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第五十一章 천무(天武)(4)
저벅! 저벅! 저벅!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차분히 걸어왔다. 아걸이다.
아걸은 허도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왜살에게 다가가서 상처를 살폈다.
아걸의 표정이 이내 침중해졌다.
“휴우!”
힘없이 흘러나온 한숨이 왜살의 상태를 말해 준다.
아걸은 조 장군을 쳐다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주기까지 했다.
핏빛으로 물들었던 눈동자가 평생지기였던 조 장군에게 던진 남긴 마지막 말이다.
왜살은 이미 절명했다.
아걸은 왜살의 시신을 내려놓고 허도기를 향해 걸어갔다.
“이번 사냥은 수확이 좋군. 호랑이만 잡을 생각이었는데, 곰까지 잡게 됐어. 이렇게 되면 나도 생각이 달라지는데? 하하! 고맙군. 일을 무척 편하게 만들어 주었잖아.”
허도기가 웃으며 말했다.
허도기는 아걸과 조 장군이 협공할 수 있다는 사실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 가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되지도 않을 싸움인 거 알잖아. 그런데 왜 나서는 거지? 내 검이 어떤 검인지 알면 상대가 될 때까지 죽치고 있는 법도 배워야지.”
“그렇군. 그런 것도 배워야겠군.”
아걸이 반철도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세상 살기가 싫은가? 덕분에 난 훨씬 편해졌어. 어차피 네놈도 찾아갈 생각이었으니까.”
허도기가 아걸을 보며 말했다.
“방금 왜살에게 펼친 검, 조명십해 중 사령귀변이었던 것 같은데. 맞나?”
“그걸 본 거야? 하하하!”
짝! 짝! 짝!
허도기가 손뼉을 치며 활짝 웃었다.
아걸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허도기를 향해 쏘아 가고 있었다.
쉬이이이잇!
아걸의 신형이 가히 섬전이다. 쏘아 낸 화살 같다.
일순, 반철도가 다섯 개로 확 불어났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단순한 동작인데, 그 동작이 다섯 개로 보인다.
“분도(分刀)! 와우!”
허도기가 눈을 부릅뜨며 경탄했다.
아걸은 오직 한 곳만 내리친다. 거센 힘으로 내리꽂는다. 한데 상대가 보기에는 마치 칼날 다섯 개가 전신을 쪼개 오는 것처럼 여겨진다. 또 폭포수가 확 쏟아져 내리는 느낌도 든다.
두 느낌은 같이 일어날 수 없다.
칼이 다섯 개로 쪼개지는 것은 예리한 분리다. 쾌도와 환도의 결정체다. 주(主)는 환도이고, 거기에 속도를 가하면 공격점이 예리하게 갈라진다.
칼날 다섯 개가 모두 실체다.
반면에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느낌은 강도(剛刀), 폭도(暴刀)에서 일어난다.
세심하게 나눠서 빠르게 내리치는 칼이 아니다. 거칠게, 난폭하게 내리친다.
이 두 개의 칼은 전혀 다르다.
한 사람이 두 개의 칼을 동시에 펼칠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쾌도와 환도와 강도를 칼 하나에 실었다는 말인데, 이게 가능한가?
환(幻)을 만들어 내려면 여분의 동작이 가미되어야 한다.
폭도는 쓸데없는 모든 동작을 배제하고 오직 한 점에 힘을 집중시킨다.
두 칼의 무리가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 때가 있다. 쾌도, 환도, 강도가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닌데, 마치 함께 펼쳐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허도기가 말한 분도다.
아걸은 쾌도를 펼치지 않는다. 환도도 펼치지 않았다. 오직 하나, 폭도만 펼쳤다.
한데 칼에 실린 힘이 너무 강해서 칼이 갈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칼 다섯 개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다. 희뿌연 안개가 뭉쳐서 칼이라는 덩어리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다. 그런 칼 덩어리가 다섯 개다.
다섯 개 중 하나만 실체다.
다른 네 개는 실체에서 퍼져 나간 도기 덩어리다. 형체 없는 도기가 형체를 드러낸다.
원래 이런 현상은 분기도강(分氣刀剛)이라고 한다.
허도기가 말한 분도는 분기도강의 줄임말이며, 초절정 경지를 말해 주는 지표다.
강도의 결정체가 허도기를 향해 터졌다.
