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第五十八章 사자(死者)(2)
아걸은 숲에서 시신 한 구를 찾아냈다
시신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적을 베어야 할 검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벴다. 아마도 마지막 순간에 너무 급해서 실수를 저지른 모양이다.
‘살수.’
아걸은 죽은 자를 알아냈다.
적랑대 살수다. 자신이 남긴 밀마를 보고 동굴을 무너뜨린 바로 그 살수다.
그가 숲에 죽어 있다.
그는 매우 고통스럽게 죽었다. 뭉툭한 병기가 어깨에 박혔다. 빗장뼈를 자른 것이 아니라 으깨 버리면서 살을 파고 들어갔다.
하지만 병기는 둔탁한 종류가 아니다. 살이 거칠게 찢기기는 했지만, 날 부분으로 찍힌 자국이 분명하다. 날이 뭉개진 칼로 내리친 것 같다.
어깨를 가르고 들어온 칼이 폐까지 짓뭉개 버렸다.
적랑대 살수를 죽인 자는 무공이 약하지 않다. 매우 강한 편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거친 상처를 낸 것은 병기가 투박해서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누구나 병기는 잘 갈아 놓는 편인데.
누가 이런 식으로 칼을 쓸까? 덕분에 흉수를 찾아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주변에는 적랑대 살수처럼 거친 병기에 죽은 자들이 몇몇 보인다.
살수에게만 거친 병기를 쓴 것이 아니다. 원래 이런 병기를 쓰는 자다.
살수는 그 와중에 자신의 칼로 자신의 허벅지에 상처를 냈다. 적랑대 살수라는 표식이다. 마지막 순간에 자상을 낼 수 있으면 좋고 남기지 못하면 어쩔 수 없고.
일단 자신이 적랑대 살수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자해를 했다.
아걸은 사수의 몸을 뒤졌다.
우선 전낭부터 찾았다. 있다. 전낭이 있고, 안에는 동전 몇 푼이 들어 있다.
‘이게 그대로 있어?’
살수를 죽인 자는 적어도 돈이 목적은 아니다.
살수의 품에서는 밀마를 남길 때 쓰는 도구들도 나왔다.
여인들이 쓰는 연지는 색깔을 표시할 때 사용한다. 날이 하나 부러진 표창도 있다. 대부분 밀마는 글이나 그림으로 남기지만, 급할 때는 물건을 던져 놓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날 부러진 표창은 급하게 추격한다는 밀마다.
적랑대 밀마는 굉장히 다양하다.
그런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떤 사실을 캐내기 위해서 살수를 죽인 것도 아니다.
‘운이 없었군.’
아걸은 적랑대 살수의 죽음이 적랑대나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적랑대 살수의 의복은 주변에 죽어 있는 자들과 흡사하다.
살수는 이들 무리와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동시에 암격을 당해서 절명했다.
적랑대는 살수를 매우 신중하게 선별해서 내보낸다. 무공은 당연히 살펴본다.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살수는 실패할 가능성이 커서 절대로 내보내지 않는다.
일단 중원에 나온 살수라면 무공이 상당한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당했다면…… 살수를 죽인 자는 꽤 강하다.
‘찾아보면 알겠지.’
누군가 이들을 살피러 올 것이다. 아니면 시신을 수습하러 올 것이다. 그때, 사건 현장이 흐트러져 있으면 괜히 경각심만 높여 주는 일이 된다.
아걸은 살수를 내버려 두고 숲에서 물러났다.
아걸은 지난 밤에 하루 동안 푹 쉬면서 이것저것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제일 먼저 급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무공을 증진시킬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지만 이 부분에는 마땅한 대답이 없다. 지금까지 정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기 때문에 여기서 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무공에 관한 생각은 접어 놓는다.
그저 매일매일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무공수련을 거듭한다.
우선 당장은 그렇게 하자.
하루 이틀 사이에 허도기의 검을 상대할 수 없는 이상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다는 생각도 필요할 것 같다.
자신은 차분히 수련만 해 나가는 것이다.
더불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는 이번 일로 인해서 아주 큰 장점이 생겼다.
세상은 두 사람이 죽은 것으로 안다.
허도기도 죽었고, 아걸도 죽었다.
