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第四十八章 목전(目前) (4)
시동(侍童)이 종이 한 장을 들고 쭈뼛거렸다.
“뭐냐?”
시동은 허도기가 묻자 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슬며시 내밀었다.
허도기가 종이를 낚아채듯 확 빼앗아 들었다.
“앞으로는 주제넘은 행동은 하지 마라. 시동이면 시동다워야지. 시키는 일이나 제대로 해.”
허도기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시동에게서 빼앗은 종이를 펼쳤다.
“응?”
허도기는 종이를 펼치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 공고(公告)
성명(姓名) 아걸.
현상금(懸賞金) 이천 냥.
위 자는 정해년(丁亥年) 육월(六月) 열하루, 단곡에서 관군 이백 명을 살해했다. 무림 별호는 혈도비자이며, 진평에서 대산방 무인 사백십칠 명, 기타 무인 이십일 명, 모두 사백삼십팔 명을 죽인 대 살인귀다……
아걸에게 걸린 현상금이 무려 은 이천 냥이다.
은 한 냥에 쌀 여덟 석을 살 수 있으니, 이천 냥이면 무려 만육천 석을 살 수 있다.
천석지기 열여섯 명이 벌 수 있는 일 년 수입이다.
공고문에는 아걸에 대한 죄명이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관군 이백 명을 죽였다!
틀림없이 관군을 죽였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 체포령을 내린다. 생사 불문, 산 채로 잡아도 좋고 죽은 시신을 끌고 와도 무방하다. 무조건 잡아 오기만 하면 된다.
아걸은 혈도비자 외에도 명부판관이라는 별호가 있다. 하지만 명부판관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공고문에는 오직 잔혹했던 일만 쓰여 있다.
“음!”
허도기는 침음했다.
체포령은 전보영 단독으로 발부할 수 없다.
이런 공고문을 전국 각지로 배포하려면 의금부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황상에게 보고가 되고, 때에 따라서는 죽은 관군 이백 명의 실체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관군이 이백 명이나 움직였는데, 무슨 목적으로 어디를 가는 길인가? 왜 그곳에서 시비를 벌이고 죽었나 등등 상세한 내용을 거짓 없이 보고해야 한다.
즉, 다시 말해서 이 체포령은 전보영이 내린 게 아니다. 국법으로 내린 것이다.
“뭐 하자는 수작이지?”
허도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토족을 관군으로 변신시켜서 아걸을 공격한 것까지는 이해한다. 자신을 속이기 위한 술책이었다. 조위 장군이 조경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전보영 관군을 움직였다.
토족은 딱 거기까지만 관군이 될 수 있다.
토족이 멸살 당했다면 그때부터는 고명산 토족으로 되돌아간다. 그들을 관군으로 둔갑시키면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은 전보영이 뒤집어쓴다.
고명산에서 토족이 탈출한 일!
“아! 요것 봐라?”
허도기는 정신이 번쩍 났다.
고명산 토족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아직도 고명산에 있어야 한다.
토족을 지키던 산주와 산귀는 자신이 직접 처단했다.
토족이 누군가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아걸을 공격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조위가 고명산 토족을 거론하는 순간, 허도기는 관리 부실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들이 바로 아걸에게 죽은 관군들이라고 말할 여지가 전혀 없다.
책임을 면하려면 지금 당장 고명산에 토족을 채워 놓아야 하는데, 그게 되나.
‘이것들이 날 완전히 공중에 띄워 놓고 반병신을 만드네. 후후!’
허도기는 쓴웃음을 흘렸다.
조위가 말한다. 그래, 고명산 토족을 써먹었다. 내가 없앴지. 하지만 네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뭘 어쩔래? 아!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지금 당장 역심을 드러내면 되겠네. 원하는 대로 나라를 뒤집어 봐. 자신 있으면.
허도기는 조위 장군이 여우처럼 간특하다고 생각했다.
병기를 잡고 싸우면 별것 아닌데, 머리로 싸우니까 너무 골치 아프다.
‘이런 자는 전쟁터에서 죽여야 재미있는데.’
허도기는 종이를 구깃구깃 구겨서 시동에게 던졌다. 그리고 물끄러미 시동을 쳐다봤다.
시동이 날아오는 종이 뭉치를 받았다. 하지만 허도기의 눈길을 의식하고는 급히 머리를 수그렸다. 허도기가 몹시 두려운지 몸까지 가늘게 떨렸다.
