어나서 머리를 숙였다.
“속인 건 너무했는데, 원주를 아니까. 자, 원주님! 우리 다음 뭐하죠?”
적화가 빠르게 말했다.
몽설이 정색하고 명령을 내렸다.
“팔 장로님, 애들을 데리고 대별산으로 가 주세요. 한성으로 이 많은 사람이 쏟아져 들어가면 모두 혼란스러울 거예요. 대별산에서 대기해 주세요.”
싸움을 피해 달라는 소리다.
“숨는 게 어려울 게 뭐 있겠습니까? 꼭꼭 숨을 수는 있는데.”
“구곡주, 구곡주는 나와 같이 싸울 거야. 준비해.”
“역시 원주님!”
사사가 기분 좋은 듯 검을 ‘탁’쳤다.
“완전 잠적은 마음에 안 들었어. 호호! 그래, 우리 열 명이면 충분히 싸울 수 있어.”
팔곡주 소명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열 명이 사구정과 적위군을 상대하기에는 벅차다. 소명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다만 사기를 북돋으려고 일부러 큰소리를 친 것이다.
몽설이 말했다.
“우리만 싸우는 거 아냐. 원군이 있어.”
“원군?”
“우릴 도와줄 사람도 있나?”
모두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 안쪽 문이 열리면서 아걸이 나타났다.
“어!”
“뭐지? 아걸이 왜 여기서 나와?”
모두 입을 쩍 벌리며 할 말을 잃었다.
취화원 정보에 따르면 아걸은 여전히 단곡에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공을 취했다는 보고까지 들어와 있다. 칼을 수련하는 모습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아걸은 현재 폭풍의 핵이다.
모든 사람이 그를 지켜보고 있다. 그것도 매우 유심히, 세밀히 관찰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단곡에 있던 아걸이 취화원까지 이동해 온 것인가.
“호호! 이게 바로 착시의 함정이야. 늘 보던 것에 익숙해지면 변화가 생겨도 감지하지 못해. 같은 행동을 하면 같은 사람이 되는 거야. 다른 사람이 움직여도 아걸이 여전히 단곡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우리도 속고 허도기도 속고.”
원주의 말대로라면 단곡에서 아걸 행세를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하!”
팔장로가 탄복한 듯 몽설을 쳐다봤다.
아걸이 단곡에서부터 대별산까지 달려오려면 적어도 이틀은 소요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암살이 행해지기 전에 이미 아걸은 출발했어야 한다.
몽설은 암살을 시행하면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예측했다.
아걸은 혼자 오지 않았다. 아걸 뒤에는 은거 무인 중 다섯 명이 뒤따랐다.
월도폭류(月刀瀑流) 손승, 쌍겸 노호(盧濠), 승표의 달인 황열, 지당검 고사, 능허자 나통.
이렇게 되면 열여섯 명 대 서른한 명이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 더욱이 이쪽에는 절대 강자인 아걸이 있다. 저들 중에 아걸을 맞아서 싸울 자가 있어야 하는데, 사구정은 한 수 아래다.
팔 장로가 안심한 듯 즉시 일어섰다.
“저는 애들을 데리고 꼭꼭 숨어 있겠습니다.”
“그래요.”
몽설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사구정이 폭풍처럼 말을 몰아서 대별산을 들이쳤다.
취화원 살수들이 무공을 수련하는 장소는 이미 비밀이 아니다. 취화원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눈길을 준 사람은 모두 안다.
사구정은 정확한 위치까지 안다.
다각! 다각! 다각!
말을 타고 연무장인 듯싶은 넓은 광장으로 들어섰다.
취화원은 텅 비었다.
“벌써 도주한 거 같은데요.”
“이놈의 세작들!”
사구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보영으로 가는 세작은 분명히 죽였다. 거기까지는 안다. 일기장군 하원랑이 직접 움직였으니 이번에 움직인 간자들은 모조리 소탕당했을 것이다.
그래도 취화원이 이토록 빨리 움직였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고를 받았다는 뜻이다.
취화원 세작이 숨어 있었다.
따각! 따각! 따각! 따각!
사구정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그때다. 숲에서 여인 열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몽설과 구곡주다.
“후…….”
사구정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드시 잡아야 할 자, 열한 명 중 열 명이 이곳에 있다. 이것들만 잡으면 된다. 다른 자잘한 살수들은 도주하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는다.
“좋아!”
사구정이 피식 웃으면서 말에서 내렸다.
그는 제일 먼저 몽설부터 찾았다. 그리고 몽설을 향해 기광을 번쩍이며 걸어왔다.
스릉!
