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第五十二章 폭우(暴雨)(4)
아걸과 전보영주는 조용조용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 앞에 차가 놓여 있지만, 따라 놓은 지 꽤 오래되어서 차갑게 식어 버렸다.
화로에 올려진 주전자에서는 뜨거운 김이 솟구치고 있다.
찻물이 팔팔 끓는다. 하지만 주전자를 내려놓을 생각도, 차를 따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장군가는 염려하지 말고 전보영을 잘 정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걸이 장군가에서 벌어진 일을 소상히 말해 주었다.
“음!”
전보영주가 침음했다.
허도기가 장군가를 급습했다는 사실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제부터 정세가 매우 매우 급하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도대체 허도기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휴우! 그나저나 왜살이 죽었다니 장군님이 매우 괴로우시겠군. 친형제보다 가까웠는데.”
“…….”
아걸은 식어 버린 찻잔을 들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전보영과 장군가를 친 자들이 정동무인이라고 했나?”
“네.”
“그런 자들이 또 있나?”
물론 없다. 전보영도 무림 소식을 환히 꿰고 있다.
다만 전보영이 알지 못하는 것들은 혹시 아걸은 알고 있지 않나 해서 물어본 것이다.
“없습니다.”
아걸이 확실하게 말했다.
“서리형개의 수하가 허도기 밑으로. 후후후! 세상 참……”
전보영주가 혀를 찼다.
서리형개는 정동 무인들을 상당히 강하게 키웠다. 하지만 그런 자들조차도 허도기에게는 한낱 소모품일 뿐이다.
허도기는 정동무인을 거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 결과가 이런 일로 벌어졌다. 서리형개의 보물이 하찮게 쓰일 때,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더욱이 그들은 금지 무공인 탄명저주공까지 사용했다.
장군가에서 무사히 빠져나갔다고 해도 오래 살지 못한다.
“공부, 정말 잔인한 사람이군.”
전보영주가 중얼거렸다.
“비정하다는 말을 빠뜨리셨군요.”
아걸이 말했다.
“비정? 그렇군. 잔인함에 비정함을 더해야지. 후후!”
전보영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허도기는 매우 잔인하고 비정한 사람이다.
증거는 없지만, 아걸은 허도기가 얼굴도 보지 못한 형들을 죽였다고 생각한다.
성금 문주가 운명한 날,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형들 세 명이 일제히 마인의 기습을 받고 죽었다.
바로 그날, 어머니도 자진했다.
한날한시에 일가족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목숨을 달리했다.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허도기가 작심하고 들이치지 않은 이상은 벌어지지 않을 일이다. 반드시 의심을 품고 속내를 들여다봐야 할 사안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의문을 묻어 버렸다.
그만큼 허도기의 검이 두려웠다는 뜻이다.
허도기는 눈으로 웃는다. 마음은 웃지 않는다.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한다. 든든한 뒷배를 만난 것 느낌이다. 하지만 속마음은 다르다. 절대 정을 주지 않는다.
허도기는 소축십검조차도 가볍게 보았다.
그의 인품에 반해서 군을 등지고 무림까지 따라나선 일기장군 하원랑이나 적위군장 사구정도 버림받았다. 아니, 끊임없이 능력을 증명하는 중이다.
허도기는 오직 능력 있는 사람만 옆에 둔다.
능력이 없으면 가차 없이 내친다. 능력이 있는 사람도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어떤 일을 시키면 걱정을 끼치지 않을 방법으로 깨끗하게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모품이나 할 일에 투입된다.
이렇게 비정하고 잔인한데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주기 때문이다.
재물도 주고 무공도 준다.
허도기에 눈에 들면 호의호식한다.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정말 많이 받는다. 능력이 오 푼이라면 육 푼, 칠 푼에 해당하는 재화를 받는다.
본인의 능력보다 훨씬 많은 재물을 베풀기 때문에 인품마저 넉넉해 보인다.
하지만 그 끝은 모두 죽음이다.
“이번에는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네. 우리 전보영에서 도와줄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최선을 다해서 돕도록 하지.”
“적랑대와 취화원만 부탁합니다.”
“그것뿐인가?”
“몇 가지나 들어주실 생각입니까?”
“몇 가지? 그렇게 많나? 쩝! 괜히 말했군. 그럼 하나만 더 들어주지. 부탁을 딱 하나만 한다면 뭘 하겠나?”
“내 주변 사람들이 곤란해지면 천하에 죽을죄를 지었어도 딱 한 번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전보영주가 눈빛을 빛냈다. 하지만 곧 대답했다.