“그 사이 무공이 또 늘었군. 도대체가 끝이 없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 기대되기는 하는데, 아쉽군. 지켜볼 시간이 넉넉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허도기가 검을 잡았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조용히 칼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반철도가 허도기 머리를 내리찍는다. 그래도 허도기는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망부석이라도 된 듯 꼼짝하지 않는다. 조용하다.
부동심(不動心),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하지만 눈은 냉철하게 반철도를 보고 있다. 검이 파고들 틈을 노리고 있다.
파앗!
번갯불처럼 좋지 않은 느낌이 일어났다.
허도기는 이미 틈을 봤다. 그런데도 차분하다. 발검이 살상으로 이어지는 거리를 기다린다. 검이 몸을 뚫을 수 있는 거리까지 아걸이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졌다!’
생각이 아니다. 느낌이다. 칼을 쳐 내는 가운데 불현듯 내 몸 어딘가가 텅 비었다는 생각이 든다.
발검과 동시에 베일 곳이다.
그렇다고 공격을 물릴 수는 없다. 아걸은 아직 그 정도까지 칼을 수련하지 못했다. 강도, 폭도는 일으키지만, 중간에서 거두는 것은 미숙하다. 그때,
쒜에에에엑!
느닷없이 허도기 옆에서 폭풍이 일어났다.
거대한 파도가 허도기를 덮쳤다. 성난 해일이 파르륵 일어나서 덮쳐 온다.
휘익!
허도기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순간, 반철도가 청석을 꽈앙! 내리쳤다.
서로 간발의 차이다.
허도기가 검을 뽑을 시간을 빼앗는 순간이기도 하다. 만약 이 시간을 빼앗지 않았다면 검은 뽑혔을 것이고, 반철도가 청석을 내리칠 때 검도 피를 뽑아냈을 것이다.
“후욱!”
아걸이 즉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아걸은 내리치는 힘이 너무 강해서 반철도를 거두지 못했다. 처음부터 일격필살의 각오로 칼을 쳐 냈다. 이번 칼이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허도기를 이길 자신은 없었다.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번 칼에 전력을 다 쏟았기 때문에 허도기를 베든 안 베든 후회가 남지 않는 칼이었다.
중간에 자신의 칼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역시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데, 뭘 더 어쩌란 말인가!
쉐에에엑! 파라라락!
조 장군이 월극으로 허도기를 핍박했다.
허도기가 한 발 물러서면 한 발 따라붙었다. 옆으로 비켜서면 같이 옆으로 움직였다.
월극으로 머리를 찌르고. 가슴을 찌르고, 다리를 찌르고 다시 돌려서 옆구리를 찌른다.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월극을 쏘아 낸다.
허도기는 신법만으로 월극을 피했다.
검은 여전히 뽑지 않았다. 선기를 잃어서 계속 공격당하고 있지만, 충분히 빠져나올 공산이 커 보였다.
가끔 허도기는 손바닥으로 월극을 쳐 내기도 했다.
허도기는 조위 장군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 팔극창법을 지켜보면서 필살 검권을 노린다.
허도기가 검을 뽑으면 조 장군이 죽는다.
쉬이이잇!
아걸은 다시 허공으로 치솟았다.
원래 아걸은 누군가와 합공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조금만 더 지체하면 허도기가 검을 뽑을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조 장군의 창법은 아걸의 눈에도 보였다. 그러니 허도기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지금! 지금!’
창술을 대하면 ‘지금!’하고 기회가 포착된다. 반철도가 튀어 나가려고 한다.
창법에서 허점이 드러나고 있다.
허도기도 틈을 여러 번 찾아냈다. 다만 그는 더 정확한 검권을 노리고 있다. 손을 여러 번 섞는 싸움이 아니라 발검과 동시에 죽일 수 있는 거리를 노린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부득이 신형을 날렸다.
쒜에에에엑!
또다시 하늘에서 칼이 떨어졌다. 칼 한 자루가 다섯 개로 쫙 불어나며 떨어졌다. 마치 거대한 갈고리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눈사람을 내리찍는 느낌이다.
허도기는 막 검을 뽑으려고 했다. 하지만 절묘하게 아걸이 뛰어드는 바람에 미처 검을 뽑지 못하고 물러났다.