걷는 도중에 검이 뽑혔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걷는 걸음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대여섯 걸음쯤 걸었을 때는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다다닥! 타타탁!
몽설 앞 오장 앞에서는 신법을 펼쳤다.
성검문 십이보법 중 선풍추자(旋風錐子)다. 검신일체가 되어서 몸이 회오리처럼 휘돈다. 검도 따라서 휘돈다. 보법이면서 공격 초식이다.
쒜엥에엑!
사구정이 맹렬히 쏘아 왔다.
휘리리릭! 휘리리리릭!
몽설도 검무를 추었다.
니환일검은 거센 회오리바람을 뚫고 들어가서 사구정의 검을 정확히 찾아냈다.
타앙! 탕탕! 탕!
몽설의 검과 사구정의 검이 거세게 부딪쳤다. 숨 한 모금 들이쉴 동안에 십여 차례나 격돌했다.
사구정의 검은 무척 빠르다. 모든 변식을 일으키지 않고 정직하게 쳐 온다. 하지만 무척 빠르다. 너무 빨라서 오히려 변식을 일으키는 것이 장애가 된다.
표범이 사슴을 잡을 때는 곧장 달려들기만 하면 된다. 다른 행동은 필요치 않다. 빠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사슴이 이리저리 피하려고 하지만 어림도 없다.
쒜에에엑! 쒜엑!
사구정이 내치는 검에서는 송곳으로 허공을 내리찍는 소리가 울렸다.
반면에 몽설은 느린 듯하면 느리지 않고, 빠른 듯하면서 빠르지 않은, 검속을 분간할 수 없는 검무를 추었다.
휘릭! 휘리리릭! 휘릭!
싸우는 게 아니다. 검무를 추고 있다.
스읏! 느리게 움직이다가, 팟! 하고 갑자기 검이 치솟는다.
몽설의 검은 거리 감각, 시간 감각을 판단하지 못하게 만든다. 예측할 수 없다.
깡깡깡! 까앙!
몽설과 사구정이 연달아 십여 초를 교환했다.
일면 사구정이 우세한 것 같다. 압도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몽설은 방어에만 치중한다. 하지만 몽설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사구정의 검을 정확하게 막아 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반격까지 시도한다.
몽설의 얼굴은 혈검을 사용한 탓에 붉게 상기되었다. 잘 닦은 홍옥처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붉은 색이다.
혈검은 숙련도에 따라서 낯빛이 붉은빛, 자색, 검은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붉은색으로 돌아온다.
몽설의 낯빛은 거친 붉은 색이 아니다. 혈액순환이 고스란히 엿보이는 맑은 빛이다. 혈검이 이미 구성 이상의 성취를 이뤘다고 봐야 한다.
몽설과 사구정은 팽팽하게 접전을 유지한다.
“그럼 우리도 싸워 볼까?”
적위군들이 유들유들 웃으며 구곡주를 에워쌌다.
그때다. 맹수가 다가오는 듯 아주 기분 나쁜 느낌이 적위군의 등 뒤에서 일어났다.
저벅! 저벅!
땅을 꾹꾹 내리밟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적위군이 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아걸과 다섯 명의 은거 무인들이다.
“아걸?”
“저놈이 어떻게……!”
적위군이 눈살을 찡그렸다.
몽설과 한참 격전을 벌이던 사구정도 ‘아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쒜에에엑!
그는 거칠게 검을 써서 몽설을 뒤로 물렸다. 몽설 역시 사구정의 뜻을 읽고 물러나 주었다.
쉬이이익!
사구정은 물러서자마자 즉시 아걸부터 쳐다보았다.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사구정의 눈에도 놀란 빛이 가득했다.
허도기는 전보영을 주시하는 정도로 아걸을 지켜보고 있다. 만약, 아걸이 어떤 움직임을 보였다거나 취화원으로 달려갔다면 당장 소식을 알려 왔을 것이다.
사부는 어떤 연락도 취해오지 않았다.
이놈은 사부까지 속였다!
“후후후! 잘 됐군. 그러잖아도 네놈에게 칼 맞은 빚이 있는데, 오늘 풀겠어.”
휘릭!
사구정이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쯧!”
아걸이 혀를 찼다. 그리고 말했다.
“그때 내 칼을 맞은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운이 나빠서? 사람은 고수가 될수록 주제 파악을 잘해야 오래 사는데. 너 보아하니 오래 살긴 틀렸다.”
“그래? 웃기는 놈. 한 번 칼질이 통했다고 또 통할 것 같은가 보지? 후후!”
사구정이 검을 겨눴다.
사구정은 감히 태만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걸만큼은 경계 대상이다.
사구정은 바싹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