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275화 (275/600)

#275화. 第五十五章 도화선(導火線)(5)

몽설은 탁자 위에 놓인 서신을 지긋이 쳐다봤다.

아걸에게서 온 밀마다. 밀마 특성상 짧은 기호 몇 개만 들어 있을 것이다.

“달콤한 이야기도 없을 텐데, 뭘 그렇게 오래 쳐다봐요?”

취운이 놀리듯이 말했다.

‘오빠가 소식을 보내왔어. 훗!’

아걸은 얇은 종이에서 아걸의 생존을 읽었다.

이 서신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아걸이 무사하다는 증거다. 아걸이 ‘나 아직 살아 있어.’하고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내용을 읽기가 싫다. 내용을 읽으면 아걸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렵다.

“내용은 뭐에요?”

“안 봤어요.”

몽설이 취운을 쳐다봤다.

“상군께서 보내온 온 밀마잖아요. 그렇게 기다리는 걸 아는데 어떻게 먼저 손대요.”

“상군이라는 말 좀 안 하면 안 돼요? 영 듣기 거북해서.”

“왜요? 아걸과 혼인하지 않을 거예요?”

“혼인은 하겠지만……”

“그럼 어차피 상군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미리 부르는 게 뭐가 어때서요? 호호호!”

“어멋! 지금 놀리는 거죠?”

“호호호! 원주님은 놀리기가 너무 쉬워서 재미없어요, 호호호!”

취운이 웃었다.

“풋!”

몽설도 활짝 웃었다.

취화원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면밀히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흩어져 있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모일 수 있도록 연락망을 유지하고 있다.

몽설은 암자로 들어왔다.

사람 발길 닿지 않는 깊은 암자에서 낮에는 무공 수련을 하고, 밤에는 취화원 운영계획을 수립했다.

취화원은 허도기의 집중 공격 목표가 될 수 있다.

허도기에게 찍힌다는 것은 정도 무림의 목표가 된다는 뜻이다. 전 중원으로부터 공격받는다는 소리다.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쉽지 않다.

지금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도 불안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들이 하나둘 드러날 것 같다. 허도기가 본격적으로 수색을 시작하면 몇몇은 당장 드러난다.

스읏!

몽설은 손을 뻗어서 서신을 집어 들었다.

“일전통?”

“인간말짜?”

두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장 아걸을 이해해야 할 몽설조차도 이 밀마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밀마를 다시 봤다.

꼭 자신이 잘못 본 것 같기도 하고, 밀마 속에 다른 뜻이 숨겨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건 이상한데요? 왜 매음굴을?”

“글쎄…… 이건 생각 좀 해 봐야겠어요. 일단 오늘은 비밀을 지켜 주고, 내일 장로님과 구곡주를 불러 줘요. 이건 내 독단으로 진행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의견을 모두 들어 봐야겠어.”

몽설이 밀마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모처럼 아걸이 보낸 밀마이고, 어렵게 부탁한 것이니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이건 취화원이 손대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취화원 색깔이 크게 변질할 것이다.

“휴우! 어려운 숙제네.”

몽설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그녀는 이미 생각에 잠겼다.

‘이걸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지?’

팔 장로와 구 곡주 모두 아걸이 보낸 밀마를 돌려 봤다.

웬만해서는 한마디씩 하련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밀마를 보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 일전통 접수.

일전통이 어떤 조직 또는 어떤 문파 같으면 고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음굴이다. 퇴기들, 인간 낙오자들이 득실거리면서 최하류 인생을 사는 곳이다.

그런 곳을 접수해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살수 문파는 언제든 일전통 같은 곳으로 전락할 수 있다. 문파 내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 때문에, 혹은 살수 한두 명 때문에 몰락하는 것이 다반사다.

살수 문파가 몰락하면 인간말짜가 된다.

그래서 살수 문파는 늘 인간말짜를 경계한다. 그들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떤 살수 문파는 그들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취화원은 완전히 거리를 두어 왔다.

취화원은 살수행을 하지 않을 때는 화원에서 꽃을 가꿨다.

살수 문파이니 살인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평소에는 피를 씻어 내고 마음을 정화하라는 의미다.

끊임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마성에 빠지지 않는다.

살수가 살법에 미치면 살인광이 된다. 살인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흥분하게 된다.

