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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290화 (290/600)

#290화. 第五十八章 사자(死者)(5)

사내는 흑후가 신분을 밝혔는데도 코웃음만 흘릴 뿐, 자신이 누군지 말하지 않았다.

스읏!

사내가 죽은 시신의 옷에 쇠 깍지를 닦았다.

흑후가 보는 앞에서 쇠 깍지에 묻은 피를 닦고 있으니 대단한 모욕이다.

네 수하, 내가 죽였어. 어쩔래?

독비를 비롯해서 죽은 시신이 무려 사십여 구를 넘어선다.

흑화방이 탄생한 이래 최악의 참사다. 어떤 무인도 흑화방 안에서 이토록 많은 살상을 한 적이 없다.

“이봐, 너무 날뛰지 마. 그래도 난 예의를 갖춰서 말하고 있는데 너무 하잖아?”

흑후가 검을 잡으며 말했다.

사내의 의도가 싸움에 있다면, 이 싸움은 피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흑화방을 박살 내려고 찾아왔을 테니까.

사내가 피식 웃으면 말했다.

“공부님께서 부르신다.”

“뭐, 뭐, 뭐, 뭐!”

흑후가 깜짝 놀라서, 정말로 놀라서 말을 더듬거렸다.

“따라와.”

사내가 앞장서서 걸었다.

‘공부’라는 말이 나오자 흑화방 무리가 좌우로 쫙 갈라져서 길을 열었다.

넓은 길이 툭 틔었다.

이제는 누구도 사내를 가로막지 않는다. 사내를 가로막으면 공부와 싸워야 한다.

“저, 가긴 갑니다만 잠시만. 여기도 급한 일이 있으니 몇 마디 지시만…….”

“좋게 말할 때 따라와라. 귀찮게 하지 마.”

사내가 뒤돌아서며 싸늘한 눈으로 말했다.

“아, 네.”

흑후가 즉시 허리를 숙였다.

주위에는 많은 수하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허리 숙이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한다.

“여기 시신들 빨리 수습하고, 유가족들에게 위로비 충분히 지급해. 절대 섭섭하지 않게.”

“네.”

흑후는 사내 뒤를 부지런히 쫓아갔다. 그 옆에는 수부가 따르면서 흑후의 지시를 받았다.

“혹시 또 누가 올지 모르니까 경계 단단히 하고.”

이번 말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알겠습니다.”

수부도 빠르게 말했다.

흑후가 염려한 자는 아걸이다. 허도기가 살아 있다면 아걸도 살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군도 동굴 폭파는 실패다. 확실히 실패다.

“누군가가 오면 너희는 상대가 안 돼. 절대로 싸우지 말고 머리 조아려.”

“네? 네.”

“네 성격 아는데, 머리 조아려. 싸우면 뒈져.”

“알겠습니다.”

“너 저놈 이길 자신 있어? 넌 모르겠는데, 난 없다. 그런데 아걸은 저놈보다 더 강해. 그러니 대들면 모두 저승행이야. 절대로 흑화방을 피로 물들이지 마.”

흑후가 앞서가는 사내를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

수부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도 독비가 사내에게 죽는 것을 봤다. 독비와 그는 거의 호각지세다. 두 번 싸우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진다. 그런 독비를 사내는 단 일격에 죽여 버렸다.

흑후도 강하다. 흑후는 독비와 수부가 합공해도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할 만큼 강하다. 무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아서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지만.

그런 흑후가 사내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독비 위에 사내, 사내 위에 아걸.

‘하아!’

한숨만 터져 나온다.

아걸이 찾아올 리 없지만, 혹시 찾아온다면 좋은 뜻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오늘보다도 더 짙은 피 냄새를 풍기면서 걸어올 것이다.

수부가 급히 말했다.

“그런데 그자가 오면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볼 텐데, 어디까지 말해 줄까요?”

“적당한 건 주고, 대부분은 빼고. 그런 거 잘하잖아?”

“네.”

“그만 가 봐.”

흑후가 수부에게 눈짓한 후, 쪼르르 사내 뒤를 쫓았다.

“저 그런데 공부님은 언제 오셨습니까?”

“…….”

“저희도 혹시나 해서 무너진 동굴 주변을 샅샅이 뒤져 봤습니다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거든요. 그러나저러나 살아계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어찌나 놀랐는지.”

“입 닫아.”

“네? 아, 네.”

