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第五十四章 야천(夜天)(5)
“워! 워!”
아걸은 소를 이끌고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 밑으로 갔다.
비가 잠시 오다가 그칠 줄 알았는데,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다. 쉽게 그칠 비가 아니다.
덜컹!
수레바퀴가 땅속에 박혔다.
군도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이다. 깊은 숲이기도 하다. 땅이 푸석푸석해서 조금만 비가 와도 진흙밭이 되어 버린다. 수레를 끌고 숲으로 들어온 것이 잘못이다.
“후후! 너보고 편히 있으라고 하는 것 같다.”
아걸은 굴레를 벗겨 버렸다.
수레는 빠진 곳에 놔두고 소만 끌고 비를 덜 맞는 곳으로 데려갔다.
“넌 여기 있어. 다행히 이 산에는 맹수가 없는 것 같으니 푹 잘 수 있을 거다.”
아걸은 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걸은 다시 수레로 와서 손승의 목관을 떼어내 짊어졌다.
목관은 방수 처리가 되어 있어서 비가 안으로 스며들지 않는다. 하지만 괜히 손승이 비를 맞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다. 관일망정 비를 맞지 않는 곳에 두고 싶었다.
아걸은 전신이 비에 흠뻑 젖었다.
빗속에서 잠깐 움직였는데, 마치 강물 속에 뛰어들었다가 나온 것처럼 후줄근하다.
아걸은 무심히 모닥불을 쬐었다.
위치가 노출됐으니 허도기가 당장 달려올 줄 알았는데,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그리고 또 하루가 저문다. 벌써 날이 어둑해지는데 잠잠한 걸 보면 오늘도 오지 않을 모양이다.
비가 쏟아져서 움직이지 않는 것인가? 비를 맞으면서 싸우기는 싫다는 건가?
“풋!”
아걸은 피식 웃었다.
이런 행동 모두 강자의 몫이다.
강자는 자신이 싸우고 싶은 날씨와 장소를 선택할 수 있다. 몸을 아주 좋은 상태로 만든 후에 나설 수 있다. 반명에 약자는 그렇지 못하다. 약자는 상대방이 정한 곳에서 싸워야 한다. 날씨 같은 것을 선택할 여지는 전혀 없다.
타닥!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들어 갔다.
비가 와서 마른 나무 구하기도 힘들다. 아마도 오늘은 이게 마지막 불일 듯싶다.
아걸은 옷을 벗어서 모닥불에 말렸다.
쏴아아아아!
빗줄기가 점점 강해진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펑펑 쏟아진다.
“음!”
아걸은 후벼 파는 냄새에 인상부터 찡그렸다.
빛 속에서 냄새가 풍긴다. 시궁창 냄새다. 냄새가 아주 지독해서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게 무슨 냄새지?’
아걸은 눈을 떴다.
모닥불도 꺼지고, 사위는 칠흑처럼 어둡고…… 잠이나 잘까 하고 막 누웠던 참이다.
그런데 갑자시 사방에서 오뉴월에 생선 썩는 냄새가 풍긴다. 거름 썩는 냄새 같기도 하고, 하수구 시궁창 냄새 같기도 하다. 굉장히 지독한 냄새가 난다.
‘뭐지? 이 근처에 쓰레기가 있나?’
쓰레기 냄새치고는 너무 지독했다. 비가 온 후라서 냄새가 더 잘 풍겨 오는지도 모르겠다.
아걸은 누운 채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쏴아아아아!
비는 좀처럼 그칠 줄 모른다.
‘호랑이가 올 줄 알았는데, 잡귀들인가.’
아걸은 심란했다.
오늘 밤, 원치 않는 살인을 해야 할 것 같다. 그것도 대단히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
아걸은 지독한 냄새와 함께 거친 발걸음 소리도 들었다.
상대방은 발걸음을 죽이려고 애를 쓰지만, 비가 너무 많이 왔다. 땅이 질퍽거린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철퍼덕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군도에는 수풀이 많이 자라 있다. 또 사람이 다니지 않은 길이라서 잘 다져져 있지 않다. 숲처럼 군도도 비가 오면 수렁처럼 발이 푹푹 빠진다.
완전히 뻘밭이다.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저들은 군도 이쪽저쪽 양쪽을 꽉 막은 채 몰려온다.
이런 싸움이 꼭 필요할까?
아걸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고민했다.
