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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260화 (260/600)

#260화. 第五十二章 폭우(暴雨)(5)

손승은 의원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청석 위에 손승이 누워 있다. 웃옷은 벗겨진 상태다. 상반신을 환히 드러낸 채 누워 있다.

심장에서 흘러내린 피는 이미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정확히 심장이 찔렸다.

검에 찔린 자국 같지 않다. 쇠꼬챙이 같은 작은 병기에 쿡 찔린 듯하다.

아주 작은 점 하나만 뚫려 있다.

검이 어긋남 없이 깨끗한 심장을 뚫었다가 빠져나갔다. 검이 들어오고 나가는데도 살이 이지러지지 않았다. 들어온 곳으로 나갔기 때문에 검흔도 작다.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들이 어떤 자와 마주쳤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진짜 강자, 천하제일무인 허도기가 자신들을 향해 검을 들었다.

그는 하루에 한 명씩 죽이겠다고 선포했다. 아걸을 비롯한 모든 사람을 일수에 죽일 수도 있지만, 하루에 한 명씩만 죽이겠단다. 가지고 놀겠다는 거다.

‘허도기와 싸운다. 어떻게?’

일초단검 허도기와 싸울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하얗게 빈다.

“제길! 사신과 만났군. 먼저 갔다고 억울해하지 마. 우리도 곧 따라갈 것 같으니까.”

황열이 손승의 차가운 손을 만지며 말했다.

‘모두 죽는다!’

아걸은 그렇게 판단한다.

허도기가 하루에 한 명씩 죽이겠다고 하면 그렇게 된다.

최대한 발악해 보겠다고 모두 한 자리에 뭉쳐 있어도 그는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한 명을 찌른 후에는 미련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 일이 칠 일간 반복된다.

아걸은 자신과 은거 무인들의 무공을 다 합쳐도 허도기 한 명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일곱 명이 연수 합공해도 한 명은 어김없이 죽을 것이다.

허도기의 순간적인 빠름은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

‘발검은 이미 신의 단계야. 발검과 동시에 죽음이 일어난다. 당할 수 없어.’

허도기의 무공은 이미 인간의 무공이 아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한 단계 앞서 나가고 있다. 그 경지가 어떤 것인지는 오직 도달해 본 사람만이 안다.

한 명씩 한 명씩 죽어 나간다. 그러면 칠 주야. 반철도가 허도기를 맞이하기까지 딱 칠 일 걸린다.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없어.’

아걸은 일어섰다.

밤이 늦었다. 벌써 해시(亥時:11시)를 넘어서고 있다. 달이 중천에 떠 있다.

손승만 돌아오면 전보영을 떠날 생각이었는데, 불가피하게 하룻밤을 더 신세 진다.

당장 내일 또 한 명이 죽는다.

허도기를 어떻게 상대할지 대책을 세워 놓고 전보영을 떠나야 한다. 괜히 개죽음을 당할 필요는 없으니까. 조금 답답하더라도 참아야 한다.

허도기가 자신만 노린다면 개의치 않고 나갔다. 하지만 허도기가 노리는 사람은 은거 무인들이다. 주변부터 정리하고, 자신은 맨 마지막 차례다.

오늘 하루는 손승 핑계를 대고 머물렀지만, 내일은 은거 무인들도 떠나려고 할 것이다.

방법을 찾으려면 날이 밝기 전에 찾아야 한다.

‘영주를 만나야겠군.’

아걸은 숙소를 나와 전보영주의 집무실로 걸어갔다.

“자지 않았나?”

“영주님께서는 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영주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전보영주는 원래 늦게 퇴청한다. 하지만 오늘은 퇴청이 더 늦다. 아예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다.

허도기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술 한잔하겠나?”

“아닙니다.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걸이 말했다.

전보영주가 무슨 부탁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내일 아침 식사에 백모초(白毛草)를 넣었으면 합니다. 여기 있을까요?”

“있지. 전보영에 백모초가 없다면 말이 안 되지. 사실 백모초보다 약효가 훨씬 강한 흑섬유(黑蟾油)도 있네만.”

전보영주가 아걸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백모초는 하얀 털이 수북이 자란 풀로 마취 성분이 강하다. 주로 불한당이 여인을 납치할 때 사용한다. 백모초 끓인 물을 수건에 적셔서 코와 입을 틀어막으면 정신이 뚝 떨어진다.

