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267화 (267/600)

#267화. 第五十四章 야천(夜天)(2)

강에 배가 띄워졌다.

호화로운 유람선이다.

천정에는 금색으로 된 기와지붕이 얹어져 있고, 큰 선실도 좌우로 두 개나 있다. 선실 가운데는 강을 유람하면서 술 마시기 좋도록 기다란 탁자가 놓였다.

유람선에는 붉은 바탕에 흑룡(黑龍)이 그려진 깃발이 꽂혀 있다.

유람선 외에 다른 배는 보이지 않는다. 선착장에는 많은 배가 있지만 어떤 배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선착장은 흑의를 입은 무인들에게 점거되었다.

“뭐야! 누군데 길을 막고……”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사람들도 흑의 무복을 입은 사람들을 보고는 찔끔 놀라서 물러갔다.

무인들이 뭐라고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딱딱하게 경직된 채 서 있기만 했다. 사람들이 그들을 알아보고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태도를 명확히 하라. 이거 분명한 협박인데.”

‘아니, 그만큼 해 줬으면 됐지. 이거 정말 너무한 거 아냐? 기껏 도와줬더니 이런 식으로 정면에서 들이받나?’

유람선에 모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다 오셨으니 시작합시다.”

정면에 앉은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모든 잡담이 일제히 그쳤다.

스으읏! 철썩!

강물이 몰려와 뱃전을 두들긴다. 철썩, 철썩 강물과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내용은 다 아실 테고, 어떻게들 할 겁니까?”

노인이 물었다.

“솔직히 옛날에 사람을 빌려달래서 빌려줬더니 모조리 쳐 죽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다 뒈지고 저는 마인을 진압한 성군이 되고. 그만큼 써먹었으면 됐지, 뭘 더 달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래서요?”

“뭐가 어떻다는 게 아니고 하도 분통이 터지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회주님은 분하지도 않으세요!”

턱에 수염이 거칠게 난 노인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거 보자 보자 하니까 낯짝 한 번 되게 뻔뻔하지 않나요?”

다른 노인이 좌중을 돌아보며 동조를 구했다.

“자, 자, 자. 화풀이는 그만하고 우리 실속 있는 대화를 합시다.”

정중앙에 앉은 노인이 손을 들어서 좌중을 달랬다.

“정리하는 의미에서, 아직 내용을 모르는 분 계십니까?”

좌중은 조용했다.

“그럼 허도기 그 사람 말대로 깨 벗고 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 거수.”

유람선에 모인 사람은 모두 아홉 명이다. 이들을 야천 구룡(九龍)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밤을 지배하는 아홉 명의 용이다.

그들은 서로 영역을 분장하고 있고, 침범하지 않는다.

아홉 명 중 네 명이 손을 들었다.

“그러면 다른 분들은 전쟁하자는 쪽인가요?”

“아니, 전쟁하자는 쪽이 아니고. 말이 그렇지 전쟁이 쉽나요? 난 좀 신중하자는 쪽입니다.”

거수하지 않은 사람 중의 한 명이 말했다.

“나도 신중하자는 쪽이에요. 태도를 확실히 밝혀라. 이런 말을 듣고 웃으면서 줄 수는 없으니까.”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나는 전쟁 쪽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더 신중할 수 있어요. 허도기한테 깨 벗고 줘 봤자 또 토사구팽당할 게 뻔한데. 옛날에 한 번 당했는데 또 당하자고요?”

“나도 전쟁하자는 쪽입니다. 밀릴 게 뭐가 있어요. 몇 명 던져 주는 건 좋은데, 그 던져 주는 사람들이 상당한 고수라는 게 문제 아닙니까. 아마 여러분들 오른팔, 왼팔 정도는 내놔야 할걸요?”

“음!”

좌중이 침울해졌다.

구룡은 각기 극히 강한 고수를 거느리고 있다.

사실, 그들이 야천의 질서를 유지한다. 그들이 있어서 구룡끼리도 침범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고수가 없다면 진작 전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허도기가 그런 고수를 원한다는 데 있다. 또 그들을 허도기에게 보내면 시신이 되어서 돌아온다.

왼팔, 오른팔을 떼어 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그들이 죽으면 당장 타격이 온다. 지금은 웃으면서 같이 술잔을 들던 놈이 느닷없이 칼을 들이댈 수도 있다. 아니, 틀림없이 그런 일이 벌어진다.

모두 조용해졌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하다.

허도기가 성검문을 장악하기 전, 야천에는 열여섯 명의 흑룡이 존재했다.

