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第四十七章 아방(我方: 내 편) (3)
아걸은 살아남은 자들을 둘러봤다.
족장과 싸우다 보니 토족에 대해서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사납지만 악하지는 않다. 그러니 굳이 몰살시킬 필요가 있을까 싶다. 조위 장군은 풀어주면 나라에 해가 된다고 했지만, 그럴 사람들 같지는 않다.
‘죽일 필요가 없어.’
아걸은 이들을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때 숲에서 나온 은거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머리끝까지 치솟은 노기가 한눈에 보였다.
“이놈은 새끼들! 여기가 어디라고 설치는 거야!”
“감히 여기서 사람을 죽여!”
은거 무인들은 죽은 동료를 봤다. 처절하게 짓이겨진 시신을 거뒀다.
물론 아걸이 죽인 시신도 봤다. 하지만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다. 이놈들을 모두 죽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죽은 동료를 무슨 낯으로 볼 것인가.
‘아!’
아걸은 탄식했다.
은거 무인이나 토족이나 서로 아무런 은원이 없다. 누군가가 부채질해서 서로 싸우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억겁보다 더 깊은 원한이 생겨 버렸다.
이제 토족을 살려 보낼 수 있는 길은 끊겼다.
“이 싸움은 제가 맡겠습니다.”
아걸이 무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럴 순 없지. 우리 형제가 죽었잖아. 같이 싸워야지.”
“형님들은 토족 싸움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 싸움에 휘말리면 희생이 큽니다.”
“희생은 각오했네. 먼저 간 사람들을 보니 토족이 어떤 자들인지 알겠는데, 그래도 싸워야겠어.”
아걸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은거 무인 중에는 처절한 싸움을 경험한 사람이 있다. 반면에 이런 싸움을 해 보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이 계속 자신을 따르겠다면 악귀들의 싸움도 경험해야 한다.
“그러시죠.”
아걸이 쓴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탕! 탕! 탕!
진품전(陳品全)은 검 세 개를 튕겨 냈다. 그리고 재빨리 검초를 펼쳐서 반격했다.
목표가 있다. 방금 튕겨 낸 검 세 개 중 하나가 아직도 허공에 머물러 있다. 그자는 가장 가까이에 있고, 검을 회수하지 못한 탓에 상반신이 환히 노출되어 있다.
당연히 공격 대상이다.
놈은 미련하게도 아직 자신이 위험한 줄을 모른다. 진품전의 검이 다른 자를 향하고 있어서다.
쒜에에엑!
목표가 아닌 자를 향해서 허초를 펼쳤다. 그리고 지나가는 길에 진짜 목표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당황해하는 표정이 뚜렷이 보였다.
그자는 검을 피하려고 급히 엎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진품전의 두 다리를 와락 껴안았다.
진품전은 신형을 튕겨서 뒤로 물러나며 여전히 사내의 목덜미를 노리고 검초를 뿌렸다.
검은 목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등을 찍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이 쑥 들어갔다.
‘한 놈 잡았고!’
그런데 상대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기운차게 벌떡 일어났다.
검이 쑥 들어가는 듯하다. 하지만 곧 다시 튕겨 나왔다. 이들이 입고 있는 가죽옷은 평범하지 않다. 아주 강력한 갑옷이다. 진품전은 그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진품전은 깜짝 놀라서 물러섰다. 하지만 검은 여전히 앞가슴을 노렸다.
“머리를 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순간 앞에 있던 토족 전사가 찌르는 검을 무시하고 와락 달려들면서 검을 연달아 세 번이나 후려쳤다.
퍼억! 땅땅! 땅 땅 땅!
진품전은 계속해서 검을 막았다.
이번에도 앞가슴을 찔렀지만, 여전히 검이 튕겨 나왔다. 가죽옷을 뚫지 못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죽옷이 가리지 못한 부위를 공격하면 된다.
쉬이익!
검을 수평으로 내질러서 상대방의 머리를 찍었다.
상대방은 머리를 돌려서 검을 피했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더니 와락 진품전의 허리를 감아왔다.
‘이놈들 왜 잡지 못해서 안달이지? 검초를 펼치는 것보다 잡는 것에 우선을 두는 것 같잖아?’
다행히 급히 물러설 수 있어서 허리가 잡히는 건 피했다. 하지만 토족 전사에게 바짓가랑이 한쪽을 잡히고 말았다.
토족 전사가 사력을 다해서 바짓가랑이를 낚아채더니 두 팔로 꼭 껴안았다. 깍지까지 낀 손으로 두 다리를 잡아서 보물이라도 되는 듯 품에 꽉 끌어안았다.
진품전은 검을 거꾸로 돌려서 토족 전사의 머리를 찍었다.
퍼억!
