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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266화 (266/600)

#266화. 第五十四章 야천(夜天)(1)

아걸은 움푹 들어간 바위 밑에 마른 풀을 깔고 누웠다.

편안하다.

할배와 함께 중원을 떠돌면서 노숙이나 야숙은 질릴 만큼 많이 경험했다.

나중에 크면 꼭 푹신한 침상에서만 잠자야지.

어렸을 때 꿈은 딱 그것 하나였다. 매우 단순했지만 좀처럼 이룰 수 없을 만큼 멀어 보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야숙을 하는데, 뜻밖에도 편안하다.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와 모닥불도 지폈다. 불빛이 사방으로 번져 나가겠지만 개의치 않는다. 저들도 무모하지는 않다. 자신을 찾아내도 지켜보기만 할 뿐, 공격해 오지 않는다.

“후후후!”

아걸을 피식피식 웃었다.

지금 가까운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다. 자신이 아는 사람들…… 그들 모두 화를 내고 있다. 몽설부터 해서 은거 무인들까지 이를 갈면서 욕을 해 댈 것이다.

그런데 귀가 간지럽지는 않다.

아걸은 그들을 생각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밤이 깊었다.

모닥불은 꺼진 지 오래되었다. 불씨조차 남아 있지 않고 새카만 재만 보인다.

탁! 탁!

아걸은 다시 불을 피웠다.

횃불을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늦었어도 할 일이 있다.

아걸을 횃불을 들고 수레로 갔다.

‘형님, 미안합니다.’

아걸은 목관 뚜껑을 열고 잠자듯이 누워 있는 손승에게 묵념을 보냈다.

이제부터 손승의 시신에 새겨져 있는 검흔을 살핀다.

아걸은 수레를 끌고 오면서 매 시진마다 목관을 열고 검흔을 살펴봤다.

허도기의 검을 알아야 한다.

부패는 모든 상처를 말끔하게 지워 버린다.

칼에 맞은 상처, 몽둥이에 맞은 상처, 도끼에 맞은 상처까지 말끔하게 지워 버린다.

부패가 진행되면 사인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방부 처리를 했다. 완전히 방부 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검흔이 뚜렷해진다.

검이 들어간 깊이를 매번 살핀다.

찌를 때와 빠져나올 때의 흐름을 자세히 관찰한다.

물론 이 정도는 처음 보자마자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말을 해 주기 때문에 계속 지켜본다. 특히 살결의 일그러짐 같은 것은 뚜렷하게 보인다.

며칠이고 계속 지켜보다가 더 변화가 없으면 그때는 손승을 편히 쉬게 해 줄 참이다.

손승도 아직은 계속 말을 해 주고 있다.

‘찌르는 검! 베는 검이 아니라 찌르는 검이야.’

당연하다. 이 정도는 무공을 모르는 어린아이도 안다. 심장이 꿰뚫렸는데 찌르는 검이지 베는 검일까. 찌르는 검에 죽었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는 말인가?

‘발검과 동시에 즉사. 대체로 이런 검은 베는 검이어야 하는 데 찌르는 검. 이미 베는 검을 넘어선 거야.’

허도기는 손승 같은 고수를 앞에 두고도 베는 검을 버리고 찌르는 검을 펼쳤다.

그만큼, 아니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아걸이 손승의 상처에서 발견한 것은 허도기의 여유다.

막연하게 발검이 빨라서 당했다고 말할 수 없다. 사실, 허도기가 죽을힘을 다해서 발검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여유 있게 웃으면서 검을 뽑았을 것 같다.

아걸은 손승을 죽이고도 여유가 남아 있는 힘을 느꼈다.

그것이 허도기의 여유다.

‘난 아직 멀었어.’

손승은 허도기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계속 말해 준다. 검흔을 볼 때마다 말한다.

자신이 이런 검을 맞이할 수 있을까?

아걸은 횃불을 놓고 나무 앞에 섰다.

쒜에엑! 퍼억!

가장 자신 있는 칼을 쳐 냈다.

나무에 칼이 박힌다.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박힌다.

자신은 최대한 빠르게 펼쳤다. 더는 빠를 수 없다. 하지만 손승의 상처를 보면 한없이 느리다. 허도기는 적어도 두 배 이상 빠른 것으로 추측된다.

허도기와 맞서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써 봤다. 삼십육 문주의 일홀도를 사용해 봤고, 그 무공들을 합쳐 보려고도 해 봤다. 모든 무공을 버리고 자신의 일홀도를 찾기도 했다.

그야말로 온갖 방법을 다 써 봤는데 아직도 느리다.

쒜에엑! 파앗!

