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第五十三章 서전(緖戰)(5)
“이거 참 곤란하게 됐네. 야천을 건드렸단 말이지?”
흑후가 중얼거렸다.
“이건 정식으로 건드린 것이니 답변도 확실하게 해 줘야 할 사안이라는 거지. 이래서 호랑이는 등에 태우는 게 아니라니까, 노인네들이 말을 안 들어.”
흑후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허도기가 야천을 향해서 태도를 분명히 밝히라고 말했다.
이건 분명히 경고다.
이제 더는 지금처럼 두리뭉실하게 지낼 수 없다. 확실하게 허도기 밑으로 기어들어 가거나 아니면 성검문이 이끄는 중원 무림을 상대로 전쟁을 치러야 한다.
이 말이 다른 사람에게서 나왔다면 ‘별 미친놈 다 있네’ 하고 흘려버렸을 것이다. 누가 감히 야천을 상대로 전쟁 운운하면서 협박할 수 있나.
하지만 불행히도 허도기 입에서 나왔다.
“일단 뭐 귀로 들은 것이니 전하긴 하지만…… 이거, 이 자리도 오래 있을 자리가 아니네. 꿀 빠는 자리인 건 분명한데, 자칫하면 목숨이 간당간당하겠어. 빨리 튀든가 해야지. 오래 버티고 앉아 있을 자리는 아냐.”
흑후는 붓을 들어서 허도기가 말한 내용을 적었다.
“야!”
“네.”
서목(鼠目)이 대답했다.
서목은 쥐새끼 눈이라는 뜻이다. 눈이 정말 깨알만 해서 지마(芝麻:참깨)라고도 불린다.
서목의 장점은 기민함과 약삭빠름이다.
의리도 깊고 강단도 있어서 흑후가 옆에 두고 중요한 심부름을 시키곤 한다.
“야천 좀 다녀와. 이거 받으면 그 늙은이들, 골치깨나 아플 거야. 킥킥!”
흑후가 서신을 건네주었다.
“네. 빨리 전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럴 거 없어. 천천히 갔다 와.”
“네?”
“빨리 가면 그 늙은이들 골치만 아프지 뭐. 천천히, 천천히 다녀와. 쉬엄쉬엄.”
“아, 예예예.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습죠.”
서목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흑후의 생각을 읽었다.
생각할 시간을 많이 줘야 한다.
화살처럼 날아간다. 하지만 천천히 가는 것이다.
야천에서 충분히 숙의한 후에 해답을 내놓을 때까지 계속 가는 중이 될 것이다. 중간에 도둑도 맞고, 다리도 분질러지고, 배앓이도 하고……
그러다가 허도기가 눈 한 번 부릅뜨면 그제야 도착해서 답을 내놓는다.
“저저, 잔머리. 가 봐.”
흑후가 서목의 속내를 안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아걸이 나타났습니다.”
“뭐?”
흑후는 느닷없는 보고에 눈을 부릅떴다.
“아걸이 나타났다는 보고입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잘못 듣지 않았다. 확실히 아걸이 나타났다는 보고다.
“뭐? 벌써? 그럴 리가 없는데? 그놈이 왜 나타나?”
흑후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말했다.
자신이 추혼삼마의 시신을 수습해 온 지 겨우 한 시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막 허도기를 꼬드겨서 성검문으로 보내고, 야천에 편지를 쓰고 돌아서는 길이다.
“아걸이 확실해?”
“확실합니다.”
“이거 미친놈 아냐?”
흑후는 아걸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
“놈이 어딨는데?”
“제십이 구역에 있습니다.”
“여전히 그 모습이야? 마차 타고 그거. 끼랴끼랴!”
“네.”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그놈 추격하고 있지?”
“네.”
“이번에는 놓치지 마!”
“네.”
“아냐. 내가 직접 가서 봐야겠어. 가자!”
“공부님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너 뒈지고 싶어! 어디서 주둥이를 나불거리고 있어! 인마! 이런 거 괜히 말했다가 또 헛걸음질하면 어쩔래? 네가 감당할래? 너 이 새끼, 나 죽일 일 있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말! 말 가져와!”
흑후가 서둘렀다.
흑후는 한달음에 십이 구역에 도착했다.
“우마차를 봤다고!”
흑후가 다짜고짜 십이 구역 분장(分長)을 다그쳤다.
