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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289화 (289/600)

#289화. 第五十八章 사자(死者)(4)

“아무 이상 없습니다.”

수부가 보고했다.

“오늘이 며칠째지?”

“딱 보름입니다. 보름이나 지났으니 설혹 살아 있었다고 해도 지금쯤은 죽었을 겁니다.”

“쉿!”

“아, 예. 죄송합니다.”

수부가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흑후는 수부를 사나운 눈길로 쏘아본 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 정도면 인제 그만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

당연히 안심해도 된다. 폭발이 워낙 강력했다. 흑후도 폭발력이 그토록 셀 줄은 미처 몰랐다. 땅이 아예 밑으로 움푹 함몰되어 버리지 않았나.

그런 폭발에서 살아남았다면 인간이 아니라 귀신이다.

설혹 귀신이어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벌써 보름이라는 날짜가 흘러갔다.

탈수로 죽었거나, 배고파서 뒤졌을 것이다.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

그런데…… 두 사람을 일시에 매몰시켜 버렸는데, 그러면 마음이 개운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철추를 달아 놓은 듯 무겁다.

꼭 어제저녁에 먹은 것이 소화되지 않고 위장에 턱 걸려 있는 듯한 느낌이다. 뒷간에 가서 똥 싸고 밑 안 닦은 것처럼 개운치 않다고 해야 하나?

뭔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 듯 답답하다.

‘이래서 죄짓고는 못산다니까. 아니지? 내가 죄지은 것도 없잖아? 약한 놈은 먹히는 거지 뭐.’

흑후가 자조하듯이 머리를 내둘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변을 샅샅이 뒤져 봤는데 누가 빠져나온 흔적도 없고, 깔끔합니다.”

독비가 말했다.

흑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 때문에 수하를 백삼십이 명이나 죽였다. 그 속에는 십장 열두 명도 포함된다. 정예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말 잘 듣는 충북이었는데, 그놈들을 일거에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번 일은 어떤 식으로든 말이 새어 나오면 위험해진다.

야천에 대한 충성심 따위는 없다. 하지만 야천에 몸담은 이상, 언젠가는 야천을 내 것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에 야천을 보호할 의미는 있다고 생각한다.

두 놈을 매몰시킨 것은 확실히 잘한 일이다.

그 일은 몇 번을 고쳐서 생각해 봐도 잘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러면 이 찝찝한 마음은 무엇일까?

“그거 뭐냐? 산 아래…… 산 아랫마을 사람들한테도 수소문해 봤지?”

“그럼요. 매일 점검하고 있습니다.”

“뭐 사람이라고는 그림자조차 본 사람도 없어요. 주변 십 리 넘게 사람을 쫙 풀어 놨는데, 아직은 무인 그림자도 못 봤다는 보고입니다. 안심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래. 알았다.”

흑후는 마음을 풀어 보려고 노력했다.

이제는 안심해도 돼. 하지만 안심이 되지 않는다. 뭔가가 꼭 잘못됐다는 느낌이 든다.

‘워낙 대단한 자들이라서 그럴 거야. 내가 단단히 겁을 먹은 것 같아. 후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흑후는 세차게 머리를 내저었다.

저벅! 저벅!

한 사람이 걸어온다.

“웬 놈이지?”

“무인인 것 같은데…… 처음 보는 놈이지?”

걸어오는 자가 무인인 것은 분명하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다. 그 모습이 상당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난생처음 보는 자다. 인근에서 본 적이 없다.

야천은 전 중원 모든 무인에 대한 인적 사항을 다 가지고 있다.

무공이 강한 자들의 신상 명세는 말할 것도 없다. 어느 정도만 무공이 강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끔 용모파기를 그려 놓고 숙달시킨다.

흑화방(黑火幫) 무인치고 눈썰미가 얕은 자는 없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처음 본다.

저벅! 저벅!

그가 다가와 정문 앞에 섰다.

“여기가 흑화방이라는 데야?”

사내는 다짜고짜 반말로 물어 왔다. 그것도 매우 귀찮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넌 웬 놈인데?”

“맞게 왔나 보네. 안에 흑후 있어?”

“이 새끼가! 너 누구냐고 묻잖아! 누군데 감히 흑후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는 거야!”

“흑후 좀 만나러 왔어. 나오라고 해.”

“이 새끼가 귀가 막혔나! 여기가 어중이떠중이…… 컥!”

말을 하던 무인이 격한 신음을 토해 냈다.

