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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283화 (283/600)

#283화. 第五十七章 평수(平手)(3)

퍽! 퍽! 퍽! 퍽!

진동이 울린다.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많은 사람이 삽질하고 있다. 밖에서 안으로 파고들어 온다.

“네 뜻대로 안 되는 것 같은데? 지금 우리 숨 쉬고 있잖아. 호흡이 전혀 답답하지 않아. 그러면 여기 어딘가에 바람구멍이 있다는 얘기지. 이대로 죽지는 않는다는 거야. 후후!”

허도기가 웃으며 말했다.

허도기 말이 맞는다. 어디선가 바람이 들어온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야 했다.

바람이 들어온다.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누군가가 땅을 파고 있다. 땅에 묻힌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작업을 하고 있다.

모든 게 아걸 생각대로 되지 않고 있다.

허도기가 말했다.

“안 됐지만 네 생각은 틀렸어.”

휘리릭!

허도기가 허공에 검을 뿌리며 말했다.

“저 소리 들려? 사람들이 땅을 파는 소리야. 머리 위에서 삽질하고 있다고. 이건 직통으로 뚫고 온다는 말인데, 이러면 곧 어둠도 사라지나? 아걸, 승부를 빨리 내는 게 좋겠어.”

아걸은 침묵했다.

‘아직은 아니야.’

아걸은 반철도에서 힘을 얻지 못했다.

반철도가 활력 있게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여전히 힘을 잃고 축 늘어져 있다.

반철도는 무생물이다. 금속, 쇳덩이일 뿐이다. 하지만 도신일체가 되면 도기(刀氣)를 느낀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칼이 말하는 소리, 웃는 소리, 울음까지 듣는다.

반철도는 여전히 침묵한다.

‘먼저 반철도가 싸울 준비를 해야 해.’

“그런데 희한하지? 이런 곳이 무너졌는데도 여긴 멀쩡해. 공기까지 통하고. 운이 좋은 건가?”

‘그래. 당신 목숨 참 질겨.’

아걸은 솔직히 허도기에게 감탄했다.

이 상황이 되고도 살아나는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밖에서 누군가가 구하기 위해서 땅을 파내러 온다면 구출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만큼 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걸 어떻게 막겠나. 사람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하겠나.

“아걸, 네가 형님 핏줄이라면 나와 같은 허씨일 텐데, 혹시 본명은 알고 있나?”

허도기가 두서없이 말을 건네왔다.

허도기는 심심해서 아무 말이나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앞뒤 잘라버리고 이런 말, 저런 말을 꺼내는 것도 확실히 원하는 것이 있어서다.

티끌만 한 반응!

어떤 말이든 아걸이 반응하면 곧 숨이 흘러나온다. 그 한 방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숨결만 감지하면 싸움이 끝난다. 바로 절정 검이 들이친다.

순간, 아걸은 반철도가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허도기가 핏줄 운운할 때 반철도를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힘주어서 반철도를 잡은 것이 아니다. 반철도에서 일어난 도기가 진기를 잡아당겼다.

아걸은 반철도의 힘을 느끼자마자 즉시 칼을 쳐냈다.

쒜에에엑!

캄캄한 허공에 칼이 흘렀다.

아걸은 칼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소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매우 은밀한 검, 취화원의 암영검이 반철도에서 재탄생했다.

허도기의 반응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아걸은 반철도를 쓰자마자 곧바로 허도기 역시 검을 던져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허도기의 검도 보이지 않는다. 소리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감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었다. 오직 육감으로 퍼뜩!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검을 쓰고 있다. 확신한다.

반철도가 터지자 반철도에 대응해서 곧바로 검을 나왔다. 칼을 쓰는 아걸을 향해 공격해 온다.

머리, 등, 어깨, 허리…… 어디를 노리고 있을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귀에 들리는 소리도 없다. 오직 육감으로 한 지점을 타격한다. 허도기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걸을 공격하지 않는다. 느낌으로 감지되는 부분을 타격한다.

슷! 깡!

검과 반철도가 마주쳤다. 그 순간,

스륵!

허도기의 검이 슬쩍 미끄러진다 싶더니 이내 아걸의 가슴을 휙 그어버렸다.

쒜리릭! 싸아앗!

면도로 종이를 찢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도기는 검을 휘둘러서 적어도 종이라도 베었다. 살을 베지는 못했지만, 무엇이라도 베었다.

‘음!’

아걸은 부지불식간 튀어나오는 신음을 꾹 눌러 참았다.

일격을 당했다. 다행히 상처는 심한 편이 아니다. 가슴 앞자락을 살짝 스치면서 지나갔다.

원래 허도기는 병기의 부딪침을 허용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훨씬 느리므로 굳이 병기를 부딪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딪혔다.