흑후는 입을 닫았다.

사내와 나눈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지만, 사내가 어떤 성격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내는 지금 하는 일에 염증을 느끼는 듯하다.

몹시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할 때 나타나는 피곤함이 짙게 드러난다. 공부의 명을 받고 움직이면서도, 공부의 명령을 상당히 못마땅해한다.

그만큼 무공이 강한 자다.

‘도대체 누구지? 공부 밑에 이런 자가 있었나?’

흑후는 사내의 정체가 몹시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입을 더 놀렸다가는 당장 주먹이 날아올 것이다.

그것보다는 공부의 태도가 더 신경 쓰였다.

흑후는 공부를 상전 모시듯 모셨다. 하지만 엄연히 진공부와 야천은 수평적 관계다. 존경하는 의미로 허리를 숙이는 것이지 수하라서 숙이는 게 아니다.

그런데 공부가 사내를 시켜서 흑화방을 피로 물들였다. 무력, 권력으로 강력하게 짓밟았다.

수평적 관계에서 수직적 관계로 변화시킨 것이다.

공부를 만나서 들을 말은 뻔하다. 야천의 대답을 받아 오라는 말일 것이다. 굴복하든가, 전쟁하든가. 전쟁을 선택한다면 하루 이틀 안에 대결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피곤하게 생겼네.’

흑후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원래는 깨 벗고 줘야 한다고 통문을 보낼 생각이었다. 허도기가 아걸을 죽이고 내려와서 흑후가 차려준 저녁 밥상을 받는다면 불문곡직 굴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굴 폭파 사건이 생기자, 통문을 잠시 보류했다.

‘일단은 무조건 허리부터 숙이고…….’

흑후는 사내를 쫓아서 부지런히 걸었다.

공부는 멀쩡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기름칠해 놓은 듯 반지르르하다.

슷!

공부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다른 때 같으면 흑후에게도 차 한 잔 내밀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말조차도 하지 않는다.

공부가 조용히 차를 음미한다.

“살아계셔서 천만다행입니다.”

흑후가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글쎄. 저희는 산에서 내려가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굉음이 들리지 뭡니까. 어찌나 놀랐는지. 바로 뒤돌아서 부리나케 쫓아 올라갔는데 그렇게 됐지 뭡니까.”

흑후가 공부의 눈치를 힐끔 보면서 말했다.

공부는 흑후의 말을 무심히 들었다.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는 것을 보면 폭파의 진실을 모르는 듯했다.

흑후가 용기를 내서 계속 말했다.

“어휴!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제 애들이 그 주변에 있습죠. 혹시 공부님께서 갇히셨다면 바로 구해드려야지 하고 밤에 잠도 안 자고…….”

“쉿!”

공부가 차를 마시면서 나직이 말했다.

흑후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일기. 수고했어.”

“훗!”

사내는 공부 허도기가 수고했다고 칭찬하는데도 피식 실소를 흘렸다. 공부 앞에서 대놓고 싫은 기색을 한다? 도대체 공부와 어떤 사이이기에.

흑후는 ‘일기’라는 말에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일기, 일기, 일기, 일기. 일기가 뭐지? 일기. 일기! 일기 하원랑! 맞아. 일기장군 하원랑이야!’

흑후는 비로소 사내가 누군지 알았다.

허도기가 군에서 차출한 용장이다. 원래 탁월한 무공을 지녔는데, 허도기가 특별한 무공을 전수했단다.

허도기를 쫓아서 장군직까지 던져 버리고 무림으로 나온 장군!

‘이래서 내가 알아보지 못했어.’

흑후는 곁눈질로 하원랑을 흘깃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무인의 풍채라기보다는 장군의 모습이 더 많이 묻어 나온다.

공부가 말했다.

“원래 전쟁이나 전투는 간단하지. 싸우는 처지에서는 간단해. 맞이해야 할 적이 있고, 대척하면 돼. 어떤 계략을 써도 자유, 무공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도 자유. 하지만 무림은 상황이 좀 달라. 원래가 이렇게 지저분해.”

꿀꺽!

허도기가 차를 소리 내 마셨다.

“요즘 권태감을 느끼는 모양인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아가도 좋아. 길은 열어 주지.”

흑후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하원랑에게 하는 말이다.

“더 시키실 말씀 없으시면 물러가겠습니다.”