인체에 해는 없다. 다만 신경이 마취되어서 혼절할 뿐이다.

흑섬유는 검은 두꺼비의 기름이다. 약성은 백모초보다 훨씬 강하면서 부드럽다. 마취에서 깨어날 때 머리가 아프지 않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일어날 수 있다.

당연히 매우 비싸다. 백모초도 구하기 어렵지만, 흑섬유는 더 어렵다.

“제가 허도기를 상대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

“애먼 사람은 죽을 필요가 없죠.”

전보영주가 눈빛을 빛냈다.

아걸의 뜻을 알겠다. 왜 백모초를 식사에 사용하라고 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래도 괜찮겠나?”

“대략 한 달 정도만 가뒀으면 합니다.”

“허도기가 이곳을 들이칠 수도 있는데?”

“그러지 못할 겁니다. 오늘은 허도기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그렇게 들어섰지만, 내일은 용모파기를 모두에게 회람시킬 것 아닙니까? 관(官)에서 떠날 생각이라면 모를까, 이곳을 쳐서 상소 거리를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회람까지 생각했나?”

사실이다. 탁호는 공부의 용모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해서 화상을 그리는 중이다. 아마도 내일이 지나갈 무렵이면 전보영 모든 관원이 공부를 알아볼 것이다.

허도기는 두 번 다시 전보영으로 들어서지 못한다. 허도기 무공이라면 얼마든지 침입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

또 아걸이 밖에 있다면 굳이 전보영 안에 있는 은거 무인을 죽이기 위해서 침투하는 허튼짓은 하지 않는다. 아걸의 뜻을 알고 아걸을 죽이기 위해서 다가갈 것이다.

지금 허도기는 무엇보다도 아걸을 죽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아걸을 죽이는 김에 은거 무인도 죽인다는 것일 뿐, 허도기의 목표는 아걸이다.

아걸이 말했다.

“무공으로는 저들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저 사람들이 화를 내면 상당히 거칠 거예요.”

“걱정하지 말게. 여기 튼튼한 지하 뇌옥이 있어. 안에 가둬 놓고 사지를 쇠밧줄로 묶으면 천하에 어떤 자도 빠져나가지 못해. 거기다 매일 산공독(散功毒)을 투여하면 힘을 쓸 수가 없지. 한 달 정도는 붙잡아 놓을 수 있네.”

“그렇게 해 주십시오.”

“이게 정말 자네가 바라는 바인가?”

“부탁드립니다.”

“알았네.”

전보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영주도 은거 무인들이 이렇게 죽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걸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방해만 된다.

아걸이 말했다.

“그리고 손승 형님의 시신을 방부 처리해서 관에 넣어 주세요.”

“그건 왜?”

“검흔을 자세히 살펴봐야겠습니다. 한 번 보는 것과 여러 번 보는 것은 분명히 다를 것 같아서. 같이 다니면서 틈이 날 때마다 보려고 합니다.”

“시신을 가지고 다닌다? 기문이 되겠군.”

“목관에 넣어서 우마차에 실어 주세요.”

“우마차? 하필이면 왜? 여기서 나가면 내일 당장 허도기가 들이닥칠 텐데, 우마차로 괜찮겠어?”

전보영주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걸은 피식 웃었다. 괜찮다는 표정이다.

“음! 자네 뜻대로 하지.”

전보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걸은 은거 무인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손승이 죽어서인지 분위기가 상당히 침울하다. 그것보다 오늘 당장 누군가 한 명이 허도기 손에 죽을 것이다.

허도기에게 자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 모두 죽은 손승을 이긴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그런데 손승이 죽었다. 자신들 역시 죽을 게 뻔하다.

지금 먹는 아침 식사가 마지막 식사일 수도 있다.

“형님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아걸이 말했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꼭 유언 같잖아!”

쌍검이 툭 쏘아붙였다.

“거참! 사람이 고맙다고 말하면 그냥 그런 줄 알고 듣지! 꼭 그렇게 쏘아붙여야 직성이 풀리나?”

아걸이 대뜸 말투를 바꿔서 말했다.

“하하하!”

나통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걸이 활기찬 음성으로 말했다.