“그러지.”
아걸이 전보영에 들린 것은 단지 장군가에서 벌어진 일을 말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일은 전보영도 곧 알게 된다. 시차도 크게 나지 않는다.
전보영에는 은거 무인들이 있다.
지금 한참 간자 사냥 중인데…… 사냥이 끝나면 같이 움직이기 위해서 왔다.
마침 키 작고 왜소한 사내가 성큼성큼 마당을 걸어와 집무실로 들어섰다.
“일도 일 같은 일이어야지. 이건 싱거워서.”
쌍겸이다. 쌍겸은 오랜만에 낫을 휘둘러서인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쌍겸은 아걸을 따르는 사람 중에는 가장 살인을 만끽한다.
“희한하군.”
전보영주가 쌍겸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뭐가 희한하다는 거야!”
쌍겸이 전보영주에게 눈을 부릅뜨며 쏘아붙였다.
쌍겸에게는 전보영주도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전보영의 수장이라고 해서 달리 보지 않는다. 전보영과 엮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전보영주는 쌍겸의 태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당신은 아걸과 어울리지 않을 사람인데, 아걸 곁에 있으니 희한하다는 거지.”
“크큿! 그 말은 맞아. 나도 그게 좀 희한해.”
쌍겸이 전보영주 말에 맞장구쳤다.
다른 사람들은 정도를 걷는다. 은거 전에도, 은거한 후에도 올바르게 살았다. 아걸과 다시 만난 지금도 정도를 추구하며 사마를 멀리한다.
반면에 쌍겸은 원래 마인이다. 살인을 즐기고 성격도 포악하다. 무공도 잔인하다. 병기조차도 낫이다. 찍어 죽이거나 살을 뜯어내는 병기이지 않나.
아걸과 어울리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킥킥킥!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그런 말을 얼굴 앞에서 해?”
쌍겸이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전보영주는 묘한 눈으로 아걸을 쳐다봤다.
아걸에게는 신비한 재능이 있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라고 할까?
대체로 살수들이라고 하면 모두 멀리한다. 끔찍하게 여긴다.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니 심성인들 얼마나 악독할까. 사람을 잡아먹는 인귀(人鬼)라고 할까?
그런데 취화원이나 적랑대는 그렇지 않다.
말도 안 되지만 그들은 살인을 통제한다. 살수문파이지만 정도인과 어울릴 수 있다.
쌍겸도 겉보기에는 무척 잔인하다. 그러나 쌍검의 난폭한 행동 속에는 착한 심성이 깃들어 있다. 살인을 즐기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죽이지 않는다.
살인을 절제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전보영주도 그런 점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느낀다. 그래서 쌍겸과도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다. 무례한 언사도 웃으면서 넘긴다.
아걸이 남들이 보지 못한 부분을 처음부터 봤다.
사람 보는 안목이 꽤 뛰어나다.
사람들이 아걸 곁에 모이는 것은 단지 칼이 강해서가 아니다. 마음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이 사람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지 못하게 만든다.
허도기와는 전혀 다른 재능이다.
“차 한잔하게.”
“난 차보다 술이 좋은데. 술 없나?”
쌍겸이 술을 찾기 위해서 주위를 돌아봤다.
전보영을 도왔던 은거 무인들이 한 명씩 돌아왔다.
승표의 달인인 황열도 오고, 변장술의 달인 한항(韓抗)도 왔다. 지당검 고사와 쾌검 나통도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제일 멀리 떨어진 곳, 제오총을 맡은 손승과 비석 장태전만 돌아오지 않았다.
“늦네.”
지당검 고사가 지루한 듯 중얼거렸다.
손승만 돌아오면 전보영을 나갈 생각이다. 솔직히 무인과 관청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분위기가 답답해서 숨이 막힌다.
그때다! 우당탕탕탕! 대문이 거칠게 열리며 관원이 뛰어들었다.
전보영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영주의 집무실인 줄 알면서 이토록 거칠게 뛰어드는 사람이 있나? 없다.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전쟁이 터져도 조용히 걸으라고 가르쳐 왔다.
전보영주는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 시끄러운 소리에 방해받는 걸 제일 싫어한다.
하지만 조용히 걸으라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발소리를 죽이면서 조용히 걷다 보면 이게 정말 급한 일인지 돌이켜 보게 된다.
본인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거다.
단지 보고만 하고 끝내지 말고, 보고하는 내용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깨달아 보라는 의미다.