토족 전사는 즉시 절명했다.
희한한 놈이다. 다리 하나 붙잡자고 목숨을 내놓나? 그 순간,
싹! 싸아아앗! 싹!
사방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진품전은 급히 신형을 움직여서 상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발에 묵직한 게 걸려 있다. 한쪽 발이 자유를 잃었다.
그는 발을 힘차게 걷어차서 매달린 자를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죽은 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토족 전사는 죽으면서 암반공(巖盤功)을 펼친다.
몸을 천금처럼 무겁게 한다. 죽는 순간, 전신의 모든 기력을 모아서 땅에 내리꽂는다. 그러면 죽은 후에도 일시적으로 내리누르는 힘이 유지된다.
중원 무인들이 종종 사용하는 천근추(千斤錘)와 흡사한 수법이다.
진품전은 급히 허리를 비틀면서 날아오는 검을 쳐 냈다. 하지만 그 순간 옆구리가 비었다. 두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신형을 비트는 바람에 허점이 크게 생겼다.
토족 전사들이 이런 허점을 놓칠 리 없다.
쒜에에엑! 퍽퍽퍽퍽퍽!
“아아악!”
진품전은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비명을 내질렀다. 동료들에게 죽음을 알려야 한다. 어떤 식으로 죽는지 알려서 다른 사람은 이런 식으로 죽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또 다른 칼이 가슴을 파고든다.
퍼어억!
일단 검이 틀어박히기 시작하자 무슨 검이 이렇게 많았는지 사방에서 사정없이 칼이 날아들었다.
진품전은 잘 다져진 어육이 되어서 쓰러졌다.
처음에는 비명을 질렀지만, 나중에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머리, 어깨, 가슴, 옆구리…… 사방에서 피가 솟구쳤다.
아걸이 싸움을 자기한테 맡기라고 했을 때, 은거 무인들의 수고를 덜어 주려는 생각인 줄 알았다.
그럴 수는 없다. 아걸 혼자서 칠십 명과 싸우게 할 수는 없다.
손 하나라도 거들어야 한다. 혼자 싸우는 것보다는 같이 싸우는 게 백번 낫지 않겠나.
또 죽은 동료를 봤다. 너무 처참하게 죽었다.
예전에는 모르던 사람들이었지만 한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서로 친한 친구, 동생, 형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들이 시신이 되어서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자 눈이 뒤집혔다. 어떻게 격분하지 않겠나.
그래서 나섰는데…… 토족 전사들이 너무 난폭하다.
은거 무인들은 ‘난폭하다’라는 말이 어떤 말인지 이 싸움을 통해서 깨달았다.
그 말은 함부로 쓸 말이 아니다.
은거 무인들이 개입하자, 토족 전사들은 싸움 방향을 바꿨다.
아걸은 매우 강력하다. 아무리 덤벼도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 오를 수 없는 태산처럼 보인다. 반면에 은거 무인들은 자신들 방식으로 죽일 수가 있다.
아걸의 반철도는 그들의 가죽옷을 단번에 찢어 버리는데, 은거 무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전사들이 무인들에게 달려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아주 처절하게 한 사람의 목숨을 던지고 다른 사람들이 그 목숨을 빌미로 칼을 후려친다.
은거 무인 중에는 이런 싸움을 경험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처음 경험했다.
그냥 합공만 펼쳐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목숨을 던지는 이유가 뭘까? 확실한 죽음을 원한다. 한 명을 죽이면서 두 사람이 다치는 것보다 한 명이 확실하게 죽으면서 상대도 죽이는 방식을 취한다.
손승은 이런 싸움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다. 아걸은 피해가 많아질 것을 예상하고 싸움을 말렸다.
그런데 나중에는 왜 허락했을까? 이런 싸움도 경험해 보라는 것이다.
아걸의 싸움은 이런 싸움이다. 자신 스스로 ‘개싸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 일단 경험해 보고 계속 남아 있겠으면 남아 있고 옛 터전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라는 거다.
아걸은 선택권을 주고 있다.
아걸은 그전에도 은거 무인들에게 그만 돌아가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손승은 월도를 들었다.
눈앞에 토족 전사가 있다. 일단 몸이 잡히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허리든, 발목이든, 옷 한 자락이라도 잡히면 죽는다. 차라리 죽이지 못하더라도, 도망 다니는 한이 있어도 잡히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
손승은 팔방풍우(八方風雨)를 펼쳐서 월도를 어지럽게 사방으로 쏘아 냈다. 일단 적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고 월도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공격한다.
쒜에에엑! 까앙! 깡!
토족 전사가 월도를 막아 내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들은 목숨만 가벼이 여기는 게 아니다. 무공도 강하다.
손승과 일대일 대결을 벌인다고 해도 통할 정도로 강하다.
