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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258화 (258/600)

#258화. 第五十二章 폭우(暴雨)(3)

은거 무인들은 전보영주의 부탁을 받고, 일정한 금액을 받은 후에 그가 지시한 자들을 죽인다.

일종의 청부다.

이번 전보영 청소는 전보영주 개인 자격으로 이루어진다.

전보영에서 조직을 청소한 것이 아니다. 전보영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살해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래서 전보영 사람들은 이번 싸움에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전보영의 이번 척살은 그저 살인이다.

전보영 사람들이 모두 조위 장군을 지지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 허도기를 추종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제삼자를 받들 수도 있다.

전보영 역시 국록을 먹는 관원들인 이상 반드시 통일되게 한 사람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보영주가 수하를 제거하려면 그들을 죽여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존재해야 한다.

수하들이 자신의 수장을 죽였나?

전보영 수장들이 일제히 공격받기는 했지만, 암살자는 낯선 무인들이다. 허도기도 아니고 전보영 관원도 아니다. 무림인들 몇몇이 일을 저질렀다.

그러면 수하들이 전보영의 권한을 이용해서 해악을 끼쳤나?

그런 것도 없다. 설혹 그런 일이 있더라도 추포되어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척살은 무조건 금지된다.

더욱이 단순히 허도기의 심복일 것이라는 추측만으로 관원들을 척살한다는 것은 어떤 권한 행위에도 속하지 않는다.

무림이라면 이런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관청, 관원일 경우에는 무력보다 법이 앞서야 한다. 법을 무시하는 어떤 행위도 금지된다.

전보영주가 벌인 일은 상황에 따라서는 정적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만치 손승이 죽인 사람들도 지극히 개인적인 원한으로 죽인 게 된다. 공적인 일이 아니라 개인사다. 이 살인에 대한 이유는 오직 전보영주가 내놔야 한다.

죽인 자들이 정말 허도기의 심복이냐 하는 부분도 확실하지 않다.

나쁜 생각을 하면 이번 기회에 전보영주가 평소 껄끄러웠던 자들을 제거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저들이 허도기의 심복인지는 오직 전보영주만 안다.

쉬잇! 퍼억!

칼이 한 생명을 끊었다.

‘다섯 명째.’

전보영주가 손승에게 부탁한 다섯 명을 모두 척살했다.

손승은 짧은 시간에 네 명을 죽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까지 깨끗하게 처리했다.

손승은 이들이 허도기 측근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은 밤이 지난 후에 일어날 일을 알았던 듯하다. 모두 새로운 위치에서 어젯밤에 벌어진 일을 수습하고 있었다. 전임자의 관점에서, 허도기의 눈으로 지시를 내렸다.

죽은 자들은 암습을 받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죽은 자들은 무림과 결탁해서 사사로이 이권을 챙겼다. 돈을 받고 전보영 정보를 내주었다. 제이부장은 살인자를 천축으로 도피시키기도 했다. 물론 거짓이다.

전보영은 죽은 상관들에 대해서 함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관의 치부를 감춰 준다는 명목으로 전보영 입장에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바뀐 줄 알았다.

전보영이 자신들의 수중에 떨어진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일사천리로 빠르게 일을 지시하고 느긋하게 차를 즐기기까지 했다.

전보영주는 아주 조용히 척살을 진행했다.

은거 무인의 움직임도 조용했다. 한 명을 죽이자마자 곧바로 다른 자에게 이동했다.

한 명, 한 명 쓰러트리기 시작한 것이 드디어 마지막이다.

손승은 월도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내 할 일은 끝났고.”

무의식중에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가 말이 되어 튀어나왔다.

이런 일을 하기 싫어서 초야에 은거했던 것인데, 다시 칼을 잡고 사람을 죽인다.

칼이란 이런 것이다. 일단 손에 쥐면 반드시 목숨을 뺏는다.

무공을 왜 배우나? 악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을, 선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나라에 충성하고 안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다 헛소리다. 모든 말속에 살인이 포함되어 있다.

아걸이 좋아서 무림에 나왔지만, 피를 흘리는 일은 역시 싫다.

‘나한테 맞지 않아.’

아걸이 어떻게 허도기와 맞서 싸우나 끝까지 보고 싶기는 한데, 역시 끝은 보지 못하겠다.

아걸이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무공만 수련한다면 언제까지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게 아니다. 앞으로도 이런 종류의 살인은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아무래도 에조리로 돌아가야겠어.’

손승은 주검을 남겨 두고 나오면서 결심을 굳혔다.