반철도가 나무에 틀어박혔다.

역시 베는 칼이다. 찌르는 칼이 될 수 없다. 반철도는 끝이 뭉툭해서 찌르는 칼로는 쓸 수 없다. 하지만 찌르는 칼이 되었을 경우라도 자신은 펼치지 못한다.

자신은 발검과 동시에 베는 칼이 된다.

도대체 어느 정도나 수련해야 베는 칼을 버리고 찌르는 칼로 전환할 수가 있을까.

굳이 찌르는 칼이 베는 칼보다 더 낫다는 뜻은 아니다.

발검하는 순간 검날은 허공을 흐른다. 허공을 벤다. 검집을 빠져나오면서 베는 검이 된다. 이 검을 찌르는 검으로 바꾸려면 몇 가지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

거리 파악, 타격 목표 설정, 검속.

순간적으로 이 모든 고려사항이 판단되어야 한다.

배는 칼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칼을 뽑기 전부터 칠 곳이 정해진다. 그러니 정작 발도를 하는 순간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고려할 것이 없다.

생각하고 치는 것과 생각하지 않고 치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 자신과 허도기의 차이, 무공 차이다.

‘이건 방법이 없어. 이건 연륜이다. 내가 극복해야 할 것은 무공이 아니고 연륜이야.’

달리 방법이 없다.

수련, 수련, 수련…… 수련만이 답이다.

허도기가 살아온 세월을 능가해야 한다. 그러려면 가장 우직한 방법으로 수련을 거듭한다. 더욱이 허도기는 무공 천재다. 얄팍한 술수에 의존하면 당한다.

아걸은 계속해서 칼을 쳐 냈다. 베는 칼이 찌르는 칼이 될 수 있을 만큼.

물론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 행동이다. 허도기와는 오늘내일 사이에 만난다. 오늘 하루는 벌었다고 해도 어쩌면 내일 당장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그동안 수련을 하면 얼마나 할 것이며 나아지면 얼마나 나아지겠나.

솔직히 아걸은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할 일이 수련이다. 그러니 한다. 내일 허도기와 만날 생각은 잊어버렸다.

흔히 밥을 잘 챙겨 먹으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 있다. 지금 끼니를 거르면 영원히 찾아 먹지 못한다. 내일 먹는 식사는 내일 식사일 뿐, 지금 먹을 식사는 아니다.

아걸도 그런 심정으로 수련한다.

지금 수련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이 순간을 놓친다.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면 그건 바로 수련이다.

쒜에에에엑! 퍼억!

검이 허공을 가르며 나무에 틀어박혔다.

쏴아아아아!

지난밤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하루 더 벌었군.’

아걸은 움푹 들어간 바위 밑에서 편안하게 누워 떨어지는 빗방울을 쳐다봤다.

이 빗속을 뚫고 추격해 올 사람은 없다.

누군가가 쫓아온다면 죽임을 당할 뿐이다. 허도기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그는 오지 않는다. 허도기는 비를 뚫고 자신을 쫓아올 사람이 아니다.

이런 일은 밑에 있는 사람들 몫이다.

허도기는 유유히 다 차려 놓은 밥상 앞에 앉아서 밥만 먹는다. 마지막에 검 한 번만 쓴다.

허도기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결코, 육신을 힘들게 하면서 자신이 직접 남의 뒤를 밟는다거나 하는 행동은 꿈도 꾸지 않는다.

하루를 벌었다. 수련할 시간이 하루 더 늘었다.

‘비 맞고 나가? 꼭 나무를 쳐야만 수련은 아니잖아. 빗방울도 칠 수 있는 거지.’

반철도를 들어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쳤다.

쉐에에엑!

칼이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타격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또 목표로 정해 두었던 빗방울도 치지 못했다. 싱겁게 생각하고 툭 쳤는데, 빗방울이 칼을 지나쳐 땅에 떨어졌다.

“이거 봐라?”

아걸은 당장 자세를 바로 했다.

결전을 벌이듯 정신을 집중했다.

감각망기술, 모든 감각을 잊어버린다. 몰안, 잊어버린 감각 속에서 시력만 되찾는다. 칼과 몸이 하나가 된다.

쏴아아아아!

떨어지는 빗방울을 무심히 쳐다봤다.

“차앗!”

반철도가 툭 튀어 나갔다.

아걸은 적의 심장을 꿰뚫듯이 전력을 다해서 칼을 쳐 냈다.

칼이 빗방울을 가른다. 하지만 그 반철도가 너무 난폭하다. 빗방울 하나만 잘라낼 생각이었는데, 아예 뭉개 버렸다. 허공에서 터트려 버렸다.

