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第四十七章 아방(我方: 내 편) (1)
쉬잇! 퍼억!
일격 즉사다. 칼이 목뼈를 가르면서 지나갔다. 천신이 와도 살릴 수 없다.
아걸은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토족과 은거 무인들의 싸움이 아걸과 토족 전사들의 싸움에 재현되었다.
토족은 은거 무인을 본다. 은거 무인은 토족 전사를 보지 못한다.
아걸은 토족 전사를 본다. 토족 전사는 아걸을 보지 못한다.
공격에서는 아걸이 토족을 한 수 앞선다. 토족은 모습을 드러낸 후, 난폭함으로 싸워야 한다. 하지만 아걸은 여전히 몸을 숨긴 채 살며시 칼을 쳐 낸다.
스읏! 퍼억!
또 한 명이 쓰러졌다.
바위로 위장해서 잔뜩 웅크리고 있던 토족 전사가 머리에 반철도를 얻어맞고는 힘없이 푹 꼬꾸라졌다.
주르륵!
잘린 머리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저놈 뭐야?”
족장이 이강에게 물었다.
“아걸이라는 놈입니다. 조 장군 휘하 무인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입니다.”
“저놈들 다 무인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무인인지 군인인지도 모르는 거야? 이건 허도기 수법이 아닌데?”
“…….”
이강은 침묵했다.
자신은 어차피 이 싸움이 끝나기 전에 죽는다. 아니면 승리를 거머쥔 후, 마지막으로 죽일지도 모른다.
지금부터는 가식도 필요 없다.
“저기 조위가 있긴 해?”
“있겠니?”
“……?”
토족 족장이 고개를 퍼뜩 들어서 이강을 쳐다봤다.
“옛날, 너희가 패한 것은 무공이 약하다거나 전력이 뒤처져서가 아냐. 이게 없어서지.”
이강이 자신의 머리를 톡톡 쳤다.
“너흰 이미 고명산을 벗어났어. 어쩌지? 산주, 산괴, 그리고 너희. 모두 처형당하게 생겼네? 하하하!”
싸움이 붙었다.
이제 저들은 둘 중 한쪽이 몰살되기 전에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자신의 역할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토족이 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심히 걱정했는데, 이들이 순순히 따라와 주는 바람에 무척 수월히 끝났다.
“……너, 전보영이군.”
“하하하!”
“보아하니 허도기도 함정에 걸린 것 같고. 우리가 허도기 목을 베는 미끼인가?”
“이 정도로? 자신을 너무 크게 봤네. 토족은 그 정도도 못 돼. 단지 팔다리 하나 부러트리는 정도? 하하하! 솔직히 말하면 너희, 허도기가 단신으로 와도 상대하지 못하잖아.”
이강은 기분 좋게 웃었다.
족장은 숲을 슬쩍 봤다.
토족 전사는 죽은 후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처럼 위장포를 사용할 경우, 안쪽에 인광(燐光)을 바른다. 위장포가 온전히 거둬지지 않고 뒤집히면 안쪽이 드러나고, 인광이 달빛을 받으면 번쩍 빛난다.
달빛을 받아서 인광이 하얀빛을 뿌린다.
빛을 뿌리는 위장포가 벌써 이십여 개가 넘는다. 소리 없는 싸움에서 이십여 명이 절명했다. 그동안 토족은 상대를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
“후후……! 재미있군.”
족장은 양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힘껏 소리를 냈다.
삐이이익!
숲에 있던 전사들이 일제히 후퇴했다.
하지만 은거 무인을 둘러싼 전사들은 후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위장포를 뒤집어쓴 채 공터를 노려봤다.
먼저 움직이는 쪽이 당한다.
은거 무인들이 숲으로 들어오면 그들이 죽을 것이다. 숲에 있는 전사들이 도주한다거나 공격하겠다고 일어서면 당장 은거 무인들의 밥이 된다.
한 명이 목숨을 버리더라도 남은 자가 공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삼대일 정도로 인원이 많아야 한다. 한 명이 죽고, 한 명은 병기를 붙잡고, 다른 자가 친다.
지금은 삼대 일에서 약간 못 된다.
