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295화 (295/600)

#295화. 第五十九章 하단(下端)(5)

“얼마 전부터 친구 소식이 두절되었다.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장소에 안 왔어.”

“그렇습니까? 걱정되시겠네요.”

“걱정은 안 한다. 워낙 강한 친구라서. 다만 여기까지 왔으니 만나기는 해야겠는데,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본 놈이 너라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지.”

아걸은 무척 차게 말했다.

음성만 들어서는 얼음 귀신이 아닐까 싶다. 정도 인물은 아니고 사파인으로 생각된다.

“저요? 친구분 존함이?”

야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걸.”

“아걸요? 아걸…… 아걸이라는 이름이 워낙 흔해서…… 죄송합니다. 전 만난 기억이 없습니다.”

야구가 허리를 바싹 숙였다.

“그래?”

아걸은 대도를 들어 어깨에 댔다. 여차하면 엎어진 자를 내리치겠다는 뜻으로 비친다.

“저, 정말입니다. 아걸이라는 이름을 정말로 처음 듣습니다. 제 조상님, 조상의 팔촌까지 걸고 맹세합죠. 정말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혜량해 주십시오.”

야구가 납작 엎드렸다.

아걸은 대도를 슬쩍 내려서 야구의 등에 대고 툭툭 두들겼다. 칼등으로 쳤다가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칼날로 치기도 했다. 다만 힘 조절을 해서 등을 베지는 않았다.

야구는 발발 떨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제발 혜량해 주십시오. 정말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어떡하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아걸의 흔적을 따라가 봤지. 네놈 수하들이 나오던데? 일전통 쓰레기들을 벤 칼, 분명히 아걸 도법이야.”

“그렇습니까? 어떤 놈이 감히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일을 저지른 거야! 소, 소인은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정말 천지신명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야구가 시치미를 딱 뗐다.

아걸을 안다고 하면 말할 게 많아진다. 그리고 입을 잘못 놀리면 야천 표적이 된다.

야천에게 쫓기면서 사느니 방갓 무인을 속이는 게 낫다고 판단한 듯하다.

“후후후!”

아걸은 차게 웃었다.

아걸은 일전통 같은 곳이라면 취화원이나 적랑대 살수보다도 더 많이 안다.

아산과 함께 다닌 세월은 인생의 쓴맛을 잔뜩 본 시기라고 말할 수가 있다. 세상을 떠돌면서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다. 점소이부터 마부까지 온갖 일을 겪어 봤다.

인간말짜들, 참 많이 경험했다.

이들은 세상 사람들과 가치관이 다르다. 삶의 방식이 다르다.

도움이 된다면 적이라고 해도 간을 빼준다. 물론 도움이 안 되면 가차 없이 버린다.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은혜를 말끔히 잊어버린다.

세상 사람들의 방식으로는 이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부분을 일단 이해하고 들어가면 그때는 매우 쉽다. 이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알 수 있게 된다.

어떤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짐작된다.

“야구.”

“네.”

“잘 생각하고 대답해. 쓸모없으면 죽는다.”

파앗!

아걸은 살기를 쏟아 냈다.

이것이 인간말짜들의 방식이다. 살기를 뿜어내는 이유 따위는 없다. 무조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는다.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아도 죽는다.

법 같은 것은 없다. 철저한 약육강식만 존재한다.

아걸이 사파인 흉내를 낸 것, 음성을 차게 굳힌 것, 이유 없이 살기를 뿜어내는 것…… 모든 행동이 이들 방식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정말로 답을 잘해야 한다.

“네가 아걸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아. 아걸을 공격했다고 해서 네게 따지는 것도 아니야. 아걸을 공격했다면 네 손해지, 아걸 손해는 아닐 테니까.”

꿀꺽!

야구가 마른 침을 삼켰다.

방갓 무인의 음성은 매우 차분하다. 또 얼음처럼 차다. 마음이 이미 죽어 버렸다. 어떠한 동정심도 없는 냉혈 인간이라는 것이 다분하게 느껴졌다.

아차 실수하면 죽는다.

방갓 무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다만, 네가 왜 아걸을 공격했는지는 알아야겠어. 그걸 알고 싶어서 일전통을 찾았는데, 거기는 이미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 있더군. 말할래. 아니면 죽을래?”