두 사람이 합공을 취하자 허도기도 쉽게 검을 뽑지 못했다. 하지만 허도기는 급하지 않았다. 여전히 냉철했다. 두 눈이 독사처럼 차갑게 굳었다.
그는 여전히 두 사람의 무공을 지켜보고 있다.
쒜에엑! 쒜에엑!
반철도가 허도기를 내리찍었다.
아걸이 펼친 반철도는 분도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무공이지만, 허도기에게는 그저 평범한 칼질일 뿐이다. 칼질 속에서 허점이 보이니 검을 쓸 수 있다.
스읏!
검을 잡은 손에 힘이 주어졌다.
마침 그때 조위 장군의 월극이 다리를 휘감아 왔다.
아걸을 먼저 베고 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월극을 깨끗이 피한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허도기 눈에 허점이 보일 뿐이지, 아걸과 조 장군이 절정 무인인 것은 틀림없다. 허도기 외에는 상대가 없다고 할 만큼 초절정 고수들이다.
“흠!”
허도기는 미간을 확 찡그렸다.
그가 잘못 판단했다. 조위든 아걸이든 그의 상대가 안 되는 것은 맞다. 둘이 합공을 해도 상대가 안 된다. 잠시 공격 순간을 잡지 못하고 있지만, 곧 잡아챌 수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허도기는 이들을 베는데 시간이 거의 소모되지 않는다고 봤다.
순간이면 끝난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왜살이 와서 시간을 빼앗았고, 아걸까지 와서 더 많은 시간을 빼앗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다. 중원 쪽에서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침입자들을 처리한 경계 군사들이 이제야 본가도 습격당한 사실을 알아챘다.
반철도가 내리치는 힘이 워낙 강했다. 한 번씩 청석을 두들길 때마다 천둥 치는 소리가 울렸다. 조 장군이 휘두른 월극도 거센 돌풍을 일으켰다.
습격 사건에 참가하지 않은 경계 군사들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그들은 재빨리 연락을 취했고, 이제 막 정동 무인들을 처리한 제삼궁대와 호휘대가 내원으로 밀려들고 있다.
척! 척척! 척척!
재삼궁대가 전각 지붕 위로 포진했다.
“후후후!”
허도기가 웃었다.
“장군, 아걸. 너희 오늘 운이 참 좋아. 두 사람 무공은 잘 봤어. 다음에 다시 만나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처럼 요행을 바랄 수는 없을 거야.”
“다음에는 잡도록 해 보지.”
“마음대로. 하하하!”
허도기가 신형을 날렸다.
아걸은 허도기를 쫓지 않았다.
아걸은 이번 싸움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절히 느꼈다. 반철도를 펼칠 때마다 허점이 드러나는 것을 알았다. 만약, 조 장군과 합공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스윽!’
아걸은 오른쪽 허벅지를 만졌다.
반철도를 내리칠 때, 허도기는 오른쪽 허벅지를 노렸다. 허도기의 시선이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었다. 허도기의 눈이 허벅지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검에 허벅지를 찔린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허벅지를 찌른 검이 곧바로 뒤로 꺾이면서 등을 찌른다면 생사가 불분명해진다.
‘허벅지. 척추. 즉사.’
아걸은 제 죽음을 순순히 시인했다.
허도기는 한 번도 검을 뽑지 않았다. 자신도 조 장군도 공격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검권에 휘말리지 않았다. 한 사람이 휘말리면 즉각 다른 사람이 보호했다.
역시 합공이 주효했다.
합공을 펼치지 않았다면 두 사람 모두 시신이 되어서 쓰러졌을 것이다.
아걸은 눈살을 찌푸렸다.
허도기가 이처럼 큰 산이었나? 싸움을 거듭할수록 그가 높아 보인다. 영원히 넘을 수 없는 태산 같다.
다음에 또 만나면 죽는다고?
아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허도기의 말이 사실로 이루어질 것 같다.
“역시 공부야. 공부의 검법이 이렇게 놀라울 줄은 미처 몰랐군.”
조위 장군이 멀어져 가는 허도기를 보면서 탄식했다.
의원 도취가 달려와서 왜살을 살폈다. 하지만 묻지 않아도 진맥 결과는 알 수 있다.
도취가 손을 떼고 일어섰다.
왜살은 이미 절명한 상태다.
“자네에게 큰 빚을 졌군.”
조 장군이 죽은 왜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