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280화 (280/600)

#280화. 280. 第五十六章 전장(戰場)(5)

펑! 펑! 펑!

허공에 폭죽이 터졌다.

‘이제야. 눈치는 되게 없네. 벌써 움직였어야지.’

아걸은 반철도를 거뒀다.

폭죽이 터지기 무섭게 숲에 숨어 있던 자들이 일제히 뒤로 빠져나갔다. 혹여 빠지는 중에 공격당할까 봐 뒤도 안 돌아보고 재빨리 사라졌다.

이제 저들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감시조차 포기한 거다.

‘풋! 허도기.’

아걸은 피식 웃었다.

저들의 철수는 허도기 지시에 따른 것이다.

허도기가 누구를 부리는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들은 스스로 철수할 능력이 없다. 아걸을 놓쳐도 좋으니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에야 움직였다.

그래도 이들을 실질적으로 움직인 자는 야구처럼 수하들을 무자비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아걸은 계곡을 찾아서 반철도에 묻은 피를 닦았다.

허도기가 여유 있게 쫓아온단다. 그러니 서둘 필요가 없다. 자신도 충분히 생각하면서 걷는다.

쉬이잇! 파앗!

허도기가 알아볼 수 있도록 나뭇가지를 베어 놓았다.

은거 무인들과 수련하면서 터득한 자신만의 일홀도다.

형식은 볼품없지만 ‘순간의 검속’은 무척 빠르다.

뭉툭한 칼로 나뭇가지를 베어 냈는데도 면도날로 종이를 그어 놓은 것처럼 매끈하게 잘린다.

칼을 아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아본다.

“이 정도면 흔적은 충분해.”

아걸은 길을 걸으면서 툭툭 나뭇가지를 잘라 냈다.

* * *

“됐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가지.”

허도기가 마차에서 내렸다.

살인이 끝났다. 잘라 놓은 나뭇가지로 흔적을 대신하고 있다. 계속 따라오라는 확실한 의사 표시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흑후가 재빨리 다가왔다.

“따라올 필요 없어.”

“그럼 저희는 먼저 말씀드린 팽가촌(彭家村)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디로 가시는 줄 몰라서.”

“그래. 새끼 돼지는 몰라도 술은 준비해 줘. 오늘은 술 한잔하고 싶군. 순도 높은 술로 구해 놔.”

“네.”

흑후가 대답했다.

허도기는 뒷짐을 지고 걸었다.

스읏! 스슷! 스읏!

허도기는 신법을 펼쳐서 걸었지만, 급하게 서둘지는 않았다. 신법 속도가 매우 느렸다.

천천히 흔적을 따라간다.

그는 아걸이 잘라 놓은 나뭇가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

흑후는 탄식했다.

‘이건 뭐로 잘랐지?’

아걸이 잘라 놓은 나뭇가지를 보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아걸이 반철도를 쓴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안다. 만들다가 그만둔 칼처럼 볼품없는 칼이다.

그런 칼, 반철도로 자른 게 분명한데 잘린 부위가 너무 매끄럽다.

나무껍질이 전혀 일그러지지 않았다. 칼이 들어간 쪽부터 빠져나간 쪽까지 어긋남이 전혀 없었다. 원래부터 잘려서 살아왔던 것처럼 매끈하게 잘렸다.

‘이게 사람 칼 솜씨야? 제길!’

흑후는 탄식했다.

아걸이 야천을 공격했다면 야천은 피바다가 된다. 똥인지 된장인지는 꼭 맛을 봐야 아는 게 아니다. 척 보면 안다. 나뭇가지를 보면 피가 그려진다.

이런 인간을 감히 일전통 인간말짜들로 공격했으니.

공부가 이 자를 이길 수 있을까?

흑후는 처음으로 공부가 염려되었다.

공부가 아걸에게 진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그런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다. 그런데도 잘린 나뭇가지를 보자 그런 생각이 든다.

자신도 무인이다. 검을 볼 줄 안다. 검이 만든 자국, 칼이 만든 자국, 창으로 찌른 자국도 분석할 줄 안다. 허도기 같은 인간에게는 감히 무공을 거론하지 못하지만, 야천에서는 꽤 강한 무공을 지녔다고 인정받는 처지다.