수월검법에 비교하면 달을 벤 것이 아니라 짓뭉개 버린 것과 같다.

물론 수월검법은 고정된 달을 베는 것이다. 빗방울처럼 움직이는 물체는 베는 것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움직이는 물체를 칠 때는 마음도 쫓긴다.

그러면 이건 어떤가? 폭포 베기.

사실 무인들은 빗방울이나 폭포 베기 수련을 예전부터 많이 했다.

괜히 할 일이 없어서 폭포 앞에 서서 검을 휘두른 것이 아니다.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고 정확하게 가르는 수련을 했다. 폭포를 가르는 것이 아니다 물방울을 치는 것이다.

물론 폭포를 가르는 수련도 있다.

강한 도법을 얻고자 하는 사람, 천력을 수련하는 사람도 폭포 베기를 한다.

그들은 정말로 폭포를 가른다.

수월검법처럼 일시에 폭포가 쫙 갈라지는 듯한 환상이 느껴질 만큼 빠르고 강하게 친다.

아걸은 빗방울 베기를 계속 시전했다.

언젠가는 찌르는 칼이 돼야겠지만 지금은 베는 것도 힘들다.

촤아앗!

몰안이 일어난다. 오직 한 점, 목표가 보인다.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매우 느리다. 빗방울이 느리게, 느리게 떨어진다.

빗방울 하나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면 작은 물방울이 돼지 오줌보만큼 크게 보인다.

쎄에에엑! 퍼억!

돼지 오줌보가 터져 나갔다. 하지만 오줌보는 하나만 터지지 않았다. 옆에서 따라 내리던 다른 오줌보들도 함께 터져 나갔다. 베지 못하고 짓뭉갰다.

하지만 이번에는 빗방울을 터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을 때 비하면 많이 발전했다.

‘한 번 더.’

아걸은 반철도를 다시 잡았다.

철벅! 철벅! 철벅!

빗방울을 밟으면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조용히 보낼 줄 알았더니.’

아걸은 암울한 눈으로 빗방울 너머를 쳐다봤다.

피는 마음을 흥분시킨다. 어떠한 피도 마찬가지다. 약자의 피나, 강자의 피나 똑같다.

오늘처럼 조용한 날은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걸은 저녁으로 먹으려던 육포를 다시 가죽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두 귀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몰안을 일으킬 때처럼 두 귀를 발걸음 소리에 집중시켰다.

철벅! 철벅!

땅을 밟는 소리가 무겁다.

보폭은 넓고 빠른데, 몸이 무겁다. 신법을 펼치지 않고 체력으로 산에 올라온다.

이자들은 무인이 아니다. 어제 죽인 다섯 명처럼 약초꾼이나 땅꾼일 것이다.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자신을 찾아온 사람인가.

무인이 아닌 이상 구분할 방법이 없다. 수레를 몰고 가는 중이라면 추격 여부를 살필 수 있지만, 동굴 밑에 앉아서 비를 피하는 처지에서는 어떤 구분도 안 된다.

아걸은 잠시 갈등했다. 어떻게 할까?

죽이면 깔끔하다. 자신이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 찾아올 사람이 없다. 혹여 누군가가 또 온다면 그때는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다. 앞선 자를 찾아왔을 테니까.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반나절의 여유다.

저녁을 편히 먹을 수 있고, 잠을 푹 잘 수 있다.

어차피 내일 아침이 되면 우마차를 몰고 저들 앞에 나설 생각이다. 또 흔적을 드러낸다. 그리고 숨는다. 보였다가 숨기를 반복한다. 그러면 누군가는 달려든다.

아걸은 허도기에게 성검문이나 군부 외에 또 다른 결탁 세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어제 죽인 세 명은 지극히 사악한 물건을 사용했다.

정도인은 절대로 사용하지도 않을뿐더러 구하기도 어려운 독 중독이다.

그런 자들이 허도기를 돕는다면…… 무림은 속았다. 허도기는 절대로 성검문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도 무림을 이끄는 자가 사마 세력과 결탁한다는 것은…… 아! 하늘이 부끄럽다.

아걸은 자신이 나왔다가 숨기를 반복하면 허도기 세력이 달려들 것으로 생각했다.

이들을 처리하는 것도 허도기를 처리하는 것이 된다. 반드시 허도기와 칼을 맞대야만 그와 싸우는 게 아니다. 피치 못하게 부딪치면 싸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주변 세력부터 정리한다.

그렇다. 허도기, 무림을 정비하러 나왔나? 나도 당신을 정리하려고 나왔다.

철벅! 철벅! 철벅!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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