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第四十七章 아방(我方: 내 편) (4)
싸움이 끝났다.
토족 전사는 딱 한 명만 살아서 돌아갔다. ‘쵸 디엔’을 제외하고 단곡에 남은 토족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 승패가 확연히 갈렸는데도 달려들었다.
토족은 매우 사납게 싸웠다.
칼을 맞았어도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달려들었다. 두 팔이 잘려 나가면 이빨로 물어뜯겠다고 달려왔다. 그러니 철저하게 죽여야만 했다.
지독하던 싸움도 끝났다.
토족은 가늘게라도 숨이 붙어 있는 자조차 없었다. 완벽하게 몰살당했다.
사방이 피투성이다.
죽은 자의 숫자는 숲에 훨씬 많다. 숲 안쪽에는 백삼십 명이 죽어 있고, 바깥에는 일흔 명이 죽었다. 그런데도 바깥쪽 시신들이 더 처참하다.
은거 무인도 많이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일곱 명뿐이다.
전초에서 세 명, 이 초에서 네 명이 죽었다. 이 싸움에 가담한 후 여섯 명이 또 죽었다.
털썩! 털썩!
살아남은 은거 무인들이 피로 물든 땅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말없이 하늘을 쳐다봤다.
동녘에 해가 밝아 온다. 오늘 뜨는 해가 비출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켜켜이 쌓여 있는 시신들이 아름다울 리 없다.
하지만 아걸은 잔인한 가운데서도 아름다움을 봤다. 변태라고 해도 좋고 가학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아름답다. 토족은 아름다운 전사들이다.
최소한 싸울 줄 아는 사람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이들이 어떻게 해서 허도기에게 이용당했는지 모르겠지만, 토족은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죽음은 전쟁터가 되어야 마땅했다.
토족 전사들은 자신을 죽인 자에 대해서 원한은 품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죽인 자가 적어도 이 시대 초강자 중 한 명이니 기꺼이 죽음을 달게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후우!”
아걸은 비로소 큰 숨을 내쉬었다.
* * *
“아! 이거!”
전보영 전탐조(戰探組) 다섯 명은 수없이 널브러져 있는 시신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단곡을 주시했다.
사전에 이미 전해 들었다. 악귀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단곡에 이를 것인지 예상 경로도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들이 단곡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싸움이 다 끝난 후에야 비로소 알았다. 그것도 시신을 파먹겠다고 까마귀 떼가 우르르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서야 알았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사방이 온통 죽은 사람뿐이다.
아걸과 은거 무인들이 죽었다면 이들 시신 속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이걸 다 뒤져야 해?”
“싸움을 못 봤으니 다 뒤져야지. 어서 뒤져. 사람들 모이기 전에. 빨리 끝내고 물러서야 해.”
전보영 전탐조는 수색, 탐색에 일가견이 있다.
그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자신들을 눈뜬장님으로 만들 수 있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확실히 무림은 넓다.
스스슷! 스스스슷!
그들은 빠르게 전장을 누볐다.
토족 전사들은 가죽옷을 입고 있고, 머리도 산발한 상태라서 중원인과 쉽게 구분되었다.
“으음!”
시신을 살피다 보니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죽은 사람들 모습만 보고도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칼이 긋고 지나간 자국, 쓰러진 모습을 보면 누가 어떤 식으로 칼을 휘둘렀는지도 알겠다.
“싸움을 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네.”
“그러게. 이 싸움은 꼭 봤어야 할 것 같은데.”
전탐조가 부지런히 시신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아걸이나 은거 무인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죽은 자는 모두 토족 전사들 뿐이다.
“아걸은 없는데?”
“숲으로 들어가 봐야겠어.”
“잠깐. 들어가기 전에 보고서부터 작성하고.”
전탐조 중 한 명이 재빨리 등에 메고 있던 봇짐 속에서 지필묵을 꺼내 들었다.
“여기서? 나중에 적지?”
“뭘 적어? 이걸 적어? 뭐라고? 이 광경을 설명할 말이 있어?”
“그럼 뭘……?”
지필묵은 꺼낸 자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결과만 보고해야 한다. 한데 이런 광경은 백 마디 말로도 설명이 안 된다. 그럴 바에는 아예 그림으로 보고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다 그렸어?”