다른 전사들이 합류해야 하는데, 아걸에게 길이 막혀서 뚫고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양쪽 모두 교착 상태다.
상대방 싸움으로 끌려들어 가면 죽는다. 상대를 자신의 싸움판으로 끌어내야 한다.
토족 전사 삼십여 명과 은거 무인들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비록 족장의 명이 떨어졌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한편, 아걸은 토족 전사들이 도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쉬이이익! 퍼억!
“아아악!”
칼이 휘둘러지고 비명이 터졌다.
알고 당하는 죽음은 소리를 삼킬 수 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불쑥 다가오는 칼날에는 비명도 본능적으로 작용한다. 참는다고 참아지지 않는다.
‘어차피 모두 끝내야 할 사람들!’
쒸이잇! 퍼억!
아걸은 토족을 쫓아가면서 반철도를 휘둘렀다.
도주하는 자와 쫓는 자가 있다. 쫓는 자가 칼을 휘두르고 도주하는 자가 죽는다. 어처구니없게도 토족은 아걸의 움직임을 전혀 잡아내지 못했다.
어디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자신하고는 상관없는 쪽이다. 그래서 내처 달린다. 한데 어느새 눈앞에 누군가가 나타나 있다. 반철도가 번뜩이고 숨이 끊어진다.
아걸은 토족 전사들의 신법을 환히 꿰뚫어 봤다.
또 칼도 강하다. 두 명, 세 명이 모여 있어도 일시에 갈라 버린다. 병기를 쳐 오면 칼까지 잘라 낸다. 그런데도 칼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토족 전사들이 치명적인 일격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도주해도 죽고, 싸워도 죽는다. 어떤 식으로 상대해도 무자비하게 뚫고 들어온다.
뭐 이렇게 강한 놈이 있나.
숲에 들어온 토족 무인들은 지옥을 경험했다.
“아아악!”
그들의 비명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이제 솔직히 말해 보지? 저놈 뭐 하는 놈이야?”
족장이 숲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일홀도.”
이강이 답했다. 숨길 이유가 없다.
“일홀도? 그게 뭔데?”
“중원에 일홀도를 추구하는 무인이 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최강의 칼. 평생 최강의 칼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지. 싸우다가 죽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아.”
“풋!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 그렇게 강한 칼이면 허도기와도 붙어 봐야지. 허도기에게는 칼을 들 용기도 없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건…….”
“두 번 싸워 본 것으로 알고 있다.”
이강이 족장의 말을 끊었다.
족장이 비로소 눈길을 돌려 이강을 쳐다봤다.
“두 번?”
“두 번.”
족장은 고개를 돌려 숲을 쳐다봤다.
희한하게도 족장은 승패를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이 싸웠으면 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한데, 두 명 다 살아 있다. 그럼 승패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할 텐데.
“후후후……!”
족장은 물음 대신 웃음을 택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딱 한 번 기가 질린 인간이 있는데 그 인간이 허도기야.”
족장이 가죽옷 상의를 와락 들쳐 보였다.
배꼽 부분에서 등까지 일직선으로 쭉 그어진 상처가 보였다. 상당히 오래된 상처인데도 검흔이 상당히 뚜렷했다.
족장이 상의를 내리며 말했다.
“그 후로 난 그놈에게 검을 들지 못해. 지금도 그래. 마음으로는 자신 있다 싶으면서도 막상 싸우라고 하면 기가 눌려. 그런데 두 번이나 싸웠다? 아걸이 어떤 놈인지 대충 짐작할 만해. 여기 정말로 우리가 죽을 자리군. 하하하!”
족장이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넣어 예전처럼 휘파람을 크게 불었다.
삐익! 삐익! 삐이익!
이번엔 세 마디가 울렸다.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토족 전사들의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졌다. 뒤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 나온다. 옆에서 달리던 동료가 칼에 맞아 죽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스슷! 스스스스슷!
은거 무인들과 대치하고 있던 토족 전사들을 후퇴에 합류했다. 은거 무인이나 아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뒤로 빠지는 데만 집중했다.
은거 무인들은 그들이 물러설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뒤도 안 돌아보고 내뺄 줄은 전혀 몰랐다. 뒤를 쫓자니 마치 함정 같은 생각이 들어서 쫓기도 두렵다.