이 정도가 되면 살수가 아니라 도살자가 되는 것이다.

살수는 지옥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는.

그러니 인간 세상 중 막장이나 다름없는 일전통 같은 곳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일전통 같은 곳은 여인이 장악하기에는 상당히 부적합하다. 인간말짜들이 만든 촌락이 여러 군데가 있는데, 매음굴이라면 특히 그렇다.

저들은 여인을 굉장히 얕잡아 본다. 저들에게 여인은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자기가 데리고 사는 여인조차도 돈벌이를 위해서 몸을 팔게 하는 작자들인데 여인을 어떻게 생각하겠나.

여인은 도구다.

쓸모가 있으면 마음껏 굴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던져 버린다. 그리고 새로 여인을 구한다.

저런 곳에서는 여인이 병들면 돌봐 주는 사람도 없다. 여인이 병들어 누워 있으면 집 안에 저런 게 있으니 돈이 안 들어온다고 욕지거리나 해 댄다. 본인 스스로 낫든가 아니면 다른 여인들이 돌봐 주다가 병들어 죽는다.

그러면 사내는 죽은 여인을 들에 갖다 버린다.

그것으로 끝이다.

여인에 대한 인식이 이따위이니, 여인이 마을을 지배한다고 하면 거칠게 반응할 게 뻔하다. 아예 사내를 전부 죽여 버리고 새로운 마을을 만드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이거는 곤란하겠지?”

몽설이 말했다.

“상군의 뜻은 뭐죠?”

사곡주 규화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는데, 뭔가를 잡은 거 같아. 오빠는 오직 허도기만 보고 있으니, 허도기와 관계된 것일 텐데.”

“일전통이 허도기와? 이거 말이 안 되는데. 허도기 같은 사람이 일전통?”

팔 곡주 소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누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아무리 이쪽저쪽을 살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주문이다.

몽설이 말했다.

“여기서 뭔가를 찾은 것만은 분명해. 반드시 여기를 장악할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문제는 우리가 이 일을 하기가 껄끄럽다는 거지. 힘도 들고.”

‘적랑대에 넘기는 어떨까요?’

모두가 생각한 부분이다.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적랑대는 대주가 바뀌었다. 적랑대주 임지정은 원주도 안다. 아걸도 안다. 적랑대와 취화원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기도 한다. 특히 전대 문주 아삼은 아걸의 할배다.

아걸도 그들에게 부탁하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인가가 적랑대 발길을 잡고 있어서 이번 일을 할 수 없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그들이 할 수 있다면 아걸 스스로가 취화원보다도 그들에게 말했을 것이다.

모두 침묵하자, 몽설이 말했다.

“껄끄럽긴 하지만 이 부탁, 들어줘야겠어.”

“결정되셨다면 실행에 옮기시죠. 하겠습니다.”

취운이 말했다.

“아니. 지금 우리는 다 함께 움직일 처지도 아니야. 숨어 있는 처지에 뭘 해.”

몽설이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항상 허도기를 경계해야 해. 머리 위에서 매가 노리고 있는데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어.”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다면 암행(暗行)이다. 몇몇 사람만 몰래 나가서 해야 한다.

“몇 사람만 은밀히 움직여야겠지? 내가 직접 할게. 오 곡주는 나 대신 취화원을 이끌어 줘.”

몽설이 일사천리로 말했다.

지난밤 내내 깊이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은 취화원 살수들이 맡을 일이 아니다.

일전통을 접수하면 그다음부터 취화원은 일전통이 되어 버린다.

취화원의 격이 확 떨어진다. 취화원을 대하는 무림의 인식도 달라진다. 화원보다는 쓰레기, 시궁창을 떠올린다. 명부판관을 만든 취화원이 아니라 인신매매, 살인, 유괴, 납치 등등 온갖 험악한 일로 버무려진 살수 문파가 된다.

그렇다면 일전통을 취화원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가?

그 생각도 해 봤다. 매음굴을 싹 쓸어 버리고 화원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걸이 원하는 게 아니다. 아걸은 현 상태를 고스란히 보존하면서 주인만 바뀌기를 원한다.

아걸은 야구란 자에 대해서도 말했다.

