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299화 (299/600)

#299화. 第六十章 불문사도(不問死刀)(4)

집중하는 순간은 굉장히 안락하다. 즐겁고 상쾌하다.

억지로 끌어내는 집중은 신경을 피로하게 한다. 눈을 부릅뜬 긴장감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전쟁터에서 적과 만나며 일으킨 긴장감을 평소에도 유지하면서 살아가다가는 아마도 미치광이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 집중과는 전혀 다른 집중이 있다.

육체가 잔뜩 긴장해서 일으키는 집중이 아니다. 완전히 느슨하게 풀어진 가운데서 스르륵 일어나는 집중이 있다. 그리고 그런 집중은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도신일체는 긴장이 풀어진 속에서 나온다.

모든 것을 다 떨쳐 냈을 때 고요함이 찾아오고, 집중이 시작된다. 억지로 잡아당기고 뱃속에서부터 끌어내는 집중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는 집중이다.

몰안, 모든 신경을 눈에 집중시키는 절기는 매우 강력하다. 해변에 떨어진 바늘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시력을 돋워준다. 작은 점을 쟁반만큼 넓게 넓혀 준다.

하지만 몰안 역시 스스로 일어난 집중이다.

전신 감각을 모두 떨쳐 냈는데, 똑같은 감각을 다시 끌어낼 이유가 어디 있나. 전혀 없다. 모두 버린 후에 다시 일으키는 감각은 버린 감각과는 전혀 다르다.

몰안은 편안함을 지닌 집중이다. 그래서 오래 유지할 수 있다.

무인들이 펼치는 검신일체는 강력한 정신적, 육체적 합일이다. 진기로 이끌어 낸다.

그래서 일정 시간 이상을 유지하지 못한다.

아걸은 일상생활에서도 도신일체를 유지한다. 도신일체를 유지할수록 마음이 평온해진다.

도신일체를 이룬 상태에서 물을 마시면 물맛이 달라진다.

맹맹한 물맛이 아주 달콤하고 향긋한 물맛으로 변한다. 직접 경험해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완 속에서 일어난 집중은 전혀 다른 힘을 낸다.

저벅!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이런 소리가 들리면 멈춰 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벽에 붙어서 가만히 서 있는다.

저벅!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간다.

저들이 아걸을 발견해 낸 적은 없다. 아걸은 어떠한 기척도 흘리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고개를 돌려서 그를 찾아냈다면 깜짝 놀라서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서 있으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쳐다볼 것이다.

스으읏! 스읏!

아걸은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후웁! 후! 후우!

방 안에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걸은 숨소리만 듣고도 이미 상대방의 무공 정도를 알아냈다. 검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스스로 자부할 정도는 된다. 싸움이 벌어지면 자신 있게 달려들 것이다.

스륵!

문을 밀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웬 놈이냐!”

얼굴이 네모반듯하게 생긴 사내가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

지붕 위에서 이자를 봤다.

마당을 돌아다니면서 경계 서는 무인들에게 질책도 하고 매도 치던 자다.

스릉!

아걸은 대도를 끌어냈다.

“네놈은!”

상대가 아걸을 알아봤다.

도첨삭리 무인들은 아걸이 누구인지 모른다. 왜 도첨삭리 무인들을 척살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미친놈이 가타부타 말도 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고 있다.

저택을 피로 물들이는 자!

그놈은 큰 방갓을 썼다. 진면목은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조차 추측하지 못한다. 야구 말로는 매우 냉정하고 침착한 놈이라고 하니까 대충 서른 중반쯤 되지 않았나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아걸의 인상착의를 보고도 그가 누군지 모른다면 바보다.

쒜에에엑!

사내가 급히 신형을 날려 검을 낚아챘다.

‘느려.’

아걸은 방갓 속에서 피식 웃었다.

사내를 공격하고자 했다면 중간쯤에서 가격했을 것이다. 결코, 검을 잡지 못했을 거다.

차앙!

사내는 검을 뽑자마자 신형을 돌려서 낙안포호(落雁捕虎)라는 초식을 펼쳤다.