‘간특한 놈.’
허도기는 시동에게서 조위와 자신을 겹쳐 봤다.
시동은 몸의 떨림까지 꾸며 내고 있다. 두려운 듯 벌벌 떨고 있지만, 일부러 만들어 낸 떨림이다.
이런 모습은 영락없이 조위다. 간특하지 않나.
시동의 눈빛은 야망으로 이글거리고 있다.
허도기가 시동의 야망을 모를 리 없다.
시동의 눈빛은 자신의 어렸을 적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사방이 꽉 막혀서 옴치고 뛸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이 난간을 뚫고 나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허도기의 손을 빌리는 것이 제일 쉽고 빠르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잡을 수 없는 지름길이다.
시동은 어떻게든 허도기 눈에 들어서 검공 한두 수라도 이어받으려고 발버둥 친다.
시동에 영특해서 옆에 두고 있지만, 야망을 읽을 때마다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이 치민다.
어렸을 적 자신에게는 조명천검이 있었다.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수련해도 여전히 성검문의 검 중 하나일 뿐이다. 문주가 될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의 절망감은 너무 지독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결국, 자신에게 씌워진 틀을 부수지 않고는 도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하제일검은 중요하지 않다. 천하제일검을 훨씬 능가하는 진정한 검을 가져야 한다.
독검(毒劍), 야망을 근간으로 한 독심이다.
사람 마음처럼 독한 검은 없다.
마음으로 형을 죽일 수 있다, 언제든 기회만 닿으면 죽이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 비로소 독검이 쥐어진다.
시동은 그런 마음으로 허도기에게 매달리고 있다.
이런 자는 허도기가 탈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바로 등을 돌린다.
어쨌든 지금은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허도기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아마도 이 체포령은 오늘 아침에 붙여졌을 것이다.
그걸 뜯어왔다.
지금까지 진공부에서는 그 누구도 이런 사실을 보고해 온 자가 없다.
시동이 제일 먼저 알려왔다. 대단히 발 빠르지 않나!
시동의 눈이 기대로 일렁거렸다.
허도기는 그 눈빛을 무시했다.
무엇인가를 주더라도 죽을 만큼 안달 난 상태에서 물 한 모금 정도 주어야 한다. 그래야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른다. 준 것보다 훨씬 더 큰 가치가 부여된다.
“수고했다.”
허도기는 시동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시동이 토해 내는 갈망의 눈길을 무시하고 걸어 나갔다.
첫째, 시동은 무재가 아니다. 대성할 재목도 아니면서 괜히 욕심만 많다.
둘째, 시동은 이미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종이를 빼앗을 때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을 봤다. 목검을 만진 지 한 달가량 되었다. 이미 다른 자에게 배우고 있거나, 아니면 훔쳐 배운 것이다.
허도기는 무재가 아닌 자를 제일 경멸한다.
저벅! 저벅!
허도기는 뒷산을 올라갔다.
진공부에도 성검문처럼 북쪽 위치에 가산을 만들었다.
흙을 쌓고, 바위와 나무를 옮겨다 심었다. 물길도 끌어와서 계류도 만들었다.
가산에는 연공실이 있다.
허도기 정도 되면 전각에서 연공을 해도 누군가로부터 방해받을 일은 전혀 없다.
하지만 허도기는 항상 땅을 밟고 수련했다. 나무가 숨 쉬는 곳에서, 맑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검을 휘둘러야 제대로 된 검초가 펼쳐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그런 장소가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는 금역이라면 더 바랄 나이가 없다.
그 정도 장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성검문 가산은 만들어진 지 꽤 오래되었다. 허도기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진공부를 지을 때도 성검문과 같은 방식으로 가산을 지었다.
하지만 진공부에서는 가산에 올라서 연무한 적이 거의 없다. 십오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열 손가락이 넉넉할 정도로 몇 번 오르지 않았다.
저벅! 저벅!
정말로 오랜만에 뒷산을 오른다.
산길에 풀이 허리 높이로 자랐다. 옛날에는 반듯한 길이었는데. 지금은 길인지 숲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다.
공부의 연무장은 어떤 사람도 출입할 수 없다.
호위 무인은 물론이고 시종조차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 경계는 가산 바깥 경계에서 선다. 식사조차도 가져오지 않는다. 공부가 연무를 할 때나 하지 않을 때나 철저한 금역이 된다.