사실 그동안 아걸 곁에 있고 싶은 마음과 에조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반반이었다. 어떤 때는 아걸과 같이 끝을 보자는 생각이 강했고, 어떤 때는 에조리가 무척 그리웠다.

자신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결심이 선다.

살인도 살인 나름인 것 같다. 토족과 싸운 후에는 아걸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이 강했는데, 전보영 관원들을 죽인 후에는 모든 것 다 놓고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손승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전보영 오청은 전보영 관청 중에서도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다.

제오청이 바깥쪽에 있는 것은 업무 특성 때문이다.

제오청은 안가 유지를 담당한다. 한 마디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일을 한다.

업무상 출입이 자유로워야 한다.

손승은 한 사람이 대문을 통해서 버젓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봤다.

그는 아주 강한 고수다. 한눈에 봐도 숨 막히는 살기가 줄줄이 토해진다.

그런데도 전보영 제오청 관원들은 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저 제오청에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외부인이거니 생각한다. 그만큼 사내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허도기!’

손승은 허도기를 본 적이 있다.

아걸이 조경 장군과 비무를 할 때, 비무대 위에서 느긋하게 싸움을 지켜본 자다. 나중에는 놀라운 검법으로 아걸을 박살 내고 내치기까지 했다.

‘허도기가 직접 제오청을!’

손승의 미간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현재, 전보영에서 최고수는 자신이다. 다른 은거 무인들도 있지만, 무공 차이가 심하지 않다. 자신이 최고수라고 말해도 될 만큼 비슷비슷하다.

손승은 허도기에게 걸어갔다.

허도기가 전보영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면 자신이 상대해야 한다.

제오청에 불던 피바람은 끝났다. 많은 사람이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간다. 손승이 방금 죽인 제오청 부청사의 시신도 말끔히 처리되었을 것이다.

“공부를 뵙니다.”

손승은 허도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검이 언제 뽑힐지 모른다. 허도기 같은 사람이 기습을 취할 이유가 없지만, 그래도 방비한다.

“내가 누군지 아는군.”

“혈무대에서 뵌 적이 있죠.”

“그럼 내가 온 목적도 알겠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전 전보영 사람이 아니라서…….”

손승이 자신의 신분을 어렴풋이 밝혔다.

원래 전보영은 관복을 입지 않는다. 모두 사복을 입는다. 황궁에 입궐할 때는 관복을 입어야 하지만 전보영으로 청에 나올 때는 사복 착용을 한다.

손승이 전보영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허도기도 전보영에서 부는 피바람은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니 전보영 사람이 아니라면 피바람을 일으킨 쪽이지 않나. 손승 스스로 아걸 사람이라고 밝힌 것이다.

허도기가 말했다.

“이름이 손승. 맞지?”

“절…… 압니까?”

“알아야지. 내가 죽일 사람인데.”

“음!”

손승은 침음했다.

허도기가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죽일 사람이라고.

허도기 같은 자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오늘 이곳에 사람을 죽이러 왔다. 하지만 전보영 관원들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무모한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상대는 바로 자신이다. 또는 자신을 비롯해 오늘 피를 본 자들이다.

허도기는 이미 전보영에서 일어난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자신의 심복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전보영 수뇌들을 쳤지만, 여전히 전보영은 영주 손에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렇다면 어쩌면 영주도 노릴 수 있지 않을까?

스읏!

손승이 월도를 겨누며 물었다.

“오늘 몇 명이나 죽일 생각인가?”

“하대? 이제는 존대할 필요도 없다는 거군.”

“나이는 나도 만만치 않게 먹었어. 지금까지는 공부를 예로 대해 준 것뿐, 살수라면 말이 달라지지.”

“대답해 줘? 한 명. 한 명만 죽이면 돼. 운 나쁘게 네가 걸렸으니 오늘은 네가 죽고…… 하루에 한 명씩 죽일 생각이야. 아걸을 쫓아다니면서.”

“뭐라고!”

“후후후!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

스읏!

허도기가 검을 잡았다.

허도기는 아걸 곁에 있는 사람을 모두 죽일 심산이다.

은거 고수가 있으면 은거 고수를 죽이고, 취화원이 있으면 그들을 쓸어 낸다. 조위 장군이 있으면 장군도 벤다. 일차 목표가 아걸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운 한번 더럽게 나쁘다고 생각해.”

허도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스읏!

손승은 월도를 꽉 잡았다.

어떤 초식을 사용할까? 상대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싸우려면…… 부지런히 초식을 떠올려 봤지만, 허도기를 상대할 만한 도초가 생각나지 않았다.