낙안포호는 매우 정교하면서도 날카로운 초식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러기가 호랑이를 잡는다는 초식, 이상한가? 이상하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무심코 떨어진 기러기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매우 정확하게 부리로 정수리를 찍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실패한다.

낙안포호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초식이다.

특히 하수가 상수에게 사용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 방향을 약간만 틀어도 온통 허점이 드러난다.

파아앗! 쒜에에엑!

사내의 검이 매우 날카롭게 쏘아져 왔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검속이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

하지만 그 후가 틀렸다. 사내가 왼손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 검은 독분이 확 번져 나왔다.

스읏!

아걸은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혀를 찼다.

“쯧!”

아걸은 혀를 찼다.

아걸은 이미 옆으로 물러서 있었다. 독분이 뿌려지는 위치에서 훨씬 벗어났다.

하지만 독분은 이미 방안 전체로 퍼지는 중이다. 그 중심에 사내가 있다. 그는 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미 피독단을 복용했기 때문이다.

사내는 검을 낚아채려고 신형을 날렸다. 그때 이미 사내 입속에는 피독단이 삼켜지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 소리, 낚아챘다.

아걸은 그 소리를 들었다. 무엇인가 목구멍 너머로 삼켜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데도 독분에 당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천하에 바보일 것이다.

슈웃!

손에 들린 대도가 잠깐 흔들린다 싶더니 사내의 심장에 덜컥 틀어박혔다.

“커억!”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아걸은 언제나 단 일 초만 사용한다. 일 초에 심장을 정확하게 뚫어 버린다.

사람을 죽이는 급소는 여러 군데가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아걸은 이 수법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칼이 들어가는 방향은 달라도 목표는 늘 심장이다.

쑤욱!

아걸을 칼이 심장을 찌르자마자 즉시 대도를 뽑아냈다.

쿨럭! 쿨럭!

심장에서 맑은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심장을 찌르면 칼을 빨리 빼 주는 것이 좋다. 칼이 쏟아져 나오는 피를 막고 있으면 고통이 심해진다. 피가 빨리, 대량으로 흘러나와야 고통이 빨리 끝난다.

사내는 곧 본인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과도한 출혈은 몸에 힘을 빼앗아 버린다. 억지로 진기를 일으켜서 일어설 수 없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털썩 무너진다.

아걸도 심장 부근에 검을 맞아 본 적이 있다. 촌경이 아니면 피하지 못했을 검을 맞아 봤다.

솔직히 칼이 들어왔을 때는 칼에 맞았는지 창에 맞았는지 별다른 느낌도 없다.

고통은 나중에 찾아온다.

과다 출혈은 모순되게도 상처에서 일어나는 통증을 막아 준다.

정신이 흐릿해지면서 아프다는 느낌보다는 죽어간다는 느낌을 더 많이 받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요히 죽음이 찾아온다.

심장을 찌르는 수법은 굉장히 잔인한 수법 같지만, 사실은 굉장히 편안하다. 찌르는 방법에 따라서 죽음을 굉장히 빨리 불러오는 안락 초식이다.

스릉! 척!

아걸은 대도를 집어넣었다.

오늘, 세 명째 죽였다.

아걸은 매일 네 명씩 죽였다. 첫 살인 이후 닷새가 지났으니 열아홉 번째 죽음이다.

오늘은 범위를 좀 넓힌다.

후문 입구에서 한 명, 측문 쪽에서도 한 명을 죽였다. 그리고 저택 중심부 쪽에서 한 명을 죽였다.

마지막 한 명은 어디서 누구를 죽일까?

아걸이 도착한 곳은 뇌옥이다.

야구가 뇌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야구를 구할 생각은 없다. 야구와 만날 일이 더는 없을 것이다. 그를 이용할 일도 없고, 무엇인가를 캐낼 것도 없다. 그는 여기까지 안내해 준 것으로 용도가 끝났다.

야구의 삶과 죽음에도 간여하지 않는다.

야구는 인간이니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일전통 일을 생각하면 죽는 게 낫다.

살든 죽든 그의 운명이다.

아걸은 이곳이 야천 조직이기 때문에 뇌옥에 관심이 갔다.

