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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285화 (285/600)

#285화. 第五十七章 평수(平手)(5)

스읏! 슷!

코 밑으로 미약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정신을 차리면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이다.

아직도 살아 있다.

바람이 통한다.

몸이 흙더미에 깔려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단번에 깨달았다.

무엇 때문에 혼절했는지도 알았다.

동굴이 무너지면서 흙이 밀려 내려왔고, 십이살환도가 뚫은 구멍까지 가득 채워 버렸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던 아걸까지 압사, 매몰시키려고 했다.

스으으! 스으읏!

아걸은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에 집중했다.

혼절하기 직전에 작은 굴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토록 거대한 폭발에도 함몰되지 않고 버틴다는 것이 신기했다.

짐승들이 굴을 이렇게 잘 뚫나?

바람은 불어오는데 빛은 보이지 않았다.

즉, 굴이 굽어 있거나 빛이 스며들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있다는 뜻이다.

굴은 관통되어 있다.

굴 한쪽이 막혀 있다면 공기는 들어올망정 바람까지 스며들지는 않는다.

아걸은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다. 몸이 완전히 땅속에 박혀 있어서 꼼짝달싹할 수가 없다. 공기를 들이쉴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어깨부터 흔들어 봤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했다. 움직임을 일으키면 공간이 생긴다. 티끌만 한 공간이라도 생기면 조금씩 조금씩 공간을 넓혀 간다.

머리를 흔들고, 어깨를 흔들고, 조금씩 밑으로 내려가서 손의 자유를 얻게 되면 그때부터는 쉬워진다.

서둘지 않는다. 공기가 통하고 있지 않나. 숨을 쉴 수 있으니 빠져나갈 길도 찾을 수 있다.

아걸은 문득 허도기가 생각났다.

허도기는 빠져나갔을까? 자신에게는 십이살환도가 있어서 방도를 찾아냈다. 하물며 자신보다 고수인 허도기에게 이런 수법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흙더미에 깔려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죽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자신이 혼절했던 상황과 똑같은 경우가 그에게도 닥쳤을 것이고, 운이 없어서 공기 통로를 찾지 못했다면 죽는 수밖에 없다.

이런 자연재해에는 아무도 당하지 못한다.

비록 동굴 폭파가 인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지만, 동굴이 무너지면서 일으키는 힘은 당할 수가 없다.

동굴 주변에 공기 통로가 거미줄처럼 깔려 있다면 모르겠거니와 허도기가 이런 통로를 찾아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분명히 매몰되어서 죽었을 것이다.

‘이런 굴을 찾아낸 것은 정말 기적이야. 기적? 기적!’

아걸은 얼른 떠올린 생각으로 눈을 부릅떴다.

이 굴…… 뱀이나 너구리가 만든 굴이 아니다. 그런 굴이라면 첫 번째 동굴 붕괴가 일어났을 때 같이 무너졌다. 벌써 공기 구멍이 차단되었을 터이다.

이 공기 통로는 무척 단단하다.

뱀이나 너구리가 파놓은 굴이 아니다. 동굴을 만들 때부터 기구를 사용해서 땅을 다져가며 파 놓았다. 작은 통로 속에서 무너지지 말라고 횟가루도 뿌려져 있을 것이다.

이 굴은 동굴을 팔 때 같이 만들었다.

동굴은 아무렇게나 얼기설기 만든 듯해도 사실은 치밀하게 파 놓은 전투 동굴이다.

이 안에 식량을 쌓아 놓으면 쥐가 와서 갈아 먹는다. 아니면 썩는다. 동굴은 습기가 많아서 쉽게 부패한다. 이런 점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공기 통로를 만든다.

일반 동굴에서는 볼 수 없고, 전투용 동굴에서만 찾을 수 있는 특이한 장치다.

자신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왔다면 허도기도 이런 굴을 찾았을 가능성이 크다.

‘나중에. 밖에 나가 보면 알겠지.’

아걸은 허도기에 관한 생각을 접었다.

첫 번째 폭발은 적랑대 살수가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폭발은?

동굴 천장은 인위적으로 붕괴했다. 무너진 동굴 안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폭파했다.

폭파 목적은 너무도 분명하다. 완전 매몰이다.

“후우우우!”

아걸은 숨을 길게 토해 냈다.

모든 생각을 잊어버리고 지하 무덤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이나 생각해 보자.

몸을 움직여서는 공간이 생기지 않는다.

‘땅에 묻히면 빠져나오지 못한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

아걸은 남만(南蠻)을 떠올렸다.