“자! 기운들 내고요. 일단 다 같이 붙어 다니는 거로 하죠. 밥을 먹을 때도 뒷간을 갈 때도. 허도기가 오면 즉시 연수 합공하는 것으로. 식사 끝나면 숙소에서 좀 쉬시다가, 이따 사시(巳時:오전 10시)가 되면 나가죠.”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나? 나갈 것 같으면 바로 나가지. 소화는 가면서 시켜도 돼.”

한항이 말했다.

“맞아. 여긴 답답해.”

장태전도 덧붙였다.

아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조 장군님이 약을 보내온다고 해서요. 아주 효과가 뛰어난 금창약하고 진기를 폭증시키는 독약하고. 일단 둘 다 달라고 했어요. 필요할 것 같아서.”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지당검 고사가 수저를 놓았다.

“왜 더 드시지 않고?”

“밥맛이 있어야지. 이것도 오늘 싸워야 하니까 억지로 먹어 둔 거야. 힘을 못 쓰면 안 되잖아.”

고사는 밥을 반 공기밖에 먹지 않았다.

고사 말이 맞는다. 모두 입맛이 없다. 그나마 오늘 허도기와 싸워야 해서 억지로 쑤셔 넣는 중이다.

아걸만 다르다. 아걸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자! 그럼 숙소에 가서 편히 쉬고 계세요. 이따가 약이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아걸이 은거 무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흑섬유는 약효가 뛰어나다.

무색무취무미(無色無臭無味),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어서 방비하지도 못한다.

또 흑섬유는 흔적도 남지 않는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했을 때처럼 졸음이 슬며시 일어난다. 내가 피곤한가? 하고 느낄 정도다. 하지만 그 정도의 느낌을 받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정신이 똑 떨어진다.

아걸은 한 명, 한 명…… 들것에 실려 나오는 사람들을 봤다.

쌍겸이 들려 나오고, 지당검도 축 늘어 친 채 실려 나온다.

은거 무인들은 모두 전보영주가 말한 지하 뇌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손발에 쇠사슬이 채워질 것이고, 매일 산공독을 투여받으면서 한 달을 보내게 된다.

물론, 정신이 들면 전보영주가 사실을 말해 줄 것이다.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면 은거 무인들은 분노하고 화내고 온갖 욕을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달 동안은 풀려나지 못한다. 영주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정말 괜찮겠나?”

영주가 다시 물었다.

“괜찮습니다. 형님은?”

“우마차는 입구에 대기시켜 놨네. 방부 처리는 말끔히 했고 상처는 깨끗이 닦아 놨네. 앞으로 두어 달은 부패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날이 더워서.”

“감사합니다.”

“취화원에는 뭐라고 하지?”

“비밀로 해 주세요.”

“비밀? 이게 비밀이 되나?”

“손승 형님이 죽은 일부터 전보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말하지 말아 주세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다른 곳은 몰라도 취화원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부터 제 곁에 모여드는 모든 사람이 허도기 표적입니다. 제 곁에 천 명이 있으면 저는 천일 후에 죽습니다. 만 명이 있으면 만일 후에 죽습니다.”

“음!”

“허도기는 제 곁에 모인 사람을 한 명씩 죽일 겁니다. 누가 됐든. 누구도 막지 못할 검이라면 차라리 모두 물리는 게 낫습니다. 어떻게든 제가 승부를 내 보죠.”

“그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이거나 가져가게.”

전보영주가 한눈에 봐도 보도로 보이는 칼을 건넸다.

“우리 전보영에서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보물이지. 쇠를 무처럼 자르는 칼이야. 자네가 가진 녹슨 칼보다는 그래도 이게 낫지 않겠나 싶네만”

“저는 이 칼이 좋습니다.”

아걸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삼이 만들어준 칼은 투박하다. 하지만 매우 강하다. 어떤 강병도 막아 낼 수가 있다. 그것 하나만은 확신한다.

“그럼 이 칼은 이미 꺼낸 김에 취화원으로 보내도록 하지.”

“아뇨. 어떤 특별한 행동도 하지 말아 주세요. 몽설은 눈치가 굉장히 빠르거든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처럼 태연하게. 안 그러면 눈치챌 겁니다.”

끄덕! 끄덕!

전보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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