하원랑은 공부의 제안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공부가 물러가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원랑은 즉시 뒤돌아서 걸어 나갔다. 뒷걸음질로 조심스럽게 물러난다거나, 머리를 숙여서 예를 취한 후에 물러나는 공손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공부는 못마땅한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흑후.”

“네? 네네.”

흑후는 공부가 자신을 지목하자 즉시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지?”

“아! 네. 알고 있습니다.”

“역시 눈치가 빨라. 가서 야천의 대답을 갖고 와.”

“네. 당연히 그래야죠. 사실 저도 오면서 그 생각을 했습죠. 한데 제가 공부님을 찾느라고 미처 통문을 보내지 못해서…… 말미를 좀 주시면.”

흑후가 두 손을 살살 비비면서 말했다.

“왜? 전쟁하자는 쪽이 많아?”

“아이고, 무슨 말씀을. 야천도 이미 공부님을 모시기로 결정을 거의 굳힌 듯합니다. 하지만 절차라는 게 있어서 말미를 주십사 하고 감히 요청을……”

“좋아. 그러지. 그런데 그날 폭파가 두 번 있었다.”

“네? 아! 그 폭발요?”

“첫 번째 폭발은 아걸이 일으킨 거야. 아걸이 시인했지. 자기가 한 거라고.”

“아이고! 그 죽일 놈이 그런 일을.”

“아걸이 직접 폭파한 것은 아니고, 다른 놈을 시켜서 했는데. 어떤 놈이 했는지 알아?”

“이상한 놈은 전혀 없었는데요? 저희가 바로 뒤쫓아 올라갔는데, 이상한 놈은 전혀 없었습니다.”

흑후가 자신 있게 말했다.

이 말은 사실이다. 폭발 현장만 봤지 폭발을 일으킨 자는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바로 뒤쫓아서 올라왔다고?”

“네. 정말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서…….”

“그러면 두 번째 폭발을 일으킨 놈은 봤겠군.”

‘이런!’

흑후는 속으로 아찔했다.

폭발이 눈앞에서 일어났는데 보지 못했다고 말하면 당장 이 자리에서 죽는다.

흑후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말했다.

“하! 죄송합니다만 그때 저희도 기습을 받고 있어서.”

공부가 고개를 들어 흑후를 쳐다봤다.

“저, 저도 그때…… 숲에서 수하들을 다 잃었습죠. 산에 올라가는 중인데 어떤 놈이 느닷없이 기습해 오더라고요. 그놈 그거 비호처럼 날쌔서…… 수하들이 펑펑 나와 떨어지는데.”

흑후는 그때 일이 생각난 듯 부르르 치를 떨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수하들을 죽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수하들을 죽인 일이 신의 한 수였다. 만약 수하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이런 변명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폭발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달려갔다면 두 번째 폭발이 누구 손에서 일어났는지 분명히 봤어야 한다. 그걸 보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중간에 숲에서 기습을 받는 중이었다고 하면 충분히 설명된다.

“그자들 신법이 그냥 얼마나 날렵하던지. 막연히 생각한 건데 혹시 조위 장군의 수하들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뭐 딱히 조위 장군의 수하라는 증거가 있는 건 아니고요. 그만큼 무공이 강했다 이 말이죠.”

공부가 싸늘한 눈으로 흑후를 쳐다봤다.

흑후는 죄송하다는 듯 머리를 조아렸다.

“쥐 새끼.”

공부가 중얼거렸다.

흑후는 그 말을 분명히 들었다. 동시에 등에서 식은땀이 자르르 흘러내렸다.

허도기가 약간은 눈치를 채고 있는 것 같다.

흑후는 그 말에 일절 대꾸하지 않았다. 말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처럼 머리를 조아린 채 들지 않았다.

허도기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가. 가서 야천의 대답을 들고 와. 그런데 대답은 다른 형식으로 가져 와.”

“다른 형식이라시면?”

“일단 적랑대부터 뿌리 뽑자. 너희들이 파악한 적랑대의 모든 것, 싹 가져 와. 그리고 적랑대를 사흘 만에 지워 버릴 수 있는 방책도 가져 와.”

“사, 사흘입니까?”

흑후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래. 사흘. 네가 나한테 입을 여는 순간부터 헤아려서 사흘 후에는 적랑대가 지상에서 사라져야 해. 그 방책을 가지고 와. 야천이라면 할 수 있겠지?”

공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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