그런 그의 눈에 아걸은 가히 무신처럼 보인다.

야천에서 이만한 칼을 쓰는 자는 누가 있을까? 없다!

“휴우!”

흑후는 한숨만 내쉬었다.

* * *

“찾았어!”

아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군도를 봤을 때부터 점 찍어 놓은 곳인데, 정말 있다.

깊은 동굴.

자연 동굴은 아니다. 사람이 파 놓은 인공 동굴이다.

원래 이곳은 군량을 비축해 놓는 곳이다. 상시 저장해 놓는 곳은 아니고, 군인이 군도를 이용할 경우 임시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다.

유사시가 되면 바로 이곳으로 식량을 옮겨 올 것이다.

‘후후! 이곳이 내 무덤 자리군.’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 반철도로 나뭇가지를 잘라서 동굴 앞에 던져 놓는다. 자신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허도기에게 알려 준다. 따라와라!

한 가지 더!

적랑대 살수에게 밀마를 남긴다.

동굴을 무덤 자리로 생각한 이상, 살아 나올 생각은 없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삶과 죽음은 오직 하늘 몫이다. 하늘이 살라고 하면 살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다.

스읏! 스읏!

동굴 한쪽 구석에 적랑대 살수만 읽을 수 있는 밀마를 남겼다.

‘이제 됐어.’

아걸은 서슴없이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처벅! 처벅! 처벅!

동굴은 꽤 컸다.

최소한 오백 명 이상이 일시에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준비해 놓는 곳이니 크고 넓을 수밖에 없다.

동굴 중간중간에 천정을 받쳐 놓은 부목들이 덧대어 있다. 하지만 세월이 오래 지나서인지 받쳐 놓은 나무 기둥이 잔뜩 썩어 있다. 지금 바로 무너져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 동굴 천장이 무너진 곳도 있다.

흙더미가 잔뜩 쏟아져서 동굴을 거의 절반쯤 막아 버렸다.

굉장히 위험한 동굴이다. 이 동굴을 계속 쓰려면 많은 사람을 동원해서 꼼꼼히 작업해야 한다. 동굴을 새로 판다는 심정으로 입구부터 정비해 와야 한다.

하지만 폭이 넓고 땅은 평평하다.

‘싸우기 딱 좋아.’

아걸은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빛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마침내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이 찾아왔다.

사방이 칠흑처럼 컴컴했다.

아걸은 동굴 가장 안쪽까지 들어갔다.

식량을 쌓아 놓는 곳이라서인지 족히 서른 장쯤 되어 보이는 공터가 나왔다.

높이도 좋고, 넓이도 좋다. 싸우기 딱 좋은 장소다.

아걸은 행랑에서 초를 꺼내 불을 밝혔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공을 취했다.

이제 허도기만 오면 된다.

처벅! 처벅! 처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려 퍼진다.

허도기가 오고 있다.

‘이런 소리였군.’

발걸음에 힘이 있다. 그러면서도 가볍다. 성난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맹수가 다가온다.

허도기 검을 이미 두 번이나 경험해 봤다. 그 검이 어떤 검인지 안다. 이번이 세 번째.

‘나는 여기서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당신도 죽어야겠지. 어서 와. 같이 죽게.’

아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싶은데 심장이 쿵쿵 뛴다. 피도 평상시보다 훨씬 빨리 돈다. 입이 바싹 마르고, 눈은 뻑뻑해지고, 손발이 바르르 떨리기까지 한다.

절대 강자를 만나니 아무리 평정심을 유지하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된다.

‘좋아!’

아걸은 차라리 눈을 떠 버렸다.

운공도 풀어버렸다. 평정심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 기다린다.

드디어 허도기의 모습이 보였다.

허도기도 아걸을 봤다.

아걸이 촛불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니 보지 못할 리 없다.

처벅! 처벅!

허도기가 거침없이 걸어왔다.

“묘한 곳을 골랐군.”

허도기가 동굴을 보면서 말했다.

“당신 검을 받아 낼 자신이 없어서. 혹시 어둠 속에서 싸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감각 대 감각으로 싸우자?”

