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第五十三章 서전(緖戰)(1)
깔끔한 전보영 정문 앞에 시골 농군이 농사지을 때 사용하는 우마차가 준비되어 있다.
소 한 마리, 허름한 수레, 그리고 수레 위에 올려진 목관.
목관은 흔들리지 않게 새끼줄로 묶여 있다.
원래 관이라는 것이 어느 곳을 가더라고 한눈에 확 들어온다. 그만큼 기피 대상이다. 목관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관이 지닌 상징성이 목관을 멀리하게 만든다.
아걸은 수레에 앉아 고삐를 잡았다.
“워!”
고삐를 살짝 흔들자, 소가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삐걱! 삐걱!
소가 걸을 때마다 수레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마중 나온 사람은 없다.
아걸이 요구한 대로 전보영도 이 순간부터는 완전히 손을 떼고 물러난다.
그렇다고 감시까지 떨치지는 못한다.
전보영을 비롯한 취화원, 적랑대의 눈길이 항상 아걸을 주시할 것이다.
또 다른 눈길도 따라붙는다.
허도기 역시 아걸을 주시하고 있다. 그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아걸 앞에 불쑥 나타날 수는 없다. 허도기는 신경 쓰지 않겠지만 휘하 수하들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삐걱! 삐걱! 삐걱!
관 실은 수레가 느리게 나아갔다.
아걸은 자신도 모르게 고삐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절대 강적, 허도기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목숨을 건 생사 결전이다.
칼과 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제 조위 장군이나 전보영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토록 바라던 일, 허도기가 무림으로 나왔다. 더욱이 허도기가 자신을 노린다.
허도기는 계속 발목을 잡는 무림부터 정리할 생각이다.
누가 봐도 이 생각이 맞는다. 또 무림은 정비하기가 쉽다. 허도기는 이미 말 한마디로 수십 문파를 움직일 수 있는 절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허도기의 무림 복귀는 중원 무림 전체가 아걸의 적으로 돌아섰다는 말과도 같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됐는데, 인제 어떻게 싸운다? 좋아! 해보는 거지, 뭐!’
아걸은 마음을 편하게 가지며 하늘을 쳐다봤다.
눈앞에 흥왕교(興旺橋)가 나타났다.
남쪽에서 오는 사람은 흥왕교를 건너지 않고는 금릉으로 들어설 수 없다고 할 만큼 이용이 많은 다리다.
반대로 이 다리를 건너면 금릉을 벗어난다.
“워!”
아걸은 소를 멈추고 수레에서 내렸다.
길을 오가던 많은 사람이 아걸을 쳐다봤다.
우마차에 관을 싣고 가는 모습은 시골 촌구석에나 볼 수 있다. 금릉처럼 번화한 도읍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더욱이 아걸은 무인이다.
상당히 기괴한 모습인 것만은 틀림없다.
아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흥왕교’라고 쓰인 입석 앞으로 갔다.
숯을 꺼내서 그림을 그렸다.
돌비석 전후좌우, 사면에 각기 다른 네 가지 도형을 그렸다.
한눈에 봐도 어떤 문파에 보내는 밀마가 틀림없다. 하지만 아걸의 밀마는 너무 노골적이다. 밀마라면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 은밀히 적어 놓기 마련인데, 아걸은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공공연한 장소에 버젓이 그려 놓는다.
물론 밀마를 모르는 사람은 해독할 수 없다. 밀마라는 것은 알지만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지 못한다.
“무슨 문파예요?”
지나가는 길손이 궁금해서 물어 왔다.
“훗!”
아걸을 길손을 향해 빙긋이 웃어 주었다.
아걸의 태도로 보면 중요한 밀마는 아닌 것 같다. 그저 안부 정도 전하는 밀마처럼 보인다.
“개방(丐幫) 밀마는 많이 봤는데, 이건 너무 특이해서.”
길손이 밀마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걸은 빙긋 웃어 보인 후, 다시 수레에 올랐다.
“이럇!”