낯선 사내의 주먹이 어느새 경계 무인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정확하게 명치에 꽂아 넣었다.

“끄으으윽!”

복부에 일격을 당한 무인이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순간, 사내의 손이 복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붉은 핏물이 확 솟구쳤다.

“웃!”

다른 자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사내는 오른손에 쇠로 만든 철권을 끼었다.

더욱이 철권 손가락 관절 사이에는 한 뼘 정도 되는 나사정(螺絲釘) 세 개가 꽂혀 있다. 일단 쇠주먹에 맞고, 한 뼘 길이의 쇠꼬챙이 세 개가 명치를 쑤신 셈이다.

스르르륵! 쿵!

사내에게 핍박을 가하던 무인은 단박에 쓰러져서 절명했다.

“귀찮게 하지 말고…… 흑후 나오라고 해.”

“뭐 이런 개새끼가!”

옆에 있던 무인이 급하게 칼을 뽑았다. 하지만 그가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사내의 주먹이 훨씬 빨랐다.

퍼억!

쇠꼬챙이가 목덜미에 꽂혔다. 순간, 칼을 뽑아 든 무인의 목덜미에서 핏물이 확 솟구쳤다. 주먹을 맞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손을 떼자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사내는 검도 뽑지 않았다. 손에 끼고 있는 쇠 깍지만 가지고 싸움을 주도한다.

“살인이다!”

“어떤 새끼야!”

흑화방 무인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쉬이익! 퍼억! 퍽!

사내는 쾌속하게 움직였다. 거침없이 살수를 전개했다. 눈앞에 있는 자는 거침없이 죽였다.

상대가 안 된다.

사내를 가로막은 자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쓰러졌다.

사내는 아예 말을 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이제는 흑후를 나오라고 하지도 않는다. 앞에 낯선 자는 무조건 죽이고 본다. 할 말이 있으면 너희가 먼저 하라는 식이다.

“멈춰!”

독비가 사내 앞을 가로막았다.

독비는 한눈에 상대가 고수라는 것을 알아챘다.

중원 무림은 흑화방을 상당히 껄끄러워한다.

흑화방이 야천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건드리기보다는 피하는 쪽을 택한다.

감히 흑화방에 와서 난동을 부릴 자는 거의 없다.

그런데 이 자는 거침없이 살수를 쓴다.

독비는 사내의 몸놀림을 봤다. 무척 빠르다.

독비는 싸움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많이 해 봤다. 그래서 싸우는 놈을 보면 어떤 싸움판에서 놀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사내는 진짜 싸움판에서 잔뼈가 굵은 자 같다.

목숨을 건 싸움판만 전전한 자다.

독비는 칼이 날아오는 것을 이 자처럼 냉정하게 지켜보는 자는 본 적이 없다.

‘어떤 놈이기에?’

독비는 사내의 정체가 무척 궁금했다.

중원에서 고수라는 자는 거의 모두 알고 있는데 이 자는 정말 모르겠다.

독비가 작은 단도를 양손에 움켜쥐고 사내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누구냐? 사람을 죽이면서 아무 말도 해 주지 않는 건 너무하잖아? 죽더라도 무슨 일인지 알고는 죽어야지?”

“흑후 나오라고 해.”

사내가 태연하게 말했다.

“흑후가 누군데?”

순간, 사내가 할 말 없다는 듯 쾌속하게 신형을 날려 왔다.

“거참 성격 한번!”

독비는 일갈을 내지르며 급히 검초를 전개했다.

쉐에에엑!

이미 능숙해질 대로 능숙해진 화운십삼비(火雲十三匕)가 섬광처럼 터져 나갔다.

시커먼 독비가 순식간에 사방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그런데,

타앙! 탕!

독비가 자랑하던 화운십삼비가 단순한 쇠 깍지에 걸려서 튕겨 나갔다. 오른손에 들린 비수와 왼손에 들린 비수는 각기 노리는 부위가 달라서 막기 힘들다. 그런데도 사내는 간단하게 두 비수를 모두 퉁겨 냈다.

“웃!”

독비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독 묻은 비수는 어느새 선회해서 사내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그때,

퍽!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아니, 소리보다도 독비의 신형이 허공에 쿵!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사내의 쇠 깍지가 독비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독비가 내지른 독비를 퉁겨 내고, 어느새 반대로 쇠 깍지가 뱃살을 헤집고 파고들었다.

칼날이 복부를 쑤시는 충격으로 독비의 신형이 잠시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큭!”