그만큼 저들의 후퇴는 이상하다.
이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토족 전사들의 전투력이 예전만 못하다.
조위 장군이 남만을 공격했을 때, 장군은 그곳에서 지옥을 만났다. 이들 토족은 지옥을 만들어 내는 지옥 혈귀들이다. 정예 군인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졌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매우 싱겁다.
아걸의 절대적인 무공이 그렇게 만들었다.
옛날에도 그랬다. 허도기의 절대적인 무공이 정규군 삼만 명보다도 강했다.
토족은 항복을 모르는 듯 악착같이 싸웠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생각이었던 듯싶다. 만약 허도기가 일대일 승부를 가리지 않았다면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이들 인원이 이백 명이다. 그러면 조위 장군은 적어도 열 배에 해당하는 이천 명은 잃었다.
족장은 허도기에게 패한 후 즉시 항복했다.
허도기의 검에서 비정한 살검을 봤다.
이자에게 걸리면 갓난아기까지 베어질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위 장군은 전사만 죽인다. 그러니 끝까지 싸운다.
허도기는 뿌리를 완전히 뽑아 버린다. 남녀노소 모조리 죽일 것이다. 그래서 항복한다.
지금 족장은 그때와 똑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오늘 토족은 모두 죽는다. 아걸을 죽이지 못한다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스릉!
족장이 검을 뽑았다.
“알고 있지?”
족장이 이강을 보며 말했다.
“싸움을 끝까지 보고 싶은데.”
족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첫째, 넌 우릴 함정에 빠트린 놈이 아닌가. 그런 놈에게 재미있는 구경까지 시켜 줄 수는 없고. 둘째, 난 지금 마음의 여유가 없어. 신경 쓰이는 부분은 모두 잘라 내야 해. 참고로 내가 더 들을 말 같은 건 없나?”
이강은 눈을 감았다.
쉐에에엑! 푸욱!
검이 날아와 심장에 틀어박혔다.
“끄윽!”
이강은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검이 살을 찢는 순간, 극통이 전해져 왔다. 마치 벼락을 직통으로 맞은 느낌이다.
푹!
이강이 쓰러졌다.
토족 전사가 후퇴했다.
그들은 숨이 턱까지 차서 심하게 헐떡거렸다.
일차로 이십 명을 보냈다. 그들은 경계 무인을 죽이는 것이 임무였다. 그 뒤에는 본격적인 싸움을 벌이는 것이라서 호위 열 명을 남기고 전원을 투입했다.
그런데 살아나온 사람은 겨우 일흔 명에 불과하다.
백삼십여 명이 숲에서 목숨을 잃었다.
은거 무인들에게 죽은 자는 없다. 백삼십 명 모두 단 한 사람, 아걸에게 목숨을 잃었다.
“일홀도.”
족장은 이강이 한 말을 되뇌었다.
남만인도 중원 무림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일홀도에 대한 말은 듣지 못했다.
일홀도를 추구하는 사람은 권력을 쥔 적이 없다. 한 번이라도 쥐어 본 사람이라면, 문파를 건립하고 세를 불렸던 사람이라면 들어 보지 못했을 리 없다.
“죄송합니다.”
숲에서 빠져나온 전사들이 울분에 차서 말했다.
“뭐가?”
족장이 뜻밖의 말을 했다.
“너희 상대가 안 되어서 당한 건데, 뭐가 죄송해. 전략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너희가 잘못 싸운 것도 아냐. 아걸이라는 자가 터무니없이 강한 걸 어떻게 하나. 후후!”
“저희를 다시 보내 주시면…….”
“안 보내도 죽어. 아걸이란 놈이 올 테니까. 병기나 다시 닦아 둬. 그리고 병기를 쓸 기회가 오면 가장 자신 있는 절초를 펼쳐라. 죽기 직전에 딱 한 번만 무공을 사용한다면 어떤 공격을 할지 미리 생각해 두라고.”
족장이 검에 묻은 피를 이강의 몸에 닦았다.
츠츳! 츠츠츳!
후퇴했던 토족 전사들이 말발굽 모양으로 빙 둘러서서 아걸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