아걸은 이들 방식으로 말했다.

꿀꺽!

야구가 다시 마른 침을 삼켰다.

물론 그가 어떤 마음 상태인지, 마른 침을 삼키는지 아닌지 묻는 사람은 일절 알 수 없다. 야구가 워낙 납작 엎드려 있어서 표정 변화조차 읽지 못한다.

하지만 아걸은 침 넘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아걸은 항상 도신일체 상태를 이룬다. 말할 때는 입과 몸과 정신이 하나다. 밥을 먹을 때는 밥이 칼을 대신한다. 걸을 때는 땅이 칼 대신 몸과 일체를 이룬다.

몰안이 일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굳이 진기를 끌어올려서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야구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스읏!

아걸이 대도를 들어 올렸다.

야구는 그래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 한순간까지 대답을 미루는 중이다.

쒜에엑!

아걸이 대도를 내리쳤다. 일절 사정을 두지 않고 전력을 다해서 등을 내리찍는다.

“흑후!”

야구가 버럭 소리 질렀다.

대도가 등 위에서 멈췄다. ‘흑후’라는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우뚝 멈췄다.

야구는 아걸이 이 정도의 조절은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걸의 무공을 비교적 정확하게 판단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정도지만.

“흑후?”

“흑후가 찾아왔습니다.”

야구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방갓 무인은 아걸과 마지막으로 만난 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왔다. 아걸이 실종되었으니 물어볼 것이 많을 것이다. 세간에서는 죽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정말 궁금한 것이 많을 텐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칼에 목을 쳐? 그럴 수 있나?

공갈 협박하는 자는 많다. 하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자는 거의 없다. 무엇을 알고자 한다면 더욱더 죽이지 못한다. 한데 방갓 무인은 매우 드문 행동을 했다.

‘이놈, 제대로 미친놈이야!’

야구는 방갓 무인에게 대항할 생각을 포기했다.

방갓 무인은 어떤 점은 알고, 어떤 점은 모른다. 사실, 이런 놈이 제일 까다롭다. 어떤 것을 어느 선까지 말해 줘야 할지 구분이 서질 않는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방갓 무인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칼을 쓴다는 점이다.

“흑후가 누군데?”

방갓 무인이 물었다.

“정식 별호는 기령흑후라고 합니다. 흑화방의 실질적인 방주죠.”

“흑화방? 후후! 이런 곳에서 묘한 말을 듣네. 흑화방이 정말 존재하는 문파야?”

“알고 계셨습니까?”

“소문만.”

“휴우!”

야구가 남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한숨은 아니다. 속으로 삼켜지는 한숨이다. 아걸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남몰래 뿜어냈지만, 아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소문으로라도 십삼풍을 안다면 강호 견식이 상당히 넓다고 봐야 한다.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아홉 개를 사실대로 말하다가 하나를 잘못 말해도 죽는다. 그 하나가 재수 없게 방갓 무인이 알고 있는 것이라면 가차 없다.

야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실대로 말했다.

“흑화방을 아는 사람들을 몇 되지 않는데, 대단하십니다. 그런 게 있다 없다 말이 많은데, 정말 있습죠.”

“후후! 그렇군. 흑화방이 정말 있었어. 흑화방이 하는 일,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인가?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해?”

“인맥 관리입니다.”

“흑화방을 잘 아나 봐?”

“몇 번 거래가 있어서…… 저희가 제공하는 동녀들이 꽤 요긴하게 쓰이거든요.”

야구가 고개를 살짝 쳐들고 히죽 웃었다.

“인맥 관리.”

아걸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들은 대로다. 세상에는 설객(說客)이 있다. 말로만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도 사도 아니다.

어느 한 편에 서지 않는다. 유리한 쪽에 선다. 정이 망할 수도 있고, 마가 망할 수도 있지만, 설(說)은 언제나 이긴 자와 함께 한다는 특이한 자들이다.

그들이 모여서 만든 방파가 흑화방이다.

야천이 흑화방과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야천은 어둠을 지배한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그들에게도 낮이 필요하다. 밤일하기 위해서는 낮을 쥐고 있는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야천은 이런 일에 꽤 능숙한 편이다.

사람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골났다.