“네.”
“지금 어딨어?”
“사라졌습니다.”
“뭐?”
흑후는 멍해졌다.
이게 무슨 귀신 놀음인가. 방금 봤다면서 금방 놓쳤다고? 이게 말이야, 된장이야.
“그놈을 잘 주시하고 있으랬잖아!”
“주시는 했는데 저희 영역을 벗어나서.”
분장이 억울하다는 듯 눈을 말똥말똥 뜨고 말했다.
“음!”
흑후는 침음했다.
이게 전역망의 단점이다. 등불이 비치는 곳에 들어오면 지켜볼 수 있다. 하지만 등불이 비치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역으로 들어가면 찾지 못한다.
물론 등불이라고 해서 완전히 고정된 것은 아니다. 아주 약간씩 움직인다.
하지만 그 움직이는 범위라고 해 봤자 동네 마실가는 정도에 불과하다. 고작 십 장, 이십 장 정도 뒤쫓다가는 멈춰 버린다. 더 쫓으면 의심을 산다.
그러니 작심하고 어둠으로 들어가는 자는 놓치게 된다.
“최종적으로 발견된 데가 어디야?”
“삼아촌(三牙村)입니다.”
“가자!”
흑후는 아걸을 최종적으로 봤다는 삼아촌으로 달려갔다.
삼아촌은 평범한 시골 마을이다.
오른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왼쪽에 언덕을 기대서 농가 서너 채가 있다.
농가 중 하나가 등불이다.
흑후가 도착하자 농부가 밭일을 하다가 허리를 펴며 살짝 눈인사했다.
“놈은?”
“산으로 갔습니다.”
“우마차를 몰고?”
“네.”
“여기 우마차가 다닐 만큼 큰 길이 있나? 산길치고는 상당히 커야 하는데?”
“길은 없고 묵혀 놓은 밭이 조금 있죠.”
농부가 말했다.
“묵힌 밭? 가 보자.”
흑후가 농부를 앞세웠다.
사실은 농부를 앞세울 필요도 없었다.
땅을 보면 우마차 지나간 자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땅이 푹푹 꺼지는 진흙밭이라서 수레바퀴 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다. 더욱이 수레는 지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는다.
‘이거 추격할 수 있겠는데?’
흑후는 바퀴 자국을 보며 눈빛을 빛내다가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추격자는 추격에 휘둘리면 안 된다. 조그만 단서에 정신없이 매달리다가는 곧 함정에 빠진다.
자신이 지금 그러고 있다.
아걸이 어떤 놈인데 이런 자국이 남는 걸 모르겠나. 이 자국을 보고 뒤쫓아 가면 죽는다.
‘이미 방비하고 있을 텐데. 후후!’
잠시 후, 흑후는 농부와 함께 묵혀 놓은 밭에 도착했다.
“아!”
묵힌 밭을 보자, 흑후는 손을 들어서 자신의 이마를 찰싹 쳤다.
이거 묵혀 놓은 밭이 아니다. 길이다. 망가지고 황폐해졌지만, 분명히 길이다. 세월이 오래 지나서 나무가 자라고 덩굴이 얽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중간중간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길이다.
폭이 그렇게 넓지는 않다. 우마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다. 어른 두 명이 나란히 서서 걸으면 폭이 꽉 찬다. 그러니 길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이놈 이거…… 묘한 길로 다니네? 분명히 저 위로 가면 암반일 테고.”
흑후가 산 중턱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걸은 추격하기 어려운 길로 다닌다. 지금처럼 눈 감고도 쫓아갈 수 있는 지형이 있는가 하면, 암반 지형이라서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곳으로도 다닌다.
하지만 아주 귀중한 단서를 얻었다.
놈이 이상한 길을 이용하고 있다.
인근 주민도 잘 모르는 길!
아걸은 어떻게 이런 길을 알았을까? 여기에 이런 길이 있다는 것을 언제부터 알았나?
“이거 묵힌 밭이 아니라 길이잖아?”
“길이요?”
농부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흑후를 쳐다봤다. 무슨 말이냐는 듯이.
“알았어. 알았어.”
흑후는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길을 쳐다봤다.
농부는 이곳에 정착한 자 얼마 되지 않아서 등불이 되었다. 그러니 길을 모를 수도 있다.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이곳에 길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미가 없다.