종이에 시신들 그림이 꽉 차자 숲을 쳐다보던 자가 물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한 장에 다 담아. 아무리 못해도 열 장은 그려야 해. 좀 참아. 차분히 그리게. 죽은 시신이 어디로 도망가는 거 아니니까.”
“아걸과 은거 무인을 찾아야 하니까 그렇지. 빨리 그려.”
“아걸은 어디로 갔지?”
“안으로 들어갔겠지 뭐. 원래 머물던 곳에 있을 거야.”
“왜살 님 칼자국은 못 봤지?”
“아직 일어나시지 못할 거야.”
“그렇지. 워낙 심하게 당하셨으니까.”
그들은 그림이 그려지는 동안 주위를 돌아보면서 잡담을 주고받았다. 아니, 아무 말이라도 해야만 긴장이 풀릴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전사들이 벌떡 일어나서 달려들 것 기분이 들어서 영 께름칙했다.
* * *
“아!”
취운도 너무 놀라서 말을 잊지 못했다.
이번 싸움은 굉장히 중요하다. 전보영은 계속해서 아걸도 이번만은 매우 힘들 것이라는 정보를 보내왔다. 사망자도 상당히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래서 취운이 직접 와서 아걸을 주시했다.
이런 일은 대체로 간자들에게 맡기고 말지만, 이 싸움은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싸움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주시하던 곳과 토족 전사들이 지나쳐 온 길이 달랐다. 토족은 취화원 간자가 지키고 있던 길목으로 다가왔는데, 간자는 전사를 보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취운은 전사들을 놓친 데 이어서 싸우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취화원 간자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전보영에서 급히 연락을 취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가서 밀서를 받았다.
단곡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어차피 간자가 지키고 있다. 전보영에서 나온 전탐조도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본다. 그들이 보고 있으니 잠시 눈을 떼어도 좋을 것 같다.
전보영 밀서는 그렇게 급한 것이 아니었다.
허도기가 진개 대신에 초가평을 보냈다는 그저 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전보영 입장에서는 소축십검이 주위에 있다고 하니 충분히 경고해 주는 것이다.
부랴부랴 다시 돌아와 단곡을 주시하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아! 계속 여기 있었어야 해.’
취운은 단곡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보영 전탐조는 아걸 눈치를 살필지 모르지만, 취화원 사람들은 눈치 같은 것을 보지 않는다.
아걸은 원주의 정랑이다. 그러니 구곡주에게도 대군(大君)이 될 사람이다. 공식적으로는 대군이고, 마음으로는 제부(弟夫)다. 사랑하는 막냇동생 몽설의 장부이지 않나.
단곡으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아걸이 이 싸움을 이겨 냈다는 데 뿌듯한 마음이 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친 데는 없는지 걱정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사박! 사박!
취운은 아걸이 머물던 광장으로 들어섰다.
아걸이 직접 벌목하면서 만들어 놓은 넓은 공터에는 싸움의 흔적만 남아 있다. 죽어 있는 사람은 없지만, 사방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은거 무인들이 기거하던 곳도 텅 비었다.
그늘진 곳, 운공을 하던 곳, 두 발을 쭉 뻗고 눕던 곳, 잠자던 곳, 밥하던 곳……. 모두 텅 비었다.
취운은 공터를 지나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큰 나무를 끼고 굽이진 소로를 돌면 조그만 동굴이 나온다. 아니, 동굴이라고 할 수도 없다. 좌우로 바위 두 개가 놓여 있고, 그 위에 폭풍에 쓸려온 듯한 바위가 하나 얹혀 있다.
아걸이 머물던 곳이다.
역시 아걸도 없다. 단곡이 텅 비었다.
‘떠났어.’
아걸은 살아남은 은거 무인을 데리고 이곳을 떠났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염려하지는 않는다. 몽설이 아걸을 떠나지 못하듯이, 아걸도 몽설에게서 떨어지지 못한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몰라도 취화원에 돌아가면 즉시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취화원에 있을지도 모른다.
보아하니 전보영은 토족 전사들이 온 것은 물론이고 아걸이 떠난 것도 모르는 듯하다.
이번 싸움에서 전보영과 취화원은 완전히 닭 쫓던 개가 되고 말았다.