독비는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단 일 초에 제압되었다. 이 자, 굉장한 고수다!

“크으윽!”

신음을 내뱉은 독비의 입에서 붉은 핏물이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창자가 찢기면서 피가 역류하고 있다. 창자를 찢은 칼이 위장까지 건드렸다.

“냄새가 지독해. 너희 같은 놈들이나 죽이자고 무림에 나온 건 아닌데. 이거 참.”

사내는 짜증 나는 듯 복부에 박힌 쇠 깍지를 쳐다보더니 쓱 빼냈다. 그리고는 다시 독비의 목덜미에 시커먼 칼날을 쑤셔 넣었다.

푸욱!

“꺼어어억!”

독비는 비명을 내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흑화방에서 흑후를 제외한 무인 중 최강고수라고 알려진 좌우시비, 그 중 좌비가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자 다른 자들은 감히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흑화방 무리는 늑대들이다. 싸움의 속성을 알고 있다. 싸움에서 이기는 필승전략은 인해전술(人海戰術)이다. 사람 많은 쪽이 이긴다.

아주 강한 놈이 있어서 죽이고, 죽이고, 죽이더라도 결국은 사람 많은 쪽이 이긴다. 누구든 많이 움직이면 지치게 되어 있다. 그러니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고, 검을 많이 쓰게 한다. 그러다 보면 한 칼, 두 칼 맞다가 결국은 무너진다.

반드시 사람 많은 쪽이 이긴다.

스슷! 스스슷!

흑화방 무인들이 병기를 들고 우르르 몰려나왔다.

사내는 그들을 귀찮다는 듯이 쳐다봤다. 말은 하지 않지만 ‘죽고 싶은 놈들은 와!’라고 말한다.

“공격해!”

누군가 말했다.

그러자 흑화방 무리가 마치 벌떼처럼 우르르 달려들었다.

사내는 현란하게 움직였다. 귀신처럼 불쑥 다가가서 왼손으로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오른손에 낀 쇠 깍지로 목이나 아니면 심장, 폐를 찔렀다.

단 일격에 즉사다.

“크윽!”

“아아악!”

달려드는 자도 많지만 죽는 자도 많다. 순식간에 시신이 십여 구나 늘어났다.

인해전술로도 상대하지 못할 호랑이를 만난 것이다.

호랑이 한 마리와 늑대 스무 마리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호랑이가 이긴다. 얼핏 생각하면 늑대가 유리한 것 같다.

사방에서 포위 공격을 하면 훨씬 유리하다.

공격해 오면 물러서고, 틈이 보이면 즉시 공격한다. 아무리 강한 맹수라도 꼬리 쪽은 취약하니 뒤에 있는 늑대는 공격하고, 앞에 있는 늑대는 엄포만 놓는다.

호랑이가 달려들면 앞쪽에 있는 늑대는 즉시 피하고 뒤에 있는 늑대들은 일제히 달려든다.

호랑이도 멈출 수밖에 없다. 뒤돌아서서 달려드는 늑대들을 공격한다. 그러면 다시 물러선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싸우면 호랑이도 잡을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쇠약한 호랑이는 늑대 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호랑이가 이긴다.

호랑이가 와라락 달려들어서 늑대 한두 마리만 타격하면 다른 놈들은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물러선다. 힘의 차이가 워낙 크게 나서 공격을 포기해 버린다.

지금 그런 일들이 사내와 흑화방 무리 사이에서 벌어졌다.

사내는 유유히 쇠 깍지를 쓰는 반면, 흑화방 무리는 달려드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달려들면 죽는다!

사내는 달려드는 자를 절대로 살려 주지 않는다. 단숨에 멱살을 잡고, 쇠 깍지로 쑤신다.

“그만!”

안쪽에서 우렁찬 일갈이 터져 나왔다.

흑후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후도 사내를 알아보지 못했다. 무공으로 봐서는 그를 넘어서는 고수인데, 누군지 정말 모르겠다.

흑후가 주위를 쓸어 봤다.

쇠깍지에 찔린 시신은 매우 참혹하다.

흑후의 눈길이 형편없이 짓이겨진 독비에게 머물렀다.

독비는 목에서 핏물을 콸콸 쏟아 냈다. 출혈이 얼마나 많았는지 상의가 흠씬 젖었다.

독비를 일격으로 끝낸 자!

흑후가 사내를 향해 공손하게 대답했다.

“제가 흑후입니다만 무슨 볼일이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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