소가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취운은 폐허가 된 산신각에서 간자가 숨겨 놓은 서신을 찾아냈다.
한성에서 빠져나와 낯선 곳으로 향하는 중이라 모든 소식을 인력에 의존한다. 이런 식으로 직접 서신을 주고받지 않으면 소식을 전달할 방법이 없다.
서신에는 도형 네 개가 그려져 있었다.
아걸이 흥왕교 입석에 그려 놓은 밀마와 똑같은 모습이다.
취운은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려 놓고, 동그라미를 사선으로 쭉 그은 그림에 주목했다.
“이건 따라오는 자는 모두 죽인다는 건데?”
살수는 때때로 아주 급하게 추격당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뒤쫓아 오는 자를 무조건 죽인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가릴 여유가 없다. 이상하다 싶으면 죽이고 본다.
그럴 때 사용하는 밀마다.
‘이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
취운은 혼자서 결정하지 못하고 즉시 몽설에게 달려갔다.
“어떻게 할까요?”
“쫓아오는 사람은 모두 죽인다고?”
“네. ”
“그럼 쫓지 말아야지. 쫓아오면 죽인다잖아. ”
“그럼 저희는 깜깜이가 되는데요? 앞으로 상군(上君)을 지켜보지 못해요. ”
취운은 아걸을 상군이라고 호칭했다.
원주의 남편이니 상군이다. 아직 혼인한 것은 아니지만 취화원 모든 살수가 상군으로 인정했다.
“동형에 네 개잖아. ”
“네. “하나는 우리 거고, 하나는 적랑대. 또 하나는 전보영 것으로 보이는데, 나머지 하나는 모르겠어요. ”
취운이 말했다.
아걸은 결코 사회적인 사람이 못 된다. 인간관계가 매우 한정적이다. 인사를 나눌만한 사람조차도 별로 없다. 이번에 은거 무인들을 대거 만난 게 아마도 아걸 일생에서 자발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난 사건일 것이다.
그러니 아걸이 어떤 문파를 알게 되었다면 취화원이 모를 수 없다.
“이거 두 개는 우리 것과 내용이 같아. 보기만 해도 느낌이 좋지 않잖아.”
몽설이 그림 두 개를 옆으로 밀쳐놨다.
남은 그림은 꽃이다. 꽃 한 송이가 꼿꼿하게 서 있다. 꽃은 대체로 아름다움, 봄 등등 활기찬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희망으로 상징으로 표현된다.
지금 아걸 상황에서 희망?
몽설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이건 가짜야. 누군가를 헷갈리게 만드는 거야. ”
몽설이 꽃 그림을 치웠다.
“누군가라면?”
“허도기겠지? 뒤쫓는 건 중지시켜. 아걸은 죽인다면 죽여. 아걸을 뒤쫓으려면 언니나 내가 직접 추적해야 해. 설마 우리도 죽일까? 호호!”
몽설이 농담까지 곁들였다.
추격하는 사람은 앞뒤 살피지 않고, 상황 따지지 않고 무조건 죽이겠다.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아걸을 이렇게 핍박하나? 어떤 일이 아걸로 하여금 무작정 칼을 쓰게 만드나?
마음 같아서는 단숨에 쫓아가고 싶다.
“추격 중지.”
몽설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일단은 그렇게 하죠.”
취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언니. 어젯밤에 전보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 줘.”
“허도기 수족을 잘라 낸 일요?”
“아니, 그 일 말고 다른 일이 있었던 것 같아. ”
“아무 보고는 없었는데……”
취운이 말끝을 흐렸다.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었어. 은거 무인들이 전보영에 남고 오빠 혼자 수레를 타고 나와? 수레에 실린 관은 뭐지? 왜 그냥 마차도 아니고 우마차야.”
“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모르는 게 많네요.”
취운도 이상한 기미를 눈치챘다.
“정동무인이 장군가와 전보영을 기습한 사건만 있었던 게 아니야. 다른 게 또 있어.”