할배와 함께 남만에 갔을 때, 남만족 전사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타 부족과 전쟁을 치러서 사로잡은 포로는 일단 땅에 묻는다. 머리만 남겨 놓고 몸을 완전히 묻는다.

생사는 그 후에 결정한다.

머리만 남기고 묻혀 있는 자들은 온갖 희롱의 대상이 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에 침도 뱉고, 오줌도 싼다. 어린아이들이 와서 발로 차는 경우는 대수롭지도 않다. 운이 나쁘면 마차에 깔려서 죽기도 한다.

땅에 묻힌 자들은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누군가가 꺼내 주기 전에는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것이 전통적인 풍습이니,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놔야 한다. 내가 사로잡혀서 땅에 묻혔을 경우,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럴 때 사용하는 공부가 있다. 공음탄명공(空音彈鳴功)!

“후우우웁!”

진기를 이끌어서 안으로 응축시켰다, 그리고 강하게 퉁겨 냈다.

퍼엉!

진기가 흙을 두들긴다.

흙은 일절 반응하지 않는다. 몸속에서 진기로 퉁겨지는 힘이 너무 미약해 나무젓가락조차도 움직이지 못한다. 몸이 경직되어 있어서 진기 발출조차 쉽지 않은 탓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진기를 응축시켰다가 퉁겨 냈다.

퍼엉! 퍼엉! 퍼엉!

무형의 진기가 끊임없이 석벽을 두들겼다. 물결 위에 퍼진 파문이 바위를 두들기듯이.

물론 진기가 부딪치는 소리도 밖으로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크지 않다. 하지만 아걸은 진귀 울림을 분명히 들었다. 흙이 반응하는 현상도 느꼈다.

공음탄명공은 남만족이 찾아낸 무공이다. 땅에 묻혔을 때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공부다.

사각! 사각! 사각!

쥐가 고구마를 갈아 먹듯이 반철도로 조금씩 땅을 파헤쳐 갔다.

손만 움직일 수 있으면 땅속에서 헤쳐 나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공기까지 충분히 들어오고 있으니 여건은 매우 좋은 편이다.

위에서 파낸 흙은 발밑으로 밀어낸다.

아걸은 뱀처럼 온몸으로 움직여서 조금씩 이동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지금 자신은 살았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만 알면 된다. 할 수 있고,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땅을 파는 것뿐이다.

‘인기척이 전혀 없어.’

가끔 손을 멈추고 쉴 때는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가 밖에서 떠든다면 뻥 뚫린 구멍을 통해서 들려올 것이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가끔 까마귀 울음소리만 들려온다.

어느 순간,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웃!”

아걸은 빛을 보자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바로 눈을 감아 버렸다.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을 보면 마음이 바빠진다.

빛이 보인다는 것은 탈출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금방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진다.

동시에 침착하고 차분하게 움직이던 손길에 다급함이 묻어난다.

그런데 몸은 꼼짝하지 못한다.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이 극도에 이르면 거의 반쯤은 미치게 된다.

일종의 정신적인 충격 상태라고 할까? 혈류가 빨라지고, 숨이 막히고, 움직이지 못하는 몸은 마구 꿈틀거리고…… 그러다가 머리에 있는 혈관이 터지기도 한다.

땅속에서 탈출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눈을 감고 차분히 빛을 생각했다.

빛이 있다. 곧 탈출한다. 급하게 서둘지는 말자. 아무리 길어 봤자 몇 날 며칠이 걸리겠나. 겨우 반나절이면 뚫고 나간다. 절대 서둘지 말자.

빛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한 다음, 차분히 눈을 떴다.

빛이 들어오는 거리는 매우 짧은 것 같다. 하지만 반철도로 헤쳐 나가기에는 굉장히 먼 거리다. 굼벵이처럼 느리게 기어가고 있으니, 족히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스륵! 스륵! 스륵!

앞에 있는 흙을 갈아서 배 밑으로 내민다. 배에 붙인 손으로 흙을 끌어 내려서 더 밑으로 긁어내리고, 몸 전체를 이용해서 스륵 기어간다.

아걸이 사용하는 방법은 중원의 지둔공이 아니다. 지둔공을 펼치기 위해서는 철수(鐵手)가 필요하다. 너구리 발톱처럼 손에 끼는 쇠갈고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 도구의 도움 없이 지둔공을 펼치기는 힘들다.

아걸도 지둔공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펼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천천히, 천천히…… 몸으로 길을 뚫는다.

“하아아아!”

아걸은 굴 밖으로 나오자마자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지하 무덤에서 탈출했다.