당연히 산길도 다듬지 않는다.
허도기가 특별히 명령을 내려서 길을 다듬으라고 할 때만 가산에 들어설 수 있다.
허도기는 허리까지 차오르는 풀들을 헤치고 산에 올라갔다.
이윽고 산 중턱쯤 오르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한쪽에는 계류가 흐르고 절벽 쪽으로는 숙소를 대신하는 동굴이 파여 있다.
성검문과 같은 구조다.
연무장은 움직이기 좋도록 흙을 단단히 밟아 놓았는데, 어느새 이곳도 풀밭 천지가 되었다.
“후후!”
허도기는 갑자기 옛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동굴에 누워서 멍하니 쏟아지는 빛줄기를 바라보는 게 좋았다. 이슬비도 좋았고, 폭우도 마음 편했다. 비를 쳐다보면 온갖 걱정이며 근심이 싹 사라졌다.
허도기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허도기는 풀을 헤치고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동굴은 넓고 깊다. 돌로 침상과 탁자, 의자들을 만들어 놓았다. 불을 피울 수 있도록 화로도 준비했다. 연무장 앞을 흐르는 계류가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간다.
연무 목적이 아니더라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다.
허도기는 딱딱한 돌의자에 앉았다.
동굴 벽에는 유등이 두 개나 있다. 하나는 시중에서 흔히 쓰는 유등이고, 다른 하나는 한쪽 면을 뻥 뚫어 놓아서 바람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허도기는 기이한 유등에 불을 밝혔다. 그리고 뻥 뚫린 부분에 오색찬란한 보옥을 내려놓았다.
불빛이 보옥을 통해서 오색찬란한 빛을 뿌렸다.
쉬이이익!
유등을 피워 놓은 지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서 매우 미세한 바람 소리가 일어났다.
날다람쥐가 나무를 타는 듯 기척이라고 할 수도 없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허도기는 숨을 흘리는 듯한 소리를 폭풍 소리처럼 크게 들었다.
쉬이이잇! 스으으읏!
키가 작고 몸이 단단해 보이는 사내가 나타나더니 재빨리 허도기 앞에 부복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많이 좋아졌군.”
“산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려서 살만 쪘습니다.”
사내가 말을 하면서 서신 몇 통을 꺼내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허도기가 서신을 받아서 읽었다.
첫 번째 서신, 아걸에 대해서 적혀 있었다.
아걸은 단곡 싸움 이후 대별산으로 움직였다. 일행은 단곡 싸움에서 살아남은 일곱 명 전원이다. 그들이 아걸을 암중으로 호위하면서 이동했다.
그들은 몽설과 만난 후, 대별산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대별산 깊은 곳에서 무공을 수련하려는 듯하다.
여기까지는 정상적으로 잘 쫓아갔다. 하지만 그 밑에 적힌 한마디가 좋지 않다.
- 추적중(追跡中)
아걸을 보고 있다면 결코 추적중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중’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은 향후, 아걸을 발견한 후에나 정정될 것이다.
아걸을 놓쳤다.
두 번째 서신, 전보영에 대한 보고다.
조 장군이 창고를 열었다. 전보영이 창고에서 나온 물건을 가져 나왔고, 취화원에 전달했다.
말로만 들리던 장군가 비고가 열렸다.
비고에서 나온 비급과 영약은 취화원 살수들을 한층 강하게 성장시킬 것이다.
이에 대한 모든 증거를 수집했다.
조위 장군이 무림 살수 문파인 취화원과 연계되었다는 꼬리를 잡았다.
“역시 실망하게 하지 않는군.”
작은 사내가 머리를 숙였다.
세 번째 서신, 조위 장군에 대한 보고다.
서신에는 조위 장군이 움직이려고 했던 부대 열여섯 곳에 대한 정보가 소상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조위는 이번에 자신을 치려고 했다.
열여섯 개의 부대를 움직여서 무력 기반을 말살시키고, 장군가와 전보영은 진공부를 들이칠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막판에 뒤집혔다.
허도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서신에서는 조위가 왜살을 버린 이유를 알게 될 줄 알았다. 한데, 믿었던 서신 속에서도 왜살에 대한 말은 전혀 언급되어있지 않다.
조위가 왜 상을 버렸을까? 굳이 죽일 이유가 없는데,
“계속 주시해라. 조위가 먼저 움직이면 곤란해.”
“네. 항시 주의해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허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