공격을 감지하고 반격한 결과다. 눈과 귀가 배제된 상태에서 오로지 감각만으로 싸운 결과다.

지금까지 허도기가 싸웠던 방식이 아니다. 허도기는 이런 장소에서, 이런 방식으로 싸운 적이 없다. 눈과 귀를 배제한 상태에서 싸울 필요가 전혀 없었다.

지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고,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

허도기의 검이 빨라서 가슴까지 베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베지 못했다.

아걸은 물러서자마자 즉시 금창약을 꺼내 베인 상처를 문질렀다.

흐르는 피부터 지혈시킨다. 금창약을 바르는 소리가 나면 안 되기 때문에 꾹꾹 눌러 찍듯이 발랐다.

유중혈(乳中穴), 옥예혈(屋碨穴)도 눌러서 통증을 차단했다.

살짝 통증 완화하는 선에서 압혈을 한 것이 아니다. 상처에서 일어난 통증이 마비될 정도로 강하게 꼬집듯이 비틀어버렸다. 자칫 혈도에 심각한 손상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지금은 통증에 신경이 쓰이면 안 된다.

‘후후!’

아걸은 상처를 치료하면서 웃었다.

허도기의 검은 늘 일격필살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격필살에 실패했다.

‘당신도 사람이었군.’

허도기는 결코 신이 아니었다.

아걸은 씩 웃었다.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게, 입술만 살짝 비틀어 웃었다.

허도기가 인간이라는 점이 이처럼 반가울 수가 없다.

스읏!

아걸은 다시 긴장을 풀고 호흡에 집중했다.

두두둑! 후두두둑!

밖에서 곡괭이로 땅을 파는 소리가 매우 거세게 울렸다.

이 소리는 허도기에게는 희망이고, 아걸에게는 절망이다.

아걸은 그 소리조차 무시했다.

어차피 이 소리가 희망이든 절망이든 어떤 결과를 가져오기 전에 두 사람의 싸움은 끝날 것이다.

저들이 최대한 빨리 땅을 파고 내려와도 싸움은 그 전에 끝난다.

“이런! 내 검이 실패했군. 괄목상대(刮目相對)라더니 정말 그 말이 맞나? 며칠 사이에 굉장히 발전했는데? 하하! 내 검을 다 피해내고…… 응? 그런데 이게 뭐야? 이거 베였잖아? 검에 피가 묻었네. 끈끈해. 따뜻하고 끈끈해.”

스읏!

허도기가 검에 묻은 피를 손가락에 묻힌 후, 입에 넣고 쪽 빨았다.

“음! 좋은 맛이야. 좋은 느낌이고. 많이 다쳤나?”

아걸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침묵했다.

스릇! 휘리리릭!

허도기가 검을 휘둘러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공격하지 않을 테니까, 얘기해 봐. 많이 다쳤어? 치료할 시간을 줄까? 아냐. 치료는 벌써 했을 것이고…… 운기할 시간이라도 줄까? 달라고 하면 줄 수 있는데.”

아걸은 여전히 침묵했다.

위치를 숨기는 것에 생명이 걸렸다.

입김이라도 불어내면 당장 위치가 노출된다. 그 후에는 어디로 이동하던 허도기의 촉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방금 그 칼은 꽤 날카로웠어. 격검(擊劍)도 반 호흡 정도 빨랐고. 딱 반 호흡 정도 내가 생각한 곳으로 칼이 흐르지 않았다는 건데. 아주 좋은 칼이었어. 내가 계속 주절거려야지 되지? 공격하기 쉽게.”

허도기가 말했다.

“네가 내 조카라면, 형이 낳은 자식이라는 건데. 형수가 느지막하게 자식을 낳은 적이 있었나? 임신한 적은 없었는데…… 그럼 첩 자식? 너, 아비 어미 얼굴도 모르지?”

허도기 입에서 어머니에 대한 말이 흘러나왔다.

아걸은 어머니에게 아무런 애정이 없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는 현정 부인이다. 허도기의 눈길을 피해서 일부러 절에 가서 출산했다.

하지만 허도기 말처럼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흑방 살수들을 부모라고 여기면서 살았던 기억은 난다. 사부도 기억난다. 어렸을 적에 잠시 만났을 뿐인지만, 얼굴이며 풍채며 뚜렷이 기억난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들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본 적이 없으니까. 탄생할 때 부모는 봤을지 모르겠는데, 형들은 정말 일면식도 없었다.

그러니 성검문 허씨 가문에 대한 애정은 전혀 없다. 있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부모에 대한 말이 상당히 심기를 어지럽히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아걸에게는 차라리 몽설이나 할배를 언급하는 것보다도 못하다.

