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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288화 (288/600)

#288화. 第五十八章 사자(死者)(3)

“난 사실 야구를 만나러 왔는데. 보아하니 이곳 형세도 변한 것 같고…… 야구가 아니더라도 지금 이곳을 이끄는 사람과 말할 게 있는데, 안내해 줄 수 있습니까?”

아걸이 차분하게 말했다.

아걸의 말투가 변했다. 동전 한 닢에 욕정을 해소하기 위해서 일전통을 찾아온 한량 음성이 아니다. 매우 냉정하게 차분한 음성이어서 진중함이 느껴진다.

아걸은 이번 음성에 진기를 약간 실었다.

일전통 입구에서 투덕거리면 좋지 않다.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

스읏!

여살수가 검을 더 깊이 찍어 눌렀다. 여차하면 목을 베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풍겼다.

“너, 너 누구냐!”

여살수는 이제야 아걸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퇴빙을 보였던 자가 퇴빙을 깨면 더 무서워 보인다.

아주 약간만 진기를 드러내도 속았다는 느낌 때문인지 더 강하고 악랄하게 보인다.

“보아하니 야구가 축출된 것 같은데, 지금 이곳을 이끄는 사람이 누구요? 아! 누군지는 알 것 없고,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안내해 줄 수 있는지.”

아걸이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아걸이 왜 팔 장로를 모를까? 안다.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면 당장 여살수가 팔 장로에게 데려갈 것이다. 굳이 여살수에게 신분을 말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런데 지금은 말하지 않았다. 여살수가 대충 눈치를 채고 데려다주기만 바랄 뿐이다.

지금 자신은 사자다. 죽은 자다. 아걸이라는 이름은 당분간 쓰지 않을 생각이다. 이름 모를 동굴에서 폭파와 함께 사라져 버린 인간이 된다.

이곳에서 신분을 밝히면 당장 세상에 알려진다.

이곳 인간말짜들이 모두 죽고 여인들만 남아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믿지 못한다. 그 여인들도 팔 장로 쪽보다는 일전통 야구 쪽에 더 정감을 품고 있다. 자신들을 홀대하고 착취하고 약탈한 사내들에게 더 애정을 느낀다.

“아니, 넌 기분이 나빠!”

쉣!

여살수가 검을 그어 냈다.

아걸은 반철도를 헝겊에 둘둘 말아서 등에 멘 상태다. 그러니 반철도를 꺼내지 못한다. 아니, 굳이 꺼낼 필요도 없다. 아걸의 눈에는 여살수의 검초가 환하게 보였다.

쉬이잇!

아걸은 아슬아슬하게 암영검을 피해 냈다.

검이 간발의 차이로 이마를 스치며 지나갔다. 되돌아서 찌른 검도 실낱같은 차이로 목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걸은 촌경을 구사했다.

검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피한다. 몰안은 암영검을 매우 느린 검초로 변화시켜 준다. 도신일체를 이룰 수 있는 눈으로 암영검을 보면 공기를 찢는 흐름까지 보인다.

여살수는 약이 오르는지 더욱 악착같이 검초를 전개했다.

구곡주 정도만 되어도 아걸의 움직임과 간신히 피한 움직임을 구분해 낼 터이다. 하지만 여살수는 아직 그런 정도까지 눈이 뜨이지 못했다.

‘아! 어쩔 수 없네.’

아걸은 시간을 끌지 않기로 작심했다.

여살수를 설득할 수 없다면 빨리 제압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다.

암영검을 왼팔 쪽으로 유도했다. 심장에 허점을 드러내자 여지없이 심장을 공격해 왔다.

쉐에에엑!

아걸은 암영검을 왼팔 옆으로 흘려보냈다. 동시에 왼발을 들어서 엄지발가락 끝부분으로 명치를 꾹 찌르듯이 걷어찼다.

“컥!”

여살수가 헛바람을 토해 내며 무너졌다.

아걸은 여인의 손에서 검을 낚아챘다.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검을 꽉 쥐고 있었지만, 아걸의 금나수에 힘없이 검을 놓아 버렸다.

아걸이 검을 여인의 목에 겨눴다.

“인제 그만 안내하지?”

순간, 여인의 얼굴에 절망감이 어렸다.

그녀는 이제야 아걸이 감당하지 못할 고수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순간, 아걸은 불길한 예감이 치밀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일이 벌어졌다.

여인이 검을 향해서 자신의 목을 들이밀었다.