‘허도기는 이런 싸움을 원하지 않아.’
이것만은 분명했다.
허도기는 자신이 직접 아걸을 베고 싶어 한다. 그래서 무림으로 뛰쳐나왔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죽일 것 같았으면 아예 무림에 나오지도 않았다. 진공부에 들어박혀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명령만 내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허도기가 오지 않고 다른 사람이 왔다는 것은 누군가가 과잉으로 충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자신의 손으로 아걸을 잡아서 허도기에게 바칠 생각인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사람. 괜히 희생을 자초하네.’
아걸은 비로소 일어섰다.
부욱!
장삼을 길게 찢었다. 오른손에 반철도를 들고, 찢은 천으로 손과 칼을 묶었다.
반철도를 손에 고정한다.
칼을 손에 고정하는 것은 대체로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실제로 이렇게 하면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게 해 준다.
아걸은 다른 의미에서 칼을 손에 묶었다.
이런 행동에는 예전에 대산방과 싸워본 경험이 경험, 그리고 토족과 싸워 본 경험이 녹아 있다.
반철도에 묻은 피는 도신을 타고 칼자루까지 흘러내린다.
손에도 피가 묻는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람을 많이 베면 반드시 피가 묻는다.
반철도를 잡은 손이 끈적거리면서 미끄럽다.
반철도를 힘주어 잡아도, 진기를 보태서 쳐 낼 때는 꼭 칼이 빠져나갈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손에 헝겊을 감아 놓으면 그런 점이 조금은 보완된다.
피가 손잡이로 흘러들고, 헝겊을 붉게 물들여도 반철도가 떨어져 나갈 염려가 없다.
그 준비를 한 것이다.
아걸은 바위에 등을 기대고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저놈, 뭐 하는 거지?”
“우리가 온 걸 알고 있는데요.”
“당연히 알지. 그만큼 소리를 냈는데 모를 수가 있나. 저놈이 혈도비자라는 걸 잊었어?”
“먼저 공격하지는 않는데요. 쫄은 건 아니겠죠?”
“저놈이 죽으려고 작정했나.”
야구는 수하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눈살을 좁혀서 아걸을 주시했다.
아걸은 움푹 들어간 바위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싸움꾼이라면 무조건 피할 흉지다 저런 곳에 있으면 꼼짝없이 당한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빠져나갈 곳이 없다. 무조건 걸려든다.
아걸은 자신을 스스로 외통수에 가둬 놓았다.
‘저놈 저거…… 저 속에 화약을 집어 던지면 어떻게 피하려고 저러고 있지? 그 정도는 피할 수 있다는 건가? 그러면…… 밖으로 튀어나오면 동선이……’
야구는 머릿속으로 아걸의 움직임을 그려 보았다.
아걸이 날다람쥐처럼 빠르다고 해도 이곳에서는 빠져나가지 못한다. 아걸이 움직일 곳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화살처럼 튀어나와도 십 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투망으로 십 장 주변을 막아. 빙 둘러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란 말이야.”
“넷!”
수하 넷 중 한 명이 대답하고는 즉시 움직였다.
“연노는?”
“이미 준비됐습니다.”
“네가 세 번째로 쏴. 화통이 던져진 후에 바로 갈겨 버려. 한 오백 대 정도 갈겨.”
“흐흐흐! 알겠습니다.”
수하가 사라졌다.
“너희 둘, 바로 시작해. 네가 먼저, 넌 바로 뒤에. 거의 시차를 두지 말고.”
“알겠습니다.”
남은 수하 두 명도 사라졌다.
드디어 공격이 시작된다. 아걸처럼 구덩이 같은 곳에 빠진 놈을 잡지 못하면 병신이다.
“잘하면 한 명도 손실 없이 잡을 수 있겠는데. 후후! 그럼…… 혈도비자가 얼마나 날뛰나 볼까?”
야구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가지가지 하네.”
아걸은 또 미간을 찡그렸다.
악취에 이어서 매캐한 냄새가 맡아진다.
심지가 타들어 가는 냄새는 썩 좋지 않다. 기름 먹인 줄이 타들어 가는 냄새라서 속이 메스껍다. 하지만 화약을 다루는 사람들은 이 냄새를 무척 좋아한다.
마치 생명이 타들어 가는 소리처럼 느껴진다나.