이미 이상한 길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야!”
“예!”
흑후를 곁에서 모시는 사내 네 명이 일제히 대답했다.
흑후는 항상 칼받이로 네 명을 데리고 다닌다. 동행할 사람이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니다. 출타할 때, ‘너! 너! 너! 너!’ 이렇게 네 명을 찍어서 데리고 나온다.
만약 그가 감당하지 못할 고수를 만나면 네 명이 목숨을 던져서 시간을 벌어 준다. 물론 흑후가 화가 났을 때는 화풀이 대상도 된다. 팔 하나 잘리거나 아니면 죽는 수도 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하고,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어야 하며 묻는 말에는 즉시 대답해야 한다.
“가서 지도를 찾아. 사람들이 모르는 지도야. 분명히 이 길이 그려진 지도가 있을 거야. 지도를 찾지 못해도 이 길이 어떤 길인지는 찾아내!”
“네!”
네 명이 일제히 대답했다.
“내가 정확히 반 시진 있다가 뒤따라갈 건데, 그때까지 찾아놔. 안 그러면 네놈들, 죽는다!”
흑후는 죽인다는 말을 장난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굉장히 무슨 말이 무서운 말이다. 흑후는 정말로 죽인다.
“넷!”
쉬이잇! 쉬잇!
사내 네 명이 일제히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흑후가 수하에게 하지 못할 일을 시킨 것이 아니다. 약간만 신경 쓰고, 약간만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을 시켰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길을 아는 자!
이자만 찾으면 된다. 그리고 그런 자를 찾기는 쉽다.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산길이 있는데, 너 알아?”
한 사람에게만 물어보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곧바로 다음 사람에게 묻고, 그 사람은 다음 사람에게 묻고, 쭉쭉 가지 치듯이 물음이 번져 나간다.
그 물음이 사십칠 구역 일만이천 명에게 퍼지는 데는 그야말로 잠깐이다.
그중에 혹시 아는 자가 있으면 다시 역순으로 보고되어 온다.
정확하게 지도를 찾는다거나, 길을 찾지는 못하지만 누가 이 길을 아는지는 알 수는 있다.
솔직히 반 시진 가지고는 조금 부족하다. 대략 반나절 정도는 시간이 소요된다.
흑후가 그런 점을 모르지는 않는다. 넉넉히 반나절 정도는 여유를 줄 생각이다.
그동안 흑후는 길 아닌 길의 형태를 살폈다.
추혼삼마가 죽은 길도 이런 길이었다. 확실히 아걸은 이런 길을 알고 있다.
그런데 추혼삼마 중 마지막에 죽은 자는 낭떠러지 앞에서 죽었다. 추혼삼마가 죽은 길은 일부러 낭떠러지를 향해서 낸 길이었다. 도대체 누가 낭떠러지를 향해서 길을 냈을까?
의문이 풀리지는 않고 쌓이기만 한다.
‘누가 뭐 하러 이런 길을 냈지? 이건 분명히 한두 사람이 낸 길이 아니야.’
“어! 어!”
흑후는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서 신음 비슷한 소리를 흘렸다.
많은 사람을 동원돼서 길을 냈다면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죄수들을 동원하는 것이다. 죄수를 동원해서 길을 낼 때는 주로 생색내기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관도를 뚫는다. 여기처럼 은밀한 길을 내지는 않는다.
또 하나는 관청에서 이런 길을 낼 수가 있다.
관청에서 민심을 달랠 목적으로 일을 시키고 쌀을 배급해 줄 때가 있다.
그럴 때 이것처럼 엉뚱한 일을 시킨다.
아무 필요도 없는 일을 시켜서 노동력을 빼앗고 그 대가로 쌀을 배급해 준다.
그런데 이건 아닌 것 같다.
추혼삼마가 죽은 곳과 삼아촌은 거리가 꽤 벌어진다. 관청이 중첩되지 않는다.
금릉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런 공사를 벌였다. 그런데 죄수를 동원한 것도 관청에서 일을 시킨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흑후는 비로소 짚이는 바가 있었다.
군도!
“이거 군도야!”
흑후는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게 들어맞는다.
아걸이 전보영에서 나온 이후 이 길을 이용했다. 전보영에서 군도를 알았다.
“킥킥! 군도였던 거야?”
흑후는 풀 덮인 길을 보면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