이들은 이렇게 강자들이었다. 아걸이 너무 강해서 강자처럼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쒜에에엑!
검이 날아든다.
아걸은 상대방의 검에서 ‘느곤 루아 바오 푸 바우 트로이’를 봤다.
족장은 아걸 앞에서 적양검법을 펼쳤다. ‘쵸 디엔’에게 무공을 전수할 생각이었겠지만, 아걸에게 전수한 격이 되어 버렸다. 아걸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던 탓이다.
아걸은 단숨에 적양검법의 오의를 꿰뚫어 봤다.
일견즉성(一見即醒)!
일홀문 무인들은 모두 보기만 하면 깨달을 수 있는 자질을 지닌 절대 칼이다. 다른 부분에서는 잘 안 되는데 무공에서만큼은 그게 잘 된다.
척 보기만 해도 초식의 흐름이 보인다.
세세한 변화까지 감지하지는 못하지만 큰 줄기는 단번에 찾아내고, 펼치기까지 한다.
쒜에에엑! 쒝! 쒝!
아걸은 둘째 사형의 삼도일살을 펼쳤다. 칼을 세 번 썼다.
머리, 목, 등을 맞은 토족 전사가 힘없이 쓰러졌다.
아걸은 상대방의 등을 밟고 뛰어오르면서 곧바로 다른 자를 향해 쏘아 갔다.
쒜에에엑!
이번에 펼친 칼은 성검문의 절기인 조명천검 직사광류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칼이 전사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반철도에 가슴이 뚫린 자는 뒤뚱뒤뚱 밀려나다가 풀썩 쓰러졌다. 숨은 벌써 끊어졌지만, 칼에 깃든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기까지 했다. 죽은 시신이 걸었다.
아걸은 다른 사람의 무공을 쓰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족장이 적양검법을 펼칠 때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서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무공을 펼쳐 봤다.
세상의 모든 무공은 같다. 마공과 사공, 정공도 같다. 딱 하나, 같은 부분이 있다.
칼을 사용하기 위해서 움직인다!
이 부분이다. 어떤 움직임으로 칼을 표현하느냐 하는 점은 차후 문제다. 일단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형식은 천차만별이다.
아걸은 현재 진기를 싣지 않고 칼을 쓴다.
몸의 민첩함, 신경의 예민함 만으로 칼을 휘두른다. 물론 칼이 잘 휘둘러지도록 노력한다. 가끔은 칼에 진기를 싣기도 한다. 칼을 잘 쓰도록 노력하는 거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처음 족장과 싸울 때는 전력을 다 쏟아 냈다.
적양검법 일 초, 이 초에 맞서서 삼십육 문주의 일홀도를 펼쳐야 했기 때문에 진기를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토족 전사들을 상대할 때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
은거 무인들과 비무를 할 때처럼 반철도에게 자유를 주면 된다.
반철도가 마음껏 움직일 수 있게끔 길만 열어 준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두르려면 칼만 던져서는 안 된다. 칼이 자유롭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길을 내줘야 한다.
공간만 내주면 칼은 저절로 빠져나간다.
공간이 없으면 몸이 억지로 비틀린다. 칼이 나가도록 몸을 쥐어짜 낸다. 하지만 이렇게 칼을 쓰면 아무리 진기를 쏟아부어도 스르륵 자연스럽게 빠져나간 칼보다 위력이 떨어진다.
충분히 공간을 내준다. 칼이 나가면 중심을 잡아 준다. 칼이 몸보다 앞서서 나아갈 때쯤에는 단단히 뒤를 받쳐 준다. 중심을 잡아서 구심력을 일으킨다.
이러면 칼이 마음대로 움직인다.
쒜에에엑! 퍼억! 퍽!
아걸은 쉬지 않고 움직였지만 지치지 않았다.
토족 전사들이 굼벵이처럼 느리다. 그들의 움직임, 공격이 환히 보인다.
반면에 자신은 저들보다 두 배는 빠르게 칼을 쓸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병기를 부딪칠 필요가 없다. 전력을 다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펼칠 수 있는 속도만 유지하면 된다.
빠름은 강함으로 이어진다.
느리게 치는 매는 아프지 않다. 힘을 훨씬 덜 주었어도 빠르게 치는 매는 아프다.
속도가 강한 힘을 저절로 끌어 올린다.
마음도 저절로 차분해진다.
강해지기 위해서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는 것은 헛수고다. 물론 그런 수고가 있어야 강해지는 것은 맞다. 하지만 절정에 이르면 차분한 마음은 저절로 따라온다.
쒜에엑! 퍼억!
아걸은 토족 전사를 일격에 죽일 수 있도록,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해서 칼을 썼다.
이왕 죽여야 한다면 고통 없이 보내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