허도기가 정말 죽었는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고, 자신이 죽은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세상에 자신의 소식을 알려 줘야 할 적랑대 살수가 죽었다.
취화원, 적랑대, 전보영…… 그 어느 쪽도 자신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한다.
지인들이 알지 못하는데 적은 어떻게 알겠나. 적은 더 알지 못한다.
아걸이 매몰된 구덩이 속에서 빠져나왔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죽은 자! 사자(死者)!
맞다! 아걸은 죽은 자다.
이 점을 최대한 활용해 볼 생각이다.
아걸은 금수(禽水) 강변을 걸었다.
강둑길을 쭉 따라가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인근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마을, 일전통이다. 동전 한 닢이면 욕정을 풀 수 있는 매음굴이다.
그런데 일전통으로 가는 길이 매우 한적하다.
추레한 사내들이 득실거려야 마땅한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팔 장로. 거참……’
아걸은 일전통에서 일어난 변화를 눈치챘다.
팔 장로가 일전통을 공격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다.
팔 장로는 아비에게 팔려서 노예가 되었다가, 노예상에게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맞은 후에 버려진 과거가 있다. 어린 노예 계집이 매를 맞다가 죽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고, 그러면 오물통에 던져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팔 장로에게는 벌써 오십 년도 넘은 옛일이지만 아직도 잊어버리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일전통 모습을 보인다? 일전통을 장악하라고 검을 내준다? 인간말짜들이 여인을 학대하고 갈취하고 짓뭉개는 모습을 보게 한다?
몽설이 사람을 잘못 택했다.
일전통을 장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겠지만, 아걸이 원하는 형식으로는 접수하지 못한다.
아걸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전통을 흡수하려면 매우 질기고 긴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일전통의 외형을 보존한 채, 내부의 중요 인물 몇몇만 갈아 치워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일전통이 정비된 모습을 보니 일거에 싹 쓸어버린 것 같다.
팔 장로가 아주 단단히 화가 나서 아주 매서운 살검을 떨쳤다.
아마도 반항하는 자들을 싹 죽여 버렸을 것 같다. 인간말짜 중 어설프게 대든 자들도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야구는 무사할까? 무사하지 못할 것 같은데.
모든 여인이 매음하지 못한다.
일전통으로 들어가는 강둑길이 매우 한산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벌써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일전통에서 일어난 변화가 널리 알려졌다.
동전 한 닢에 욕정을 풀려는 사내들이 발길을 끊었다.
지금까지 여인들을 들들 달달 볶았던 사내들은 검하고혼(劍下孤魂)이 된다. 검날 아래 목숨을 잃는다.
여기에는 몇 가지 큰 문제가 있다.
일전통 여인들이 몸을 팔고 싶어서 파는 게 아니다. 동전 한 닢에 몸을 팔지만, 그 동전 한 닢은 바로 쌀이 되고 반찬이 된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행위다.
그 행위를 중지시킨다면 그에 합당한 무엇인가를 주어야 한다.
먹고 살게는 해 줘야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 문제는, 일전통 여인들이 사내들한테 핍박을 당하고 갈취를 당하면서도 그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그 사내들이 바로 여인들을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사나운 손님들, 흉포한 손님들로부터 육신을 지켜 준다.
기둥서방이 있다는 말은 나를 보호해 줄 사내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매음 행위를 못 하게 하려면 여인들을 먹여 살릴 뿐만 아니라 보호까지 해 줘야 한다.
그러면 되지. 밥만 먹고 사는데 무슨 큰돈이 필요하나? 사내들은 싹 없애 버리고, 매음 행위도 중지시키고 그렇게 살면 되지.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언제까지?’라는 문제다.
당장은 일전통 여인들을 먹여 살린다고 해도, 결국은 여인들이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하나? 평생 술을 따르고 몸을 팔며 살아온 여인들이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다못해 옷 한 벌 짓지 못하는 여인들이 많다.
지금까지 하던 것을 당장 중지하라는 말은 그 여인들에게 일전통을 떠나라는 말이 된다. 여기서는 안 되니까 다른 곳에 가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라는 말과도 같다.
팔 장로는 일전통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
‘확실히 달라지긴 했어.’
길가를 정비한 흔적까지 보인다.
판잣집들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움막이 세워져 있었던 듯한데 말끔히 소각되었다. 모두 불에 타서 재만 남았지만, 건물이 있었다는 흔적만은 뚜렷하다.