“최대한 알아보겠는데, 전보영은 우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서. 시간 좀 걸릴 거예요. ”
“꼭 알아봐 줘. 언니. ”
몽설이 취운을 보며 말했다.
* * *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줄 네 개가 있다.
안에 있는 막대기 두 개는 밑에서 이어지고, 가장자리에 있는 막대기 두 개는 위에서 이어진다.
이상한 그림이다. 무슨 그림인지 전혀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말발굽에 박는 편자 그림 같기도 하다. 작은 편자가 큰 편자에게 들어가 있다. 작은 그릇을 큰 그릇이 덮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고.
“아걸에게 몇 명이나 붙였지?”
“이조(二組)입니다.”
“모두 물려.”
적랑대주 임지정 빠르게 결단했다.
아걸이 적랑대 밀마를 보내왔다.
아걸은 아삼과 평생을 같이 살아왔다. 적랑대 밀마라면 누구보다도 소상히 잘 알고 있다. 또 적랑대가 어떤 식으로 뒤를 밟고 있는지도 안다.
모든 걸 다 알면서도 뒤를 쫓는 자는 죽인다고 한다.
이것저것 자세히 사정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매우 급한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랑대는 현재 무림에서 아걸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안다.
아걸의 생사존망이 바로 무림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도 이조 이십 명을 투입했다. 웬만큼 큰 일라고 해도 반 조 다섯 명을 투입하는데, 아걸에게는 조장 두 명이 서로 협조해서 뒤따르라고 지시했다.
그들을 모두 물린다.
“전보영은?”
“어제 오후부터 소식이 차단되었습니다.”
“차단?”
“네. ”
“우린 눈이 막혔다는 건가? 이건 말이 안 되는데?”
“막혔습니다.”
“음!”
임지정은 침음했다.
적랑대의 눈이 막혔다는 말은 모든 관원이 입을 다물었다는 뜻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입을 여는 자는 참형에 처하는 일급 함구령이 내렸을 것이다.
굉장히 강력한 차단 장치다.
“쉽게 알아낼 수는 없겠지만, 전보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계속 알아보고. 추격은 물린다. 미련 갖지 말고 모두 물려. 쫓아가면 죽는다. 그리고 전주(前主)께도 이 사실을 알려드리고. 하! 그 노인네. 또 못난 놈 소리깨나 하시겠군. 하하!”
임지정이 웃었다.
임지정의 마음을 절대 편치 않았다.
아걸이 앞뒤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겠다고 공언했을 때는 굉장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마도 무림이 발칵 뒤집힐 만큼 큰 사건일 것 같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인데 정작 중요할 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거야.’
임지정은 뒷짐을 지고 마당을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자꾸 걷다 보면 생각날 때가 있지만 오늘은 아무리 걸어도 생각이 나지 않을 것 같다. 기본적인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 무엇을 할 수가 있겠나.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 * *
전보영의 밀마는 다소 복잡하다.
나무 상자 두 개가 그려져 있다. 밑에 그린 상자는 과일을 담는 과일 상자이고 위에 덮은 것은 생선을 담는 상자다. 크기와 모양이 확연히 다르다.
“그래?”
전보영주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런 일을 예상했다.
과일 위에 썩은 생선을 놓으면 과일까지 부패한다. 그 부패는 막을 수 없다. 썩은 생선을 빨리 치워도 과일에 냄새가 밴 것 같아서 먹기 싫어진다.
이것은 비교적 은유적인 표현인데, 전보영에서는 척살을 의미한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눈, 쥐새끼 서랑(鼠狼)을 척살할 때 쓰인 적이 있다.
아걸의 뒤를 쫓기는 했지만, 아걸이 이렇게 하리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밀마가 네 개라고?”
“네. 취화원. 적랑대. 우리. 또 하나는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데도 있었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쪽 밀만은 조금 다릅니다.”
“달라?”
“네. 꽃이 그려져 있습니다.”
“꽃…….”
‘우리가 모르는 곳이 있을 리 없지. 이건 거짓 정보야. 공부를 속일 계획이군.’
전보영주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