“어차피 그렇게 싸워야 해. 이 촛불만 끄면 바로 어둠이거든. 이 어둠은 너무 짙어서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익숙해지지 않아. 눈앞에 뭐가 어른거려도 보이지 않을 거야.”

“후후후! 그런 정도는 받아 줄 수 있지. 마음대로.”

“그 전에 한 가지, 성검문을 어떻게 탈취했는지 말해 줄 수는 없을까?”

“네 놈 먼저. 너, 정확히 뭐야? 용골인 건 알겠는데, 내 씨는 아니니 형이 남긴 찌꺼기일 것 같고. 네놈이 뭔지부터 말해 봐. 그럼 성검문 진실을 말해 주지.”

“타협 불가군.”

스읏!

아걸이 일어섰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 줘서 그날의 진실을 듣는다면 손해 볼 것은 없다. 하지만 허도기는 그날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허도기의 눈빛이 결코 그날을 말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투욱!

아걸은 촛불을 손으로 눌러서 껐다.

그러자 동굴 안은 한 치 앞도 쳐다볼 수 없는 어둠이 몰아쳤다.

* * *

“아!”

적랑대 살수는 아걸이 남긴 밀마를 찾아냈다. 그리고 망연한 눈길로 동굴을 쳐다봤다.

동굴은 매우 부실하다. 단단하게 만든 동굴이 아니라 그냥 뚫는 시늉만 낸 동굴이다.

이런 곳에서 격전을 벌이면 무너지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허도기가 거침없이 따라 들어간 것은 승부를 단숨에 가를 수 있어서다.

아걸이 칼을 쓰는 즉시 승부가 갈라진다.

허도기가 아예 작정하면 아걸이 칼을 쓰기도 전에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다.

허도기는 그러고도 남는다.

아걸을 무시하는 판단이 아니다. 적랑대는 이번 싸움을 무척 고심했고, 연구했다. 아걸에게 일말의 승산이라도 있다면 방법을 찾아서 알려 줄 생각이었다.

결론은 절대 패배다.

“휴우!”

적랑대 살수는 탄식과 한숨을 거듭 뿜어냈다.

밀마를 적어 놓은 곳에는 작은 행랑이 놓여 있다.

살수는 떨리는 손으로 행랑을 짚었다.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건 정말 아닌데.”

그는 낮게 중얼거리면서 동굴을 쳐다봤다.

사실, 그는 망설일 시간이 없다.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야천 무인들은 가까이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흑후는 아예 산을 내려가 버렸다. 허도기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부산하게 움직인다.

그러니 야천 무인들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허도기다. 그가 곧 나올 것이다.

열 번, 스무 번, 백 번을 고쳐서 생각해 봐도 아걸이 허도기를 이길 가능성은 없다.

적랑대 살수는 행랑을 열었다.

화약! 화약이 들어 있다.

화약은 두 종류다. 하나는 화살에 매단 것으로 야구가 아걸을 공격할 때 쓰던 것이다. 그들이 도주하면서 떨구고 간 것을 아걸이 주워 모았다.

또 하나는 덩어리로 된 것이다.

야구 무리가 쓰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상당히 폭발력이 강한 화약으로 주로 군대에서 사용한다.

아걸이 전보영을 나올 때부터 가지고 나왔다.

아걸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이런 일을 시키기 위해서 적랑대 살수를 부른 것이다. 이런 일을 거침없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니까. 인정을 나누면서도 비정할 때는 비정할 줄 아니까.

적랑대 살수는 급히 움직였다.

동굴 안으로 은밀히 들어가서 썩은 부목에 화약을 설치했다.

동굴을 무너뜨린다.

아걸과 허도기를 같이 가둬 버린다.

운이 좋으면 동굴 입구만 무너질 것이다. 그러면 즉사하지는 않는다. 운이 나쁘면 동굴 안까지 전부 다 무너진다. 두 사람은 이 안에 생매장당한다.

“휴우!”

적랑대 살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화약 설치를 끝내자 심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부싯돌을 켰다.

타악! 탁!

부싯돌에서 몇 번 불꽃이 튀기더니 이내 심지에 불이 붙었다.

츠츠츠츠!

심지가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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