야구는 일전통에 들어온 손님에게 일정한 세금을 받았다. 움막은 아마도 그런 장소인 것 같다.
‘팔 장로가 단단히 화났군.’
아걸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일전통은 변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잣집 앞을 걸어가도 그를 붙잡는 손이 없다.
매음 행위, 호객행위가 일절 사라졌다. 옷깃을 잡아끄는 손길도 없고, 말을 거는 사람도 없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허리를 숙여 판잣집 안을 들여다봤다.
안에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오지 않는다. 뭔가 잔뜩 겁에 질린 듯 안에 들어박혀 있다.
‘도대체 얼마나 겁박을 한 거야?’
아걸은 고개를 내두르면서 골목을 걸었다. 그때!
“야!”
골목 안쪽에서 차가운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아걸이 고개를 돌려 여인을 쳐다봤다. 순간,
쒜에에엑!
벼락같이 검이 날아왔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왜 검을 쓰는지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무조건 검부터 쏘아져 왔다.
‘음!’
아걸은 침음했다.
여살수의 행동에서 아주 거친 모습이 읽혔다. 사내라면 무조건 검부터 날리고 보는 배타적인 모습도 보였다. 사내를 마치 벌레 보듯 징그럽게 쳐다봤다.
아걸은 검을 피하지 않았다.
검음이 매섭기는 하지만 살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죽일 생각으로 검을 떨쳐 낸 게 아니다.
슷!
검이 순식간에 날아와 목에 닿았다.
‘암영검!’
아걸은 눈을 끔뻑이면서 여인을 쳐다봤다.
취화원 살수인 것은 분명한데, 낯설다.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구곡주 휘하의 살수일 것이다.
팔 장로가 살수 몇 명을 데리고 나갔다고 하던데, 그중에 한 명인 것 같다.
“뭡니까?”
아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긴 뭐 하러 왔어!”
여인은 검을 댄 이유는 말하지도 않고 할 말만 했다.
여인은 아걸을 알아보지 못했다. 사람은 모른다고 쳐도 무위조차 읽지 못했다. 아걸이 무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진하게 떠올렸던 경계심마저 늦췄다.
아걸은 취화원에서 말하는 퇴빙을 구사하는 중이다.
진기 일체를 안으로 감췄다. 날카롭다거나 맑은 기운은 안으로 스며들었다. 겉으로는 혼탁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건강하지만 무공은 알지 못하는 보통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일부러 퇴빙을 구사하고 있다.
그래도 절정 고수의 눈은 속이지 못할 터인데, 여인은 매우 쉽게 속고 있다.
아걸이 겁에 질린 음성으로 말했다.
“일전통이라서 왔는데……”
아걸은 저항 의사가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인 후, 천천히 오른손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 역시 천천히 빼냈다.
손가락에는 동전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일 전이면 회포를 풀 수 있다고 해서.”
“퉷!”
갑자기 여인이 아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더러운 새끼! 꺼져!”
“소저. 그게 무슨 말……?”
“죽을래, 꺼질래!”
여인이 살기를 띠었다.
이번 살기는 진짜다. 물러서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극명하게 드러난 살기는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팔 장로와 여살수들이 일전통의 현실을 보고 몹시 화가 난 것 같다.
‘이거 곤란한데.’
아걸은 살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여살수의 모습을 보면 일전통 사내 중 상당수가 죽은 것으로 예측된다. 취화원 살수가 무공을 모르는 자신에게까지 암영검을 들이댔다.
인간말짜들을 어떻게 공격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들이 진심으로 암영검을 펼쳤다면 인간말짜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갔을 것이다.
어떻게 숨어서 공격하는 살수들을 당하겠나. 그것도 어둠의 꽃인 암영검을 쓰는데. 한 사람이 3명씩만 죽여도 하룻밤에 30명이 죽어 나간다. 그렇게 열흘만 지속하면 삼백 명이다. 살아남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원래 아걸이 취화원을 시켜서 일전통을 접수한 것은 일전통을 통해서 허도기의 배후로 침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전통이 이런 식으로 망가졌다면 일전통을 이용하자는 계획은 틀어진다.
“이 새끼, 말 안 들려! 죽여줘?”
여살수가 사납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