고개를 돌려서 자신이 빠져나온 곳을 보자, 아걸 자신도 기가 막혀서 혀를 내둘렀다.

“하!”

탄식이 절로 나온다.

자신이 이런 곳에서 빠져나왔다. 분명히 동굴이 있었는데, 서서 걸어 들어갔던 입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평지가 되었다. 아니, 평지도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밑으로 푹 꺼져 있다.

화약을 다룰 줄 아는 자가 폭발을 일으켰다.

적랑대 살수는 이토록 고명하게 화약을 다루지 못한다.

입구를 막은 폭발은 적랑대 살수가 일으킨 것이지만 동굴을 평지로 만든 폭발은 다른 사람이 했다. 누군가가 아걸과 허도기라는 두 맹수를 동시에 잡고자 했다.

누가 되었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바람직한 행동을 했다.

허도기가 이런 지옥 속에서 빠져나왔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빠져나왔을까? 빠져나오지 못했기를 절실히 바란다.

얼마 동안이나 흙 속에 매몰되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배가 고프다. 배고픔을 넘어서 속이 쓰리다.

‘꿩이라도 잡아먹을까?’

꿩을 찾아다닐 정신도 없다. 너무 배고파서 현기증까지 치민다.

갈증은 또 어떤가? 생나무라도 물어뜯고 싶을 정도로 목이 타들어 간다.

아걸은 계곡부터 찾았다.

배고프고 갈증을 이기지 못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을 떴다. 그리고 혀를 댔다.

벌컥벌컥 들이켜는 대신 일단 입안부터 적신다. 그리고 천천히, 조금씩 물을 마신다.

배고픔도 계곡에서 해결했다.

물속에 있는 작은 송사리를 이십여 마리 정도 잡았다. 그것을 작은 나뭇가지에 꿰어서 불에 구워 먹었다.

물을 마시고, 뱃속에 뭔가 들어가자 비로소 정신이 든다.

먹는 것에 몸이 이토록 급하게 반응할 정도라면 매몰된 지 적어도 삼 일 이상 지난 것으로 추측된다.

개울물에 몸을 씻었다.

흙물이 밴 옷도 깨끗이 빨았다.

그러면서도 주위를 예리하게 살폈다. 허도기가 살아 나왔을 수도 있고, 누군가 감시를 붙여 놨을 수도 있다. 무너진 동굴에서 살아 나오는 자가 있는지 살펴보고 있을 수도 있다.

허도기를 따르는 무리가 숲 주변에 가득 깔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없다. 모두 철수한 듯하다.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추종하는 무리라면 우두머리가 나오지 않는 한, 철수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면 당장 땅을 파헤쳐 내려가서 시신이라도 수습한다.

폭발이 너무 커서 엄두가 나지 않았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허도기가 나오지 않았는데, 개미 그림자조차도 찾을 수 없는 것은 비정상이다.

아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든 게 이상하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는 게 전혀 없었다.

아걸은 숲을 거닐면서 많은 시신을 봤다.

인간말짜들의 시신과는 사뭇 다르다. 일전통 사람들은 행색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더러웠다. 천민 중 천민이라고 할까? 이빨도 닦지 않아서 누렇게 변색하였고, 썩기도 했다.

그런데 숲에 죽어 있는 자들은 겉모습 자체는 깨끗하다.

자신이 허도기를 유인하면서 죽였던 바로 그 자들이다.

‘누가?’

이 자들을 죽인다는 것은 허도기에게 검을 들이댄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가 허도기 무리를 죽였을까?

취화원, 적랑대, 전보영?

아걸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너무 극소수라서 모든 행동이 읽힌다.

그들은 아니다.

아걸은 죽은 자들의 사인을 살펴봤다.

그리 고명하지는 않다. 매우 둔탁한 칼에 죽었다. 솜씨도 형편없다. 그저 무지막지하게 칼을 휘둘렀다.

개중에는 매우 날카로운 검에 죽은 자도 있다.

정확하게 사혈을 베어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고수가 죽인 것이다.

하수에게 죽은 자, 고수에게 죽은 자.

시신들이 마구 뒤엉켜 있는데, 숫자가 무려 백여 구가 넘는다.

자신이 땅속에서 사투를 벌일 때, 지상에서도 상당히 많은 일이 벌어진 것 같다.

아걸은 산에서 내려가지 않고 팔베개하고 누웠다.

하루 정도는 푹 쉰다. 몸을 정상으로 만든 후, 산에서 내려간다. 그동안 허도기가 살아나왔는지 단서도 찾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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