그들은 허도기의 제안을 받고 마지 못해서 수족을 내놨다. 가장 믿고 신뢰하던 놈들이었는데, 허도기가 달라고 하니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을 허도기가 잡아 죽였다.

앙심을 품고 성검문을 침범한 마인이라면서 전 중원이 보는 앞에서 참수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나.

수족을 내준 흑룡은 강한 흑룡에게 병탄 되었다. 십육 흑룡이 구룡으로 줄어들었다. 허도기에게 수족을 내준 흑룡 일곱 명이 강물에 던져져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

그 당시, 성검문에서 일어난 변화만큼 야천에서 일어난 변화도 상당했다.

그 일을 또 반복할 수는 없다.

예전처럼 수족을 기꺼이 내줄 사람도 없거니와 설혹 있다고 해도 반드시 반대급부를 받아 낼 것이다. 그런 결정을 한 다음에야 허도기 말대로 깨 벗고 줄 수 있는 것이다.

“회주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싸움을 주장한 자가 물었다.

“내 생각이라고 뭐 다를 게 있으려고요. 사실 허도기하고 전쟁을 벌이면 박살 나지. 그나마 소축십검이 거의 무너졌으니 해 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긴 하겠지만, 어림도 없어요. 허도기를 모릅니까? 우린 며칠 버티지도 못해요.”

중앙에 앉은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능구렁이.’

‘하! 이런 거지 같은 늙은이가.’

구룡은 노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회주는 일부러 죽는소리하고 있다. 그래야 자신의 수족들이 별 볼 일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야천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

허도기가 워낙 절대자라서 문제이지, 그렇지만 않다면 당장 전쟁을 선택했을 것이다.

야천은 사마(邪魔)를 아우른다.

무림이 왜 조용한 줄 아나? 성검문이 사마를 잡아 죽여서? 천만에. 야천이 사마를 통제해서다. 야천에 적을 둔 사마는 마음껏 움직이게 돕는다.

살인하든 약탈을 하든 무조건 돕는다. 언젠가는 그들을 쓸 수 있으니까.

야천을 거부한 사마는 야천이 제거한다.

야천에서 일어난 살인은 무척 많다. 하루에도 수십 건이 발생한다. 아마, 지금도 어느 구석에선가는 사람이 잔인하게 찢겨서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다만 죽은 자들은 전부 실종 처리된다.

시신 수습을 깔끔하게 해서 완벽하게 실종 처리한다. 그러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세상은 실종과 살인을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인다.

실종은 ‘그래? 없어졌어?’하고 지나간다. 살인은 입을 모아서 한마디씩 할 정도로 발칵 뒤집힌다.

더군다나 실종조차도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게 훨씬 많다.

이들 대부분이 야천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다. 물론 사마인 보다 너희 뱃속을 불리려고 죽인 사람이 훨씬 많지 않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아니, 할 말이 있다. 그런 적 없다. 증거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라.

그동안 정도 무림은 평온하게 지내왔지만, 야천은 아비규환의 시대를 겪었다.

야천의 실전력은 단연 최강이다.

문제는 역시 허도기다.

전부 좋게 좋게 말하다가도 일초단검 허도기 소리만 나오면 답이 없어진다.

“허도기도 인간인데 한번 붙어 보면 안 될까?”

“아이고! 그래 주시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싸운다고 했소!”

말을 꺼낸 사람이 대뜸 성질을 내고 침묵했다.

그 누구도 허도기와 싸우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전쟁 자체가 안 된다. 성검문은 차지하고 허도기 한 명만 염두에 둬도 이런 결론에 이른다.

허도기의 공갈 협박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협박할 만한 사람이 한 것이다.

회주가 말했다.

“자자, 진정들 하시고. 일단 흑후가 시간을 벌어 줬으니까 세 갈래로 나눠서 생각해 봅시다.”

“세 갈래요? 전쟁, 홀딱 벗고 주는 것, 그리고 또 있나? 한 갈래는 뭡니까?”

“아걸.”

“아걸요?”

“아걸을 잘 이용하면 좋은 그림이 될 것 같은데. 취화원은 우리 쪽이기도 하고.”

“에이, 그건 아걸이 허도기와 상대가 될 때 이야기죠. 그게 될까요? 난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은 아걸이 팔팔 뛰는 것 같지만 겨우 발악하는 수준이고, 결국은 무너지겠죠? 그때가 되면 깨 벗고 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장까지 다 빼 줘야 할지도 몰라요. 줄 바에는 지금 속 시원하게 주는 게 좋을 겁니다.”

