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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268화 (268/600)

#268화. 第五十四章 야천(夜天)(3)

저벅! 저벅! 저벅!

비를 뚫고 사내 두 명이 걸어왔다.

아걸은 그들을 벨 생각이었다. 아직은 허도기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서 놔두기로 했다.

‘그래. 이렇게 되면…… 일을 좀 빨리 시작하는 것도 좋지.’

어차피 허도기에 대한 자신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진다.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후에 싸운다고 해도 이길 자신이 없다. 허도기의 무공이 한없이 높게 보인다.

아걸은 허도기가 펼치는 발검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아무리 빗방울을 베고 갈라 봐도 허도기의 검이 보이지 않았다. 허도기는 이미 빗방울을 베는 정도는 가볍게 해낼 것이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정확하게 보고 갈라낸다.

허도기의 검은 분명히 한 단계 위에 있다. 허도기는 이미 이 경지를 넘어선 지 오래다.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무공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 꾸준히 한다. 수련은 수련대로 하고, 싸움은 싸움대로 해보자.

그러자면 이들을 베면 안 된다.

‘그래, 위치부터 노출하고.’

저벅! 저벅! 저벅!

사내들이 다가왔다.

“어우! 깜짝이야!”

가까이 다가온 사내들이 아걸을 보고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아니, 정말로 놀란 듯했다. 설마 아걸이 움푹 파인 바위 밑에서 편안하게 드러누워 있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한 듯한 얼굴이다.

“산에서 사람을 만나면 제일 무섭다니까.”

“무섭다니 무슨 소리야, 이 사람아. 반갑지! 낯선 곳에서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운데. 하하!”

두 사내는 일부러 아걸이 들으라고 크게 말했다.

“풋!”

아걸을 피식 웃었다.

그런가? 그렇구나. 산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반갑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겠구나.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서 반가울 때도 있고, 무서울 때도 있겠지.

저들은 자신을 무서워한다.

“여기까지 우마차를 끌고 온 거요?”

사내가 비를 철철 맞고 있는 소를 보면서 말했다.

“길이 넓어서.”

“그러게. 여긴 길이 꽤 넓네. 이쪽 지리를 잘 아시는 모양이우?”

“비를 맞아서 추우신 것 같은데, 모닥불이라도 쬐고 가시죠.”

아걸이 옆자리를 내주었다.

그러자 사내들이 화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바로 요 앞에 돌막이 있어서.”

아걸은 웃었다.

돌막은 산 사람들의 임시 거처다. 만일에 대비해서 식량도 놔두고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솥과 그릇도 놔둔다. 덮고 잘 수 있는 담요를 놔두기도 한다.

산에 돌막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앞쪽에는 돌막이 없다. 돌막은 산이 깊은 곳에 마련하기 마련인데, 이곳은 그리 깊은 산도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이 길도 모르고 있다. 돌막을 준비해 놓고 다닌다는 자들이 주변 길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역시 이들은 추격자다.

“그러세요? 그럼 빨리 가셔야지. 괜히 비 맞습니다.”

“그럼 쉬었다 가셔.”

사내 두 명이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그들은 아걸과 같이 불을 쬐면서 노닥거리다가 정체가 탄로 날까 봐 두려워한다. 아걸과 같이 불을 쬐면서 노닥거리다 보면 아무래도 신분 노출이 될 만한 말이 툭 튀어나올 수도 있다.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게 현명하다.

아걸은 멀어져 가는 그들의 조용히 지켜봤다.

‘이르면 오늘 저녁,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허도기를 만나겠군.’

아걸은 팔베개하고 누웠다.

허도기를 어떻게 상대할까?

순간적으로 터지는 발검을 어떤 식으로 막아 낼까? 막지 말고 역공을 취하는 게 나으려나?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 *

“하! 이거군, 이거야.”

흑후는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서점에서 종이 끈으로 둘둘 말린 종이 뭉치를 찾아냈다.

앞부분만 살짝 들춰 봤는데, 맞는 것 같다.

“이거 말로만 들었는데, 하! 정말 이런 게 있었네? 이게 군도라는 거, 맞지?”

“네. 맞습죠.”

서점 주인이 얼른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사실은 서점 주인도 군도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과거에 누군가가 군도를 팔았다. 남들이 모르는 암로를 찾는 사람들에게 딱 좋을 것 같아서 사놓기는 했지만, 정작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종이 뭉치는 오랜 세월 동안 서점 한 귀퉁이에서 썩어 갔다.