하지만 야천 전체가 움직여도 감당하지 못할 사건이 터질 때도 있다. 꼬장꼬장한 관원이 와서 일전통 같은 곳을 정비하겠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관원의 뒤에는 창칼이 있다. 창칼 뒤에는 백만 대군이 있다.

그들과 싸울 수는 없다.

구대문파 장문인이나 장로가 와서 일전통을 보고 ‘사람 할 짓이 아니다. 나쁜 놈!’하고 역정을 내면 당장 전쟁이 벌어진다. 만약 여천이 일전통을 돕겠다고 나서면 정도 무림 전체와 전면전이 일어난다. 진짜 전쟁이다.

정도 무림은 인망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다.

단순히 힘 대 힘의 싸움이 아니다. 말 그대로 어둠과 밝음의 싸움이고, 이 싸움은 늘 밝음이 우세했다. 명분을 쥐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유리하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흑화방이 나선다.

흑화방은 정도 무림과 야천을 오가면서 사건을 중재한다. 대부분 정도 무림의 뜻을 수용하지만, 야천에게도 먹고 살 수 있는 약간의 틈을 허용하게 된다.

명분을 무시하고 전면전을 벌이면 어떨까? 야천이 언제부터 세상 눈치를 살폈다고 이런 것 저런 것 다 따지나.

물론 그럴 수 있다.

지금도 야천 젊은 무인 중에는 당장 낮을 뒤집어엎자고 광분하는 자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야천은 밤을 지배하지만, 밤이 낮을 이기지는 못한다. 이것이 결론이다. 아직 그만한 무공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야천에도 천하제일인 허도기 같은 인물이 나타난다면 당장 낮을 침식해 버릴 것이다.

야천은 자신들의 무공이 정종 무공이라는 것보다 약하지 않다고, 아니 더 강하다고 자부한다. 굉장히 빨리 속성으로 배울 수 있고 위력도 강하다.

진기가 하늘에 닿아서 갈댓잎 하나로 청강 장검을 부러뜨린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런 자도 독침 한 방이면 죽일 수 있다. 싸움이란 실질적으로 하는 것이지 허세로 하는 게 아니다.

동굴 속에서 십 년 수련한 사람이 뒷산에 가서 독초 한 뿌리 잘못 먹고 죽는다면 얼마나 허망한가. 하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야천은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사파, 마도 인물 중에서도 언젠가는 위대한 무인이 탄생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그런 무인이 탄생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도 무림이 야천을 비하해 사마외도라고 칭한다. 외도, 정도가 아니라 사도라는 뜻이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몫이다. 승자의 기록이다.

지금은 정도 문파가 승기를 잡고 있어서 그들 방식으로 역사가 쓰여진다.

야천이 세상을 지배하는 날이 오면 정종 무공을 수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쓰레기 무공을 배울 사람이 어디 있나. 사공이나 마공 중에는 정말 뛰어난 무공이 많이 있다.

흑화방, 설객은 이런 역학관계 속에서 탄생했다.

“흑후가 실질적이라고 했는데, 그럼 다른 방주도 있나?”

아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네. 있습니다. 허수아비 방주를 하나 세워 놨는데, 아무 권한도 없습죠. 하다못해 방주란 자가 문지기 하나 고용하지 못합니다. 모두 흑후가 암중에서 조정하죠.”

언제든 치고 빠지기 좋기 위해서다.

설객의 특성상 누군가에게 노림을 받을 공산은 매우 크다. 정도와 사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으니 원망을 살 일도 많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허수아비 방주를 세워 놓았다.

흑화방은 전혀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조직으로 재창건 된다. 그리고 흑후는 여전히 존재한다. 어쩌면 흑후라는 자도 진짜 방주가 내세운 허수아비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

이런 것은 아걸만 아는 비밀이 아니다.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찾아와서?”

“아걸을 공격하라고 했습니다. 그 대가로 천운루를 준다고.”

“실패하면?”

“그건 소신이 알아서 알 일입죠.”

“그 후에 일전통을 뺏겼고, 일전통을 되찾기 위해서 간 곳이 야천이라는 거지?”

“네.”

아걸은 궁금한 것을 모두 물었다.

이제 어떤 말을 물어도 야구는 대답해 줄 수밖에 없다. 이미 흑화방과 야천 팔룡에 대해서 언급했으니 야구 자신도 외딴곳에 치 몰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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