‘휴우! 그래도 이겼으니 다행이야.’
취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 *
허도기는 누구보다도 상세한 보고를 받았다.
전보영도 놓치고 취화원도 놓친 토족 전사들을 초가평은 정확히 보고 따라갔다.
초가평은 단곡 싸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구경했다.
“뭐라고!”
허도기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뭐가 어째!”
초가평은 잠시 말문을 잃고 허도기를 쳐다봤다.
아직 싸움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다. 토족 전사들을 발견하고 쫓아간 대목을 말한 참이다. 사부가 불같이 화를 낼 이유가 전혀 없는 대목이다.
‘왜 이렇게 화가 나셨지?’
“다시 말해봐! 전보영이 어떻게 움직였다고?”
사부가 사납게 물었다.
“위장포를 사용한 은신술을 펼쳤습니다. 어떤 은신술인지는 제가 견문이 짧아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왠지 중원 무공과는 조금 다르다 싶기도 하고…….”
초가평은 토족 전사들의 은신술을 한 마디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들의 은신술은 매우 간단하다. 하지만 사부에게 보고할 때는 적어도 은신술의 오의 정도는 말해야 한다. 하물며 어떤 무공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어떤 은신술인지 소상히 말해 봐.”
털썩!
허도기가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전보영의 은신술은 매우 간단하다. 말로 해도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질주 후에 은신하는 방법을 반복적으로 펼쳤습니다. 질주할 때는 섬전보(閃電步)를 쓰는 것 같고, 낙화수(落花手)를 써서 위장포를 뒤집어씁니다.”
초가평은 최대한 자세히 말했다.
전보영의 움직임은 매우 간단한데, 정작 말로 표현하기가 무척 어렵다. 어떤 행동도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작 입을 열자 맞는 설명인지 자신도 모를 소리가 튀어나왔다.
“후후! 후후후……! 빨리 달리고 순간적으로 위장포를 뒤집어쓰고. 이 두 가지가 한순간에 일어나더라 이 말이냐?”
“네.”
“사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빠른 순간에 모든 움직임이 끝났겠지. 그리고는 곧 다시 움직이고. 상황은 위장포를 뒤집어쓰는 순간에 살펴 놨으니 이후의 행동도 쉽게 할 수 있는 거지.”
이런 행동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려면 내력이 굳건하게 받쳐 주어야 한다. 어설픈 내력으로 전보영의 은신술을 흉내 내면 몇 번 펼치지 않아서 탈진하고 만다.
사부는 이 은신술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하다.
초가평이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전보영 신법이 어떤 것인지, 여쭙니다.”
“바보 같은 놈! 네놈이 소축십검이냐!”
허도기가 벼락같이 일성을 토해 냈다.
초가평은 침묵했다.
“그놈들, 남만 토족이야! 고명산에 있어야 할 죄수들! 전보영이 아니라 내 팔뚝이야!”
초가평은 불현듯 그들이 싸우던 모습을 떠올렸다.
전보영 무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난폭했다. 다리를 붙잡고 물어뜯지를 않나, 목을 깨물기도 하고, 남자의 생식기도 거침없이 공격했다.
악귀들 같았다.
가장 충격받은 행동은 목을 물어뜯는 장면이었다.
이빨로 목을 꽉 물고는 살점을 생으로 뜯어냈다. 퉤! 하고 내뱉기는 했지만, 살점을 물어뜯었을 때는 몇 번 질겅거리면서 씹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구나. 그들이 남만 토족이었구나.
“자세히 말해 봐. 토족이 어떻게 전멸했는지.”
허도기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초가평은 침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토족 전사들이 얼마나 강한 검을 구사했는지 기억을 되살려 가며 말했다.
조명천검에 절대 뒤지지 않는 검이었다.
매우 강렬하고, 사납고, 날카로웠던 검.
용암이 거칠게 뿜어져 나와서 온 천하를 새빨갛게 물들이는 것 같았다.
아주 강렬하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초가평은 토족이 은거 무인들을 공격하는 순간부터 전멸하는 순간까지 모든 사실을 말했다.
허도기는 눈을 감은 채 뜨지 않았다.
말을 마친 초가평은 물러난다는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대청을 빠져나왔다.
사부의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