종이는 많이 삭았다. 살짝 만지기만 해도 와사삭 부스러진다.

“조심! 조심! 조심해서!”

흑후는 기분이 좋아서 서점 주인에게 은 한 덩이를 던져 주었다.

그런데 서점 주인도 약삭빠르다. 그는 종이 뭉치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 죄송하지만, 이 군도는 이거 가지고는 안 되는데요. 사실 값이 워낙 비싸서 아직 임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라. 이거 한 덩이는 더 주셔야……”

흑후는 서점 주인의 말에 비위가 확 틀어졌다.

흑후는 서점 주인을 쳐다봤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들어서 뺨을 때렸다.

탁!

서점 주인이 화들짝 놀라서 흑후를 쳐다봤다.

쫙!

이번에는 더 세게 때렸다.

서점 주인은 감히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맞았다.

“사람이 말이야. 욕심이 많으면 다쳐. 늘 그래. 늘 욕심이 많은 놈은 다쳤어.”

“네.”

쫙!

뺨을 또 때렸다.

“다시 말해 봐. 값이 얼마라고?”

“죄,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을 해서. 이거면 충분합니다.”

쫙!

흑후는 뺨을 또 때렸다.

“내가 귀가 잘 안 들려서. 얼마?”

“사실 그, 그냥 드리려고 장난삼아서. 이건 안 주셔도 됩니다.”

서점 주인이 은을 다시 내밀었다.

흑후는 은덩이를 받아서 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주인의 뺨을 탁탁 두들기면서 말했다.

“욕심이 없네?”

“네.”

“거봐. 욕심 없으니까 마음 편하잖아. 한순간 눈에 회까닥했지?”

“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점 주인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흑후가 야천 사람이라는 것은 짐작했다. 하지만 서점 주인도 야천 물을 먹었다. 서점은 밝음과 어둠의 경계에 서 있는 편이다. 가짜 유언장이나 서신 같은 것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야천을 잘 안다고 생각해서 욕심을 부렸는데…… 흑후의 눈빛이 독사처럼 살기로 번뜩인다. 지금까지 그가 만났던 어떤 무인도 비교가 안 된다.

“괜히 기분 좋은 사람 긁고 그래! 그냥 성질나서 불을 확 싸질러 버릴까 하다가 참는 거야.”

“네. 감사합니다.”

“조심하라니까! 그거 찢어지면 네놈들 뒈져!”

흑후가 종이 뭉치를 넣는 수하들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삭아서 부스러지기 직전인 종이를 펼치는 일은 무인보다 도굴꾼이 훨씬 잘한다. 도굴꾼은 떡처럼 달라붙은 종이도 한 장, 한 장 떼어 낼 수 있다.

도굴꾼 십여 명이 끌려와서 일제히 작업을 시작했다.

군도는 매우 조심스럽게 펼쳐졌다.

넓은 대청에서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종이들을 조심스럽게 떼어서 펼쳤다.

“하! 그거 펼치니까 상당히 넓은데?”

흑후가 감탄했다.

“금릉 주변이 전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길만 따라가면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고 금릉을 한 바퀴 돌 수 있어요. 이거 은밀히 침입하는 데는 그만이겠는데요.”

수하 말처럼 넓은 대청에는 금릉 주변이 전부 드러나 있다. 상당히 넓은 지역에 오밀조밀 길이 나 있다.

“이거 그려 빨리 새로 그려. 화공, 불렀어?”

“네. 이미 와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빨리 그리라고 해. 우선 이쪽 지형부터 그려. 여기, 여기, 여기, 여기. 우선 여기만 그려서 가지고 와.”

“네.”

수하가 즉시 대답하며 화공을 끌고 왔다.

저녁 무렵,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아걸을 찾았다는 보고다.

전서구를 받았을 때는 이놈이 여기 왜 있나 했는데 군도를 보니 확연히 알겠다.

‘이놈 확실히 군도를 타고 이동하고 있어. 하! 이거 재밌네.’

추혼삼마도 알지 못하는 길이다. 만약 추혼삼마가 이 길을 알았다면 심마니나 땅꾼을 이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방안에서 가만히 지도만 봐도 추격할 수 있었다.

“아주 재미있는 길을 찾았어. 이 길은 우리가 써도 되겠는데? 왜 이런 길을 아직 모르고 있었지? 키키! 놈이 아주 좋은 길을 가르쳐 줬어.”