아걸은 반사적으로 검을 뒤로 빼냈다. 촌경 일촌살타가 여기에서도 터졌다.

아걸은 여인이 움직이기 전, 찰나 전에 여인의 의도를 알았다. 여인이 묵을 들이밀 때, 아걸은 이미 검을 뒤로 빼내고 있었다. 행동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알고 빼낸다.

이것이 허도기와의 싸움이다.

허도기를 능가하려면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대처하는 선을 뛰어넘어야 한다.

여인은 자신의 칼에 자진하려고 했지만 용납되지 않았다.

“휴우! 어쩔 수 없군.”

아걸은 목 옆, 천정혈(天鼎穴)과 부돌혈(扶突穴)을 꾹 눌렀다.

여인은 단박에 풀썩 쓰러졌다. 자신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기도 전에 무너졌다.

아걸은 여인을 옆구리에 끼고 걸어갔다.

스스스! 스스슷!

주변에 여살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명 또 한 명.

아걸은 저들의 존재를 분명하게 파악했다.

그녀들은 아걸의 무공을 봤다. 그래서 쉽게 달려들지 않는다.

아걸이 도망갈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서둘 필요도 없다. 자신 없는 정면 대결보다는 살수 방식으로 암살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스스스슷!

그녀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은밀히 움직였다.

‘여섯 명.’

아걸은 여섯 명까지 기척을 찾아냈다.

그녀들이 지극히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무념 속에서 일으킨 청각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풋! 이거 팔 장로 한 번 만나기 되게 힘드네,’

아걸은 피식 웃었다.

일전통에 그래도 사람 사는 집 같은 것이 몇 채 있다. 거적때기로 둘둘 감아 놓은 집이 아니라 그래도 흙벽이라도 발라 놓고 너와라도 얹어 놨다.

아마도 야구가 살았을 집으로 추측된다.

아걸은 그 집을 향해서 걸어갔다. 팔 장로가 일전통을 장악했다면 틀림없이 저 집에 있을 것이다.

삐익! 삐이익!

호각 소리가 울렸다.

“휴우!”

아걸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철수하라는 취화원 신호다. 취화원 신호는 아걸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주위에 늘어선 여살수들보다 아걸이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팔 장로가 자신을 알아봤다.

하지만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자신을 알아봤으니 당장 달려올 법도 한데, 오지 않는다. 팔 장로는 아걸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움직이는 이유를 추측해 냈을 것이다.

여살수들은 철수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걸을 에워싸고 은밀히 쫓는다. 하지만 쫓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흉흉한 살기를 드러냈는데 호각이 들린 후부터는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토끼몰이 하듯이 아걸을 한쪽으로 밀어 넣고 있다.

아걸은 움막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앞쪽에서 강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앞으로 가지 말라는 것이다. 방향을 바꿔서 다른 쪽으로 가라고 한다.

어디로? 살기가 없는 곳이다.

삼 방향에서 살기가 뻗어 나오고 있으니 발길을 옮길 방향은 한쪽뿐이다.

집으로 가지 말라. 강으로 가라.

아걸이 강을 향해서 방향을 틀자 당장 살기가 누그러졌다.

확실히 살기로 길을 인도하고 있다.

처벅! 처벅!

아걸은 마을을 관통해서 강가로 갔다.

강둑에 올라서자 왜 자신을 강으로 몰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팔 장로가 강가에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 아걸을 봤지만, 대화 장소로 부적합하다 싶어서 사방이 확 트인 강으로 유도한 것이다.

아걸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여살수를 강둑에 눕혔다. 검을 옆에 놓고 다시 한번 천정혈과 부돌혈을 눌렀다. 전에는 혈을 제압하기 위해서 눌렀지만, 지금은 풀어 주기 위해서 누른다.

“후우!”

여살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정신을 차리지는 못할 것이다. 마비되었던 신경이 돌아오는 데 시간이 약간 걸린다.

아걸은 팔 장로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그를 따라붙었던 살기들이 넓게 반원을 그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강둑을 완전히 막아섰다. 마을에서는 강둑 너머의 상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여살수들에게 가로막힐 것이다.

아걸이 걸어가자 팔 장로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두 사람 사이는 와락 달려와서 두 손을 마주 잡을 정도로 가깝지만, 아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그녀 역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이다.

“허도기와 함께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믿지 않았지. 쿡쿡! 살아 있을 줄 알았어.”