도법은 대체로 받아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상대가 창을 찔러오면, 찌르는 창을 피하면서 손목을 친다. 벽도(劈刀)다. 또 찌르는 창을 칼로 막고 목을 친다. 괘도(掛刀)다. 찌르는 창을 밑에서 위로 쳐올리면서 칼을 회전시켜 목을 쳐내는 도법도 있다. 참도(斬刀)라고 한다.

모든 칼이 상대방의 움직임을 지켜본 후에 대응하는 형식이다.

이런 도법으로는 허도기를 상대하지 못한다. 절대적인 선제공격으로 대결해야 한다.

쒜에에엑!

손승을 즉시 허도기의 목을 노리고 칼을 쳐 냈다. 하지만 목을 치지 않는다. 왼 다리, 오른 다리, 다시 왼 다리…… 회전을 두 번이나 했다. 칼도 빙글빙글 돌았다.

한 번 회전을 일으킬 때, 목으로 향하던 칼이 느닷없이 다리를 찍었다.

허도기는 왼발을 슬쩍 올려 칼을 흘려버렸다.

순간, 손승은 이미 다른 칼을 쳐 내는 중이었다. 다리에서 가슴으로 쳐올린다.

허도기가 뒤로 한 발 빠졌다.

손승은 즉시 따라붙으면서 쳐올린 칼을 빙글 휘둘러서 비스듬히 사각으로 내리쳤다.

허도기가 다시 한발 물러섰다.

허도기는 많이 물러서지 않는다. 딱 한발만 물러선다. 손승의 칼이 가슴 앞을 쓸고 지나가게 만든다.

굉장한 안목이다. 아니, 자신감이다.

손승은 숨 한 모금 들이쉴 짧은 순간에 오 초나 전개했다. 그리고 허도기는 가볍게 오 초를 피했다. 아직 검도 뽑지 않고 가볍게 한 발씩 물러서면서.

손승은 적수가 안 된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이제야 비로소 아걸이 왜 무너졌는지 알겠다. 그만한 무공을 지니고도 힘 한번 못 쓰는 이유를 뼈저리게 느꼈다. 이 자는 인간이 아니다. 무신이다.

“후욱!”

손승은 칼을 다시 고쳐잡았다.

상대가 안 된다면…… 그래! 마지막 칼을 쓰자. 죽어도 여한은 없어야 한다.

손승에게는 미완성 칼이 있다.

아걸과 함께 싸우면서 퍼뜩 깨달은 도법, 아직 이름도 붙어 있지 않은 도법이 있다.

나름대로는 지금까지 펼친 도법들만큼이나 숙련되어 있다고 자부한다.

휘잉! 휘이잉! 휘이이이잉!

칼을 몸 주위로 빙글빙글 휘돌렸다.

팔이 천 개인 천수여래(千手如來)가 칼을 쓴다. 칼과 팔이 분리되어서 칼날이 휘도는 모습만 보인다.

손승은 그 상태 그대로 허도기에게 달려들었다.

칼날 박힌 마차 바퀴가 구르는 것처럼 거센 돌풍이 일어나면서 천 개의 칼이 허도기를 찢어갔다.

그가 다가선 곳은 어김없이 칼바람에 휘말린다.

나무와 돌이 썰린다. 텅 빈 허공, 공기마저도 썰리는 것 같다. 순간,

철컥!

허도기가 검을 뽑았다. 그리고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야말로 찰나에 벌어진 일이다. 검이 뽑히고 거두는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철컥!’하는 한 마디가 검이 발출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줄 뿐이다.

손승은 모든 움직임을 잊었다.

더는 칼이 움직이지 않는다. 몸도 딱 멈춰 섰다.

“으……”

손승은 가는 신음을 토해 냈다.

허도기의 검은 삼백육십변(三百六十變)을 뚫고 들어왔다. 정확히 심장을 찔렀다.

손승은 심장을 쳐다봤다.

피가 흘러나온다. 가는 피가 스르륵 흘러내린다. 아니, 곧이어 붉은 피가 확 터졌다.

쿠웅!

손승은 거칠게 무너졌다.

허도기가 말했다.

“하루에 한 놈씩 죽인다. 이놈처럼.”

지나가던 관원은 느닷없이 벌어진 결전에 말도 못 하고 눈만 부릅떴다. 그는 자신이 누구와 마주 섰는지도 알지 못했다. 낯선 자가 낯선 자를 죽였을 뿐이다.

말을 마친 허도기는 더 볼 일이 없다는 듯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전보영 관원들은 허도기를 가로막지 못했다. 방금 엄청난 무공을 보았기 때문에 가로막을 정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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