“허! 모두 전쟁은 왜 말을 안 하시나? 전쟁을 벌인다고 누가 전면전을 하재요? 물자를 동원해서 괴롭히는 지구전도 있고, 암습만 노리는 수도 있고.”

그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쟁은 예전에도 언급된 적이 있었다.

허도기가 야천에 명령과도 같은 제안을 해 왔을 때부터 논의됐었다. 그때도 허도기를 상대할 수 있을까, 전쟁할까, 아니면 허도기 요구를 들어줄까 하는 의견이 분분했다.

결론은 성검문과 전쟁을 벌이면 야천이 망한다는 거다.

밤의 세계가 쑥대밭 된다.

술집에 기생하는 파락호들이 일제히 사라진다. 도박꾼도 사라질 것이고, 당연히 도박장도 문을 닫게 된다. 광산, 수로, 인력 시장 독점권도 사라진다.

술, 여자에 관계된 모든 사업이 위태로워진다.

게다가 야천에는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야천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은 역시 살인이다. 그리고 야천 살인에는 구룡은 물론이고, 강자로 거론되는 모든 사람이 연관되어 있다. 야천 사람 중 살인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허도기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면 야천은 당장 붕괴한다.

이때는 성검문하고 싸우는 게 아니라 전 중원 그리고 나라와 싸우게 된다.

허도기는 공부다. 어떤 이유에서든 공부는 야천을 멸살할 만큼 군대를 동원할 수가 있다.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다.

다음 회합에서는 깨를 벗고 주되, 어떤 식으로 누구를 줘야 하는지가 논의될 것이다.

이번 일이 예전처럼 야천에 풍파를 몰고 와서는 안 된다.

구룡들끼리 전쟁이 터지지 않도록 잘 조절하는 그런 회합이 될 것이다.

“아걸을 어떻게 이용해 볼지도 생각해 보고, 허도기에게 어떤 선물을 줘야 하는지도 생각하고. 자, 술 듭시다.”

회주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 * *

“화해 쪽으로 결정을 굳혔습니다.”

보고가 이루어졌다.

“음! 알았다.”

흑수혈검(黑手血劍)이 차분히 대답했다.

흑수혈검은 회주를 모신다. 야천대방(夜天大帮) 제일 고수이기도 하다.

“후후! 그럼 신나게 싸우기는 할 것 같은데, 목숨은 장담하지 못하는 처지가 된 건가?”

패도광마(覇刀狂魔), 야천삼방(夜天三帮) 살귀가 말했다.

모두 허도기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허도기는 이번에도 마인을 원한다. 마인을 동원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살인밖에 없다.

야천이 판단한 바로는 허도기는 마인으로 전보영을 칠 생각이다.

허도기에게 전보영은 눈엣가시다. 또 은거 무인도 있다. 전보영을 싹 쓸어버리고, 은거 무인도 죽인다.

더불어서 장군가도 공격할 생각이다.

옛날에 차출된 마인은 단지 몇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성검문주의 혈육, 세 아들을 죽이는 데 쓰였다.

그 세 명을 죽이는 데 동원된 마인만으로도 야천이 발칵 뒤집혔다. 흑룡 열여섯 명 중 일곱 명이 물고기 밥이 될 정도로 타격을 많이 받았다.

한데 이번에 차출되면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을 받는다.

노인네들은 이런 점을 알면서도 한가롭게 전쟁을 하느니 깨 벗고 주느니 이런 말들이나 나누고 있다. 자기 목숨을 걸지 않았으니 한가한 것이다.

그럴 수 있다.

사실 허도기와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한다. 아쉽지만 이게 냉정한 현실이다. 마음 같아서는 한번 붙어 보고 싶지만 역시 안 된다. 냉정하게 숫자로 대입해서 셈을 해 봐도 절대 패배로 나온다.

그럴 바에는 정말로 타협을 해야 한다. 이쪽에서 희생하는 만큼 많은 것을 받아 내야 한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왜 그냥 손해만 보려는 것일까?

‘이번에는 우리 모두 죽겠군.“

누군가 말했다.

그들은 유람선 선실 밑바닥에 앉아서 대기하는 중이다.

구룡의 안전을 책임진 호위 무인들이기 때문에 절대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간단하게 술 한 잔 정도는 해도 될 것 같다. 아마도 구룡은 날이 밝을 때까지 술을 마실 것이다.

”휴우! 답답하군. 좀 많은 것을 받아 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자, 우리도 한잔하지. 오늘 같은 날은 한두 잔쯤 해도 괜찮을 것 같다. 하기 싫은 사람은 말고.“

흑수혈검이 먼저 술병을 들어서 술잔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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