지금 급하게 뛰어드는 자는 평소의 지시를 역행한다.
관원이 달음박질로 마당을 뛰어왔다. 그리고 집무실 앞에 이르자 급히 부복하며 말했다.
“영주님! 보고합니다!”
아주 다급한 음성이다.
“뭐냐? 뭔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전보영주가 미간을 찌푸린 채 질책했다.
“귀, 귀인. 귀인 중 한 분이…… 한 분이 당하셨습니다.”
순간, 집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랐다.
“뭐야!”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누가! 누가 당했다는 말이냐!”
“손승이라는 분이 당하셨습니다.”
관원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 쌍겸이 벼락같이 신형을 날려 관원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관원의 멱살을 와락 잡아서 끌어올렸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누가 당했다고?”
“손승이라는 분이…….”
“뭐야!”
쌍겸은 관원을 때려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곧 고개를 돌려 전보영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그렇게 강한 놈이 있었던 거야? 이 씨, 빌어먹을! 그렇게 강한 놈이 있었으면 미리 말해 줬어야지! 무림에서 굴러먹던 놈들이니 엿 먹으라는 거야!”
“음!”
전보영주는 쌍검이 상당히 거칠게 말했는데도 신음을 흘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
전보영에 월도의 달인인 손승을 상대할 만한 고수가 있었나? 없다. 그럴만한 고수는 단연코 없다. 아니, 있을 수도 있다. 무공을 숨긴 채 잠입해 있었다면 가능하다.
‘제오총 부총사가?’
영주는 제오총 부총사를 안다. 그는 무공을 수련한 무인이다. 하지만 손승을 상대할 만큼 강하지는 않다. 자신이 상대해도 너끈히 이길 수 있다.
전보영주의 머릿속이 한순간에 복잡해졌다.
쌍겸이 관원의 멱살을 마구 흔들며 말했다.
“그 새끼! 그 새끼 지금 어딨어! 손승을 죽인 새끼, 어디 있냐고! 내 이놈을 당장 찢어 죽여버릴 테니까. 어딨어! 말 안 해? 그놈 어딨어!”
“도, 돌아갔습니다. 귀인을 죽인 후에 바로.”
목줄을 잡힌 관원은 숨이 막히는지 컥컥거리면서 대답했다.
“네놈들은 그놈이 가는 것을 빤히 보고만 있었단 말이야! 막을 생각도 않고!”
“컥! 컥! 그, 그 사람…… 귀인을 죽인 사람이 전하라고 한 말이 있, 있습니다.”
멱살 잡힌 관원이 숨을 쉬지 못해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무슨 말! 빨리 말 못 해!”
“그 사람이 꼭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루에 한 명씩 죽인다. 이자처럼.”
그때 어느새 쌍겸 곁에 다가온 아걸이 멱살 잡은 손을 살며시 풀며 말했다.
“놓으세요. 몇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혹시 그자가 검을 썼습니까?”
“네? 네. 네. 검을 썼습니다.”
관원이 급히 대답했다.
“지금부터는 기억을 잘 떠올려 보세요. 그자가 검을 쓰는 거, 봤습니까?”
“네. 저, 정말 눈 깜빡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서.”
순간, 집무실에 모였던 사람들은 다시 놀랐다.
월도의 달인 손승을 단 일 검에 벤다? 그것도 검을 쓰는 것조차 보지 못할 정도로 빠르다?
그럴만한 사람은 허도기밖에 없다.
하루에 한 명씩 죽인다? 그 말도 오직 허도기만이 토해 낼 수 있다.
“다시 묻습니다. 그자가 손승과 싸울 때 검을 뽑은 상태였습니까, 아니면 검을 뽑지 않은 상태에서 결전을 벌였나요.”
“뽀, 뽑지 않은 상태에서.”
아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사람들을 쳐다봤다.
상대는 허도기다.
허도기가 직접 전보영까지 와서 손승을 죽이고 돌아갔다. 그리고 나머지도 모두 죽인다고 공언했다.
그토록 펄쩍 뛰던 쌍겸도 풀이 죽어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할 말이 없다. 상대가 허도기라면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복수를 해 주겠다는 말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아걸이 말했다.
“손승은 어디 있습니까?”
“일단 정혜원(淨慧院)으로 모셨습니다.”
“우리 의원(醫院)이네. 의술이 꽤 뛰어난 사람들이니 혹시 살았을지도 모르지. 내가 안내하겠네.”
전보영주가 아걸에게 말하며 앞장서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