흑후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공부님께 소식을 전할까요?”

“소식?”

“네.”

순간, 흑후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망설였다.

아걸을 찾았으니 즉시 공부에게 연락해야 한다. 아걸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공부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공부에게 사실을 전하기가 망설여진다.

‘이걸…… 알려 줘?’

알려주지 않으면 허도기는 야천 사람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잖아도 지금도 깨 벗고 달라는 등 별 헛소리를 다 하는 형국이다.

야천 사람이 아걸과 부딪치면 크게 다친다.

그러니 지금 당장 허도기에게 아걸을 넘기는 것이 최상책이다. 사실 그것 외에 달리 취할 행동도 없다.

“아니야. 아니, 아니.”

흑후는 외통수 길을 거부했다.

“가만히 있어 봐. 이놈이 군도를 이용하는 이상 어디 갈 데가 없어. 군도 밖으로 나오면 우리 눈에 띄고 이 안에 있으면 지도 안에 갇히는 거고.”

“공부께…… 알려야 할 것 같은데요?”

“야! 어디로 도망 못 간다니까! 서둘지 말라고!”

흑후는 소리를 빽 질렀다.

“지도 펼쳐 봐!”

수하가 화공이 새로 그려온 지도를 쫙 펼쳤다.

흑후는 붓을 들어서 아걸이 머무는 곳에 표시했다. 그리고 도주로를 찾았다. 또 길이 아니라더라도 옆으로 빠질 수 있는 부분이 없는지 살폈다.

아걸은 위로도 아래로도 갈 수가 없다.

몇 군데만 틀어막으면 길에 갇힌다. 지도를 아무리 살펴봐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이거 재밌네. 이래서 잔머리를 많이 쓰면 빨리 죽는다는 거야. 때로는 우직하게 나갈 줄도 알아야 하는데, 이놈은 잔머리를 너무 굴려. 대체 이런 길로 어디까지 도주하겠다고.”

흑후는 웃었다.

머릿속에 다른 계획이 구상되었다.

아걸을 허도기에게 넘겨주기 전에 일단 아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본다.

이미 아걸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수집되어 있다.

혈도비자, 명부판관…… 근래에 토족들과 싸운 것까지 정보를 상세히 입수해 놨다.

아걸은 상당한 고수다.

혈도비자 시절에는 오백 명 가까운 무인과 싸웠다.

진평 대산방이 그 싸움 이후에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아직은 몇몇 무인이 남아서 발버둥 치고 있지만, 진평 땅에서 옛 성세를 회복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아걸이 강하다는 것은 혈무대에 두 번이나 섰다는 사실 만으로도 알 수 있다.

남들은 한 번도 서기 힘든 혈무대를 아걸은 두 번이나 섰고, 두 번 다 이겼다. 두 번째 비무는 애초에 천하제일인 허도기에게 내민 도전장이었다.

하지만 아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다.

그 점을 야천도 봐야 한다.

아걸은 결국 허도기에게 죽을 것이다.

여기서 허도기의 무공이 가늠된다. 어느 정도로 강해야 허도기와 싸울 수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그러면 전쟁을 벌일 것인지 깨 벗고 줄 것인지 결정하기도 쉽다.

“이런 일에 야천 무인을 쓸 수는 없고…… 우리 애들을 쓰기도 그렇지? 그러면……?”

흑후는 야구(野狗)를 떠올렸다.

야구라면 상대가 허도기라고 해도 달려들 것이다. 아니, 허도기라면 야구도 숨을 죽이려나? 허도기는 모르겠다. 그럴지도. 하지만 다른 자들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이 지도 한 장 더 그려.”

“네? 네. 알겠습니다.”

“지도를 조금 상세히 그려 봐. 그거 뭐냐? 나무도 그리고 바위도 그리고. 그럴듯하게 그려봐. 이건 민숭민숭해서 깊은 산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안 들잖아.”

“네.”

“내가 꼭 이런 일까지 지시해야 하냐?”

“죄송합니다.”

수하가 즉시 지도를 가지고 물러났다.

흑후는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그는 어느 쪽이냐 하면…… 허도기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쪽이다. 그래도 사마외도가 자유를 찾는다. 억제되고 통제된 삶이 아니라 자유분방하게 중원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된다.

“어디…… 전쟁을 할 수 있는지 보자고. 우선 허도기의 상대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부터 하고. 킥킥!”

흑후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온종일 기분 좋은 일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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