아걸은 아삼과 같이 돌아다닐 때, 채석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
둘을 부수고 캐내고 나르는 일은 몸을 단련하는데 아주 좋은 훈련이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천하 약골일지라도 이 악물고 채석장에서 일 년만 일하면 단단한 근육을 얻을 수 있다. 아주 많이 보기 좋은 근육질 몸이 만들어진다.
물론 근육이 단단해진다고 해도 칼을 쓰는 근육은 아니다. 일 근육이다. 일 근육과 칼을 쓰는 근육은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일근육이라도 얻어야 칼을 쓰는 근육도 얻을 수 있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다. 하지만 이 냄새는 잊을 수 없다.
‘심지? 화약을 써? 무인은 아니라는 거지?’
저들은 참 많은 것을 신경 쓰게 만든다.
상대가 안 될지라도 무인은 무공으로 싸우려고 한다. 이 자들처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죽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 아니다. 무인들의 기습에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다.
화약을 싸서 죽일 생각이라면 분명히 정통 무인이 아니다.
허도기답지 않다. 허도기가 부리는 수하들도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 성검문은 말할 것도 없고, 적위군도 대뜸 화약부터 꺼내 들지는 않는다.
파아아앗!
아걸은 잡념을 버리고 일심(一心)을 모았다.
몸에서 감각을 떨쳐 낸다. 감각망기술을 일으킨다. 그 후, 모든 정신을 두 눈에 집중시킨다.
몰안! 파팟!
눈이 번쩍 뜨이면서 칼과 몸이 하나가 된다.
아걸은 여전히 바위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앉아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싸울 준비가 끝났다.
휘이익! 휘익! 휘이이익!
허공에서 어린아이 머리만 한 항아리들이 불쑥불쑥 날아왔다.
‘기름!’
기름 항아리가 날아온다.
날아오는 물체는 작고 동그랗다. 옹기로 만든 항아리를 작은 투석기로 날렸다.
저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싸움을 많이 해보지 않은 자는 ‘저게 뭐지?’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하지만 아걸은 이런 싸움을 많이 봤다.
틀림없이 기름 항아리다.
아걸은 차분히 기다렸다.
기름 항아리 그 자체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기름 항아리에 불을 붙일 두 번째 공격이 문제다.
쉬이이익! 쒸이익!
이번에는 불화살이 날아왔다.
기름 항아리와 불화살은 매우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화살을 쏘는 자들은 정확하게 항아리가 깨질 시간을 계산해 냈다. 그리고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고 쏘았다.
항아리가 깨지면 기름이 사방으로 튄다. 동시에 불화살이 불을 붙인다.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다. 주변을 불바다로 만드는 것도 대단한 공격이지만, 진짜 공격은 불화살에 묶여 있는 화약이다. 화약이 불길에 터진다.
이미 심지가 당겨진 불화살은 허공에서 터질 것이다.
앞으로 튀어 나가면 불화살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가만히 있으면 불바다 속에 갇힌다. 무엇보다도 사방에서 터지는 화약에 육신이 남아나지 못한다.
아걸은 끝까지 기다렸다. 그러다가 드디어 때가 되었다. 기름 항아리가 땅으로 떨어진다.
쉬익!
아걸은 목관을 옆에 끼고 신형을 쏘아 냈다.
쉬이이잇! 쒜에엑!
신형은 앞으로 쏘아지고, 반철도를 무수히 많은 선을 그려 냈다.
이십이대 문주의 산화도(傘火刀)다. 도파(刀把), 손잡이는 고정한 채 칼날만 회전시킨다. 그러면 우산을 거꾸로 든 것 같은 형태가 펼쳐진다.
산화도는 방어에 중점을 둔다.
공격은 단 일 수, 넓게 펼쳐진 도신이 오로지 가운데를 겨냥할 때 일어난다. 넓게 펼쳐진 부챗살이 한일(一)자로 곧게 접히면 관충(貫衝)이 일어난다.
몸을 꿰뚫는 칼이 된다.
나왔다!
어디선가 거센소리가 울렸다.
콰아아아앙!
예상한 대로 화약부터 터졌다.
아걸이 심지 타는 냄새를 맡았을 때, 그때부터 불화살 몇 개는 터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화르르륵!
뒤이어 불길이 확 솟구쳤다.
화약과 불길은 아걸이 누워있던 바위를 중심으로 방원 십 장을 휘감아 버렸다.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 저 불길 속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