도첨삭리가 잡아 놓은 자들이라면 오히려 선한 사람들, 정도 사람들이지 않겠나.

그래서 뇌옥을 한번 둘러볼 생각으로 찾아왔다.

뜻밖에도 뇌옥은 텅 비었다.

전에는 갇힌 자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요즘 저택 사정이 뒤숭숭해서 풀어 줬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깨끗하게 죽여 버렸거나.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아걸은 뇌옥에 갇혀 있는 야구를 봤다.

야구는 짚 더미만 깔린 돼지우리 같은 곳에 갇혀 있으면서도 팔자 좋게 큰 대자로 드러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아 댄다. 그에게는 뇌옥도 아주 편안한 휴식처 같다.

저벅! 저벅!

한 사람, 야천 무인이 걸어왔다.

아걸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상대방은 앞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땅만 보며 걸어왔다. 뇌옥은 도첨삭리 저택에서도 후원 쪽에 있다. 안쪽 깊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가장 안심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전혀 경계심이 없이 탁 풀어진 상태다.

그는 무심히 걷다가 누군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에서야 깜짝 놀라서 쳐다봤다.

푸욱!

짤막한 소리가 울렸다.

사내가 아걸을 쳐다봤을 때, 대도는 이미 상대방의 심장을 찌르고 나온 후였다.

“컥!”

사내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풀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니, 곧 거친 소리를 내면서 쿵 무너졌다.

스으읏! 스읏!

아걸은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이, 이건 도신이야! 도신!’

야구는 너무 놀라서 숨을 죽였다.

그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큰 대자로 드러누워서 코를 드렁드렁 골았지만 잠잔 척했을 뿐이다.

방갓 무인이 무서웠다.

그는 비록 뇌옥에 갇혀 있지만, 도첨삭리의 집이 쑥대밭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길 가는 모든 사람이 입만 열면 그 얘긴데 모를 리가 없지 않나.

이 싸움은 이미 끝났다.

방갓 무인이 이렇게 날뛰는 데도 도첨삭리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 방갓 무인을 잡기는커녕 꼬투리도 못 잡고 있다. 뇌옥 안까지 깊숙이 오가는 데도.

‘이게 뭐 하자는 수작인지. 나 같으면 벌써 끝장냈을 텐데.’

야구가 입맛을 쩍쩍 다셨다.

야구도 그렇고 도첨삭리도 마찬가지고…… 방갓 무인이 왜 이런 식으로 한 명씩 죽이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방갓 무인은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고 있다.

너희들이 어디에 숨어 있든 내 칼은 피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지하실에서 연공 하던 자도 죽었다. 뒷간에서 볼일을 보던 자도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저택 안에서 안전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그것은 뇌옥도 마찬가지다. 뇌옥 앞으로 걸어오던 무인이 기습을 받고 쓰러졌다.

만약 방갓 무인이 뇌옥 안에 있는 자를 죽이려고 했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야구는 눈앞에서 저승사자를 만났다가 간신히 목숨을 구한 것이다.

“내가 이런 놈한테 대들었단 말이야? 후유!”

야구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세상에는 싸울 자가 있고 싸우지 못할 자가 있는데, 방갓 무인은 싸우지 못할 자 같다.

흑후가 아걸을 죽이라고 얘기했을 때, 거침없이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아걸에게 이런 친구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로,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취운루 열 개를 준다고 해도 거절했다.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이거 도첨삭리도 안 되겠는데. 너 같은 것은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거잖아. 하아!”

야구는 방갓 무인을 떠올리며 부르르 치를 떨었다.

도첨삭리에게 지원군을 얻어서 일전통을 되찾을 생각이었는데,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서 날아갔다는 느낌이 든다. 방갓 무인이 일전통을 보호했다면 이야기는 끝난 것이다.

차라리 수하들을 이끌고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일전통을 만드는 것이 더 수월하다.

“그래! 포기하자! 포기해! 에이, 모르겠다.”

야구는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웠다.

밖에 있는 무인들보다 뇌옥 안에 갇힌 자신이 훨씬 편하고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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