팔 장로는 아걸이 가까이 다가서자, 그제야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서로 경계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허도기 소식은 못 들었습니까?”

“허도기? 전혀.”

팔 장로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저에 대한 소식은 어떤 건데요?”

“죽었다던데? 땅에 묻혀서.”

“그 소문이 어디서 흘러나왔는데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야천 쪽에서 나온 것 같아.”

“야천이요? 야천 누굽니까?”

“글쎄? 그것까지는. 알아볼까?”

“아니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아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동굴 폭파 사실을 아는 사람은 숲에서 모두 죽었다. 아걸도 죽고 허도기도 죽었다. 허도기를 따르던 수하들도 모두 다 죽었다. 소문을 낼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소문이 났다면…… 숲에서 허도기 수하들을 죽인 자다.

‘야천.’

야천 사람이 허도기 수하를 죽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숲에서 죽은 자들은 허도기의 수하가 아니다. 허도기에게 잠시 이용당한 사마외도 무리다.

야천, 어둠의 지배자들!

그들을 건드린다는 것은 상당히 피곤해진다는 의미다. 앞으로 밤에는 두 발 뻗고 자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걸은 그들을 건드리는 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을 신경 쓸 거 같으면 허도기는 아예 옷깃도 잡지 못한다.

“정확한 소식을 알아 오라고 아이들 몇을 보냈는데, 그럼 물릴까?”

“네. 그게 좋겠어요.”

아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기를 이상하게 만들어 놓으셨네요. 제가 원한 접수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뜻은 알고 있는데 이럴 수밖에 없었어. 야구, 그놈 인간이 아니야. 내 인간말짜를 많이 봤지만, 그놈처럼 악귀 같은 놈은 없었어. 그놈은 진짜 악귀야.”

“야구는 잡았습니까?”

“놓쳤지. 몸 하나는 쥐새끼처럼 잘 빼내더라고. 하지만 곧 이곳을 찾으러 오겠지. 야천에 가서 무인을 빌리는 모양인데 잘 안 되나 봐. 됐으면 벌써 공격해 왔겠지.”

“야구는 장로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글쎄? 여자들 등골 빼먹는 것이 보기 싫어서 칼을 든 무인 정도? 우리가 딱 그 정도에 맞춰서 움직였거든. 그러니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을 거야.”

“취화원 살수라고는 모르겠죠?”

“아직은. 하지만 정체가 발각되는 건 시간 문제야. 야천 무인들이 공격해 오면 우리도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고, 그러자면 취화원 절기가 드러날 테니까. 그래서 철수할까 생각 중인데. 이곳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할 것 같고.”

“아뇨. 여기를 잡고 있어 주세요.”

아걸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야구라는 자는 보통이 아니다. 주시해야 할 자다.

군도에서 야구가 사용한 화약이나 기름의 양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자신을 공격하고 남은 것만으로도 동굴을 완전히 무너트릴 정도였지 않은가. 결코, 일전통만 쥐고 있어서는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물자 조달 능력이 상상 이상이다. 보통 인간말짜가 아니다.

그만한 자가 야천에 가서 흔들고 다닌다면 야천은 상당히 어수선해진다. 기반을 잃은 자이니 무시당할 게 뻔하지만 그래도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야천의 눈길이 조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자면 팔 장로가 굳건히 일전통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야구가 들어설 공간을 없애야 한다.

“제 소식은 전하지 말아 주세요.”

아걸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렇게까지? 문주님께는 말해도……”

“제가 산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당분간 이대로 유지했으면 해요. 일단 허도기 생사부터 알아낸 후에 다른 걸 생각해야겠어요. 그러니 계속 죽은 것으로 해 줬으면 합니다. 완전히 죽은 사람이어야지 허도기가 살아 있어도 저한테 눈길을 쏟지 않아요.”

“그런데 싸움은 어떻게 됐나?”

“칠 대 삼?”

“삼이 누구?”

“당연히 저죠. 하하!”

아걸이 웃었다.

“그래도 삼이 어디야. 원래는 십 대 영이었잖아. 많이 발전했네.”

팔 장로가 웃었다.

“혹시 누가 와서 제가 누구였는지 물어보면 전보영 사람이라고 말하면 될 겁니다. 야구가 저를 공격했으니까, 전보영이 여기 와서 묻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지.”

팔 장로가 웃었다.

“오늘부터는 제 소식을 전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저와 연락을 취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전 죽은 사람입니다.”

“알았네. 부디 몸조심하고.”

팔 장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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