아걸은 허도기가 하는 말을 귓가로 흘려버리며 계속 호흡에 집중했다.

‘후우우우우!’

나가는 숨에서 거친 소리가 나지 않도록 고요함을 유지한다.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은 기본이다. 옷자락조차 꿈틀거려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은 현재 싸움 중이다.

실질적으로 싸움을 벌이는 상태에서는 이완하기가 무척 어렵다. 신경이 극도로 긴장한다.

허도기 역시 말을 하고 있지만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도 진기를 일으키고 있다. 자신처럼 극도로 긴장한 상태다. 표시를 내지 않을 뿐.

허도기는 검을 가볍게 휙휙 휘두른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검을 휘두르지 않는다. 매 검에 신경을 곧추세운다.

허도기도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점을 방금 알았다.

스으읏!

반철도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허도기는 계속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린다. 아걸은 이미 마음을 닫아버려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다. 허도기의 중얼거림은 위치 파악 용도로만 쓴다.

허도기는 아버지와 형에 대해서 말했다.

전혀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감흥은 없다. 하지만 할배에게서는 듣지 못했던 말들이다.

이 얘기를 더 들어볼까?

그렇구나. 형들의 무공은 박빙이었네. 누가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고.

세상을 보는 눈은 달라서 첫째 형은 인의를 최우선으로 꼽았지만 둘째 형은 무력을 선택했고.

허도기가 많은 말을 해줬다.

순간이다! 아걸이 다시 신형을 날렸다. 소리가 들리는 곳!

쉬이이잇!

이번에도 아걸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흘렀다.

칼이 공기를 가르지만 파공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몸이 움직이지만, 기척을 흘리지 않는다.

칼의 흐름은 만족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은거 무인들과 같이 지내면서 수련한 도법이 터져 나왔다.

칼이 지닌 속성대로 흐름을 만들어냈다. 인위적으로 칼을 쓰지 않았다. 칼의 무게가 흐름을 만들고, 그 후에 손이 따라가고, 어깨가 가고, 몸이 움직였다.

쒜에에에엑!!

검이 쏘아져 온다. 허도기가 즉시 반응했다.

그 순간, 이번에는 아걸의 칼이 먼저 움직였다.

사실, 아걸은 허도기의 검이 쏘아져 온다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에도 느꼈지만, 이번에도 감지했다.

검이 흘러온다. 바로 그 순간이다.

아걸은 검이 흘러온다고 느낀 순간, 바로 도초를 변화시켰다.

그런데 변화된 도초에 검이 닿았다. 격검 순간을 반 호흡 정도 앞당겼는데도 검과 칼이 닿았다.

허도기의 검이 그만큼 빠르다.

까앙!

거센 격타음이 울렸다. 하지만 아걸은 이번에도 반 호흡 앞서서 도초를 변화시켰다.

슈릿!

반철도가 검을 밑으로 찍어 내렸다. 그리고 일초무적도 탄궁도가 터져 나왔다.

쒜에에엑!

이번에는 분명히 파공음이 터졌다. 더는 은밀하지 않다. 가장 정직하면서도 강맹한 도초가 피어났다.

허도기의 지척에서 터진 탄궁도는 즉시 겨드랑이 밑을 파고들었다.

싹!

반철도에 살이 닿았다. 살결이 갈라졌다. 드디어 허도기를 벴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아걸도 거센 위력을 받았다. 허도기와 스치며 지나가는 순간에 검이 등을 쑤셨다.

‘큭!’

아걸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이 악물며 참았다. 두 다리에서 힘이 빠져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렸지만, 곧 중심을 잡고 몸을 단단히 곧추세웠다.

“하아!”

허도기가 비음을 흘렸다.

겨드랑이 쪽에 한칼을 맞아서인지, 음성에는 놀라움이 섞여 나왔다.

아걸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했다.

이번 검은 등에 맞았기 때문에 금창약조차 바를 수가 없었다.

“제법이군. 내 몸에 칼을 대다니. 후후! 역시 용골이라 이건가?”

허도기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방금 내 검을 피한 그 수법…… 제자들이 말한 바로 그건가? 잠기일력타를 맞고도 살았다고? 치명적인 요혈을 피하는 재주가 있다던데?”

맞다. 바로 그 수법으로 허도기의 검을 피해냈다. 비록 등을 맞기는 했지만, 사혈은 피했다. 허도기가 노린 곳은 뒤통수였다. 맞으면 즉사한다. 그것을 등으로 막아냈다.

“확실히 어둠 속에서 싸우면 네가 유리해. 좋은 방법을 찾아냈군. 하지만 이미 네 수는 읽혔어. 자, 이제 승부를 내볼까?”

휘릭!

허도기가 허공에 검을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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