야구에 대해서는 취화원도 알아보겠지만, 매우 잔악하고 간특한 자인 것은 틀림없다. 인간말짜를 이끄는 자라면 어떤 성품인지 보지 않아도 안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야구만 제거하고 일전통을 고스란히 빼앗으라는 소리다.

굉장히 어려운 주문인데, 아걸이 말했으니 대답은 정해져 있다. 해 준다. 또 이 일을 해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취화원이 아니라 몽설 개인이 한다.

몽설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때, 팔 장로가 말했다.

“원주님도 일전통 같은 매음굴에 대해서는 경험이 전혀 없잖아요. 그쪽 사정이 어떤지도 모르고. 아무래도 이 일은 이 늙은이가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장로님, 아녜요. 이 일은……”

“더 말씀하지 마세요.”

“장로님!”

“원주님이 하는 고민, 다 알고 있어요. 세상을 오래 살면 능구렁이가 된다는데, 괜히 그런 말이 나왔겠어요? 다 보고 들은 게 많아서 그런 거지. 제가 하겠습니다.”

팔 장로가 환히 웃었다.

“장로님도 일전통 같은 곳은 모르시잖아요.”

“원주님보다는 낫죠. 킬킬!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우리 취화원이 나설 일은 아닌 것 같고, 이 늙은이가 개인 자격으로 하겠습니다. 야! 너희! 애들 세 명씩만 내놔.”

팔 장로가 일이삼사 곡주를 보면서 말했다.

“세 명이면 돼요?”

월영이 말했다.

“세 명씩이면 모두 열두 명이잖아. 나까지 열세 명이야. 암영검 열둘에 사생락 한 명. 야구란 놈이 어떤 놈인지 모르겠는데, 이 정도면 일전통을 쓸어버리고도 남아.”

“열세 명. 딱 좋아요. 그 정도면 허도기도 주시하지 않을 것 같고.”

취운이 말했다.

“장로님, 고마워서 어떻게 해요?”

“원주님도 참. 원주님이 고맙다고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 늙은이, 원주님께 목숨을 몇 번이나 빚졌는데 이렇게라도 쓸모가 있으니 천만다행이죠.”

팔 장로가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모두 아걸이 어떠한 단서를 잡았다는 것은 짐작한다. 일전통 같은 시궁창을 접수해서 뭘 할까마는 여기서부터 어떤 반전을 꾀할 게 틀림없다.

매우 중대한 일인 것이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시고요.”

팔 장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거는 인간말짜 방식이 아니죠. 여기 이런 애들은 외부로 손을 벌리지 않아요. 죽어도 자기들끼리 죽지. 얘네들을 장악하려면 얘네들 방식으로 해야 해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일이삼사 곡에서 차출된 살수 열두 명이 암자에 모였다.

팔 장로는 그들에게 평복을 내밀었다.

“무복도 벗고, 검도 놓고 간다. 취화원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모두 버려.”

“네.”

“암기는 지녀야겠지? 각자 품에 찔러 넣을 수 있는 작은 병기를 챙기도록 해.”

팔 장로는 십이살수가 옷 갈아입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옷을 갈아입었다. 살수만 병기를 놓는 게 아니다. 장로도 장검을 풀고 대신 죽장을 들었다.

“지금부터 우린 불공드리러 온 여자야.‘

“네.”

열두 명이 동요 없이 대답했다.

모두 곡주에게 말을 들었는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여살수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안다. 인간말짜들을 치러 매음굴로 간다는 사실도 안다.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일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매음굴이라는 것이 신경 쓰인다. 하지만 모두 활력이 넘친다.

상군, 아걸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걸이 원주의 반려자라서가 아니다. 아걸이 아니었으면 취화원은 존재하지도 못했다. 이런 일일지라도 아걸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기꺼이 한다.

아걸에게 보답할 사람으로 자신들이 선택된 것을 기뻐한다.

“가자!”

팔 장로가 죽장을 짚고 앞서 나갔다.

열세 명이 길을 떠나간다.

몽설은 멀리서 팔 장로와 살수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팔 장로는 배웅을 원치 않았다.

살수 열두 명을 만나는 순간부터 팔 장로의 길이 열린다. 지금, 이 순간부터 팔 장로와 열두 명은 이 세상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별동대가 되는 것이다.

“장로님 고마워요.”

몽설은 팔 장로가 굽이진 곳을 돌아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없이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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