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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300화 (300/600)

#300화. 第六十章 불문사도(不問死刀)(5)

도첨삭리는 처음으로 공포라는 것을 느꼈다.

그의 저택은 만 평 대지 위에 지어졌다.

원래 이곳은, 대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백여 호쯤 모여 사는 부촌이었다. 그들을 싹 몰아내고, 집을 허물고, 지금의 저택을 지었다.

정말 잘 나갈 때였다.

지금도 잘 나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세상 무서운 줄 몰랐다.

한데 그 넓은 땅에 전각들이며 정원이며 괜찮다는 것들을 가득 채워 놨는데, 지금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만 평 대지 위에는 오백 명에 이르는 수하도 있다.

그들이 모두 허수아비처럼 여겨진다. 이토록 무기력해 보기는 처음이다.

도첨삭리는 거치도를 탁자 위에 넣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술 좀 올릴까요?”

간뇌가 조심스럽게 말해왔다.

“넌 지금 술 생각이 나니?”

“하도 답답해 보이셔서……. 그럼 바깥바람이라도 쐬고 오시는 것이?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편히 가지셔야 합니다. 그 쥐새끼는 제가 꼭 잡을 테니까 염려 놓으시고.”

“그래서 잡았어?”

“……”

간뇌는 입을 다물었다.

“휴우!”

도첨삭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첨삭리는 그토록 좋아하던 마차도 잊었다. 사두마차를 타고 질주하면 마음이 편했는데, 지금은 마차를 타고 싶은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방갓 무인을 처음 봤을 때는 투지가 들불처럼 일어났는데, 지금은 그런 것조차 없다.

이놈은 손에 잡을 수 없는 귀신인가?

“아예 피를 말려 죽일 심산이군.”

도첨삭리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간뇌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어제 자신 있다던 건 어떻게 됐어? 이번에 또 뚫렸지?”

“……”

간뇌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저택으로 침입할 수 있는 모든 곳에 경계 무인을 배치했다. 이놈들 중 몇 명 정도는 죽어도 좋다는 심정이었다. 방갓 무인을 막겠다는 심정이 아니다. 어디로 침입하는지만 알고 싶었다.

그래서 오백여 명에 이르는 무인들을 맨 가장자리 담벼락에만 붙여 놨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지없이 네 명이 죽었다.

그들의 죽음이 경계망 안쪽에서만 벌어졌다면 놈이 저택 안에 숨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죽은 네 명 중 두 명은 담장 곁에서 경계를 서던 무인이다.

바로 옆에 있던 자의 말에 의하면 구름이 달빛을 살짝 가린 사이 죽음이 일어났다는 거다.

이게 말이 되나? 놈이 귀신도 아니고. 구름이 달빛을 살짝 가렸다고 세상이 칠흑처럼 검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사이에 한 사람을 베고 사라져?

놈은 그냥 베기만 한 것도 아니다. 칼로 심장을 찔렀다.

대도로 심장을 찌르려면 일직선으로 뻗는 동작, 찌르는 행동이 나와야 한다.

이 행동은 매우 큰 움직임이다.

단검으로 찌른다면 다소 짧은 움직임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 큰 칼이기 때문에 찌르는 움직임도 당연히 클 수밖에 없다.

그만한 움직임을 보였는데도 다른 놈들이 보지 못했다?

이걸 믿으란 말인가? 그런데 믿어야 한다. 지금까지 살해 장면을 본 사람은 한결같이 같은 말을 했다.

그들도 놈을 보지는 못했다. 큰 방갓만 봤다. 놈은 얼굴도 비치지 않은 채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다.

벌써 열흘. 마흔 명이 죽었다.

놈이 하루에 네 명씩 죽이는 것은 일종의 선전포고다.

“나한테는 언제쯤 올까?”

“……”

간뇌는 대답하지 못했다.

온갖 영특한 계책으로 가득 찼다는 간뇌도 방갓 무인이 보이는 행동 앞에서는 머릿속이 텅 비었다.

놈은 도첨삭리와 아무런 원한도 없다. 원한도 없는 놈이 무조건 살인만 저지른다. 정의감에 불타는 살인도 아니다. 그냥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죽이는 그런 살인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놈이 살인을 즐기는 살인마도 아니다.

놈은 하루에 딱 네 명씩만 죽인다. 절제된 살인이다. 냉혈한적인 살인이라고 할까?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미친놈도 아니다.

놈은 굉장히 빠른 시간에 고통 없는 죽음을 끌어낸다. 고통을 극소화하려는 행동이다.

방갓 무인은 살인하는 모든 행태에서 벗어난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나? 왜 살인을 하나? 도첨삭리를 쳐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밝혀야 마땅한데 그러지도 않는다.

“연락을 취해.”

도첨삭리가 말했다.

“네.”

간뇌는 조용히 대답했다.

지금 이 상황은 도첨삭리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다.

방갓 무인의 살인이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팔룡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한다.

도첨삭리의 휘하에는 방갓 무인을 알아보는 자가 없다. 좀 더 폭넓게 찾아보면 방갓 무인을 아는 자가 나올 것이다. 야천 전체에서 수소문하는 것이다.

일단 상대가 누군지 알아야 싸울 방책이 생긴다.

“이거 체면이 형편없이 구겨지겠네. 훗!”

도첨삭리가 쓴웃음을 흘렸다.

푸드드득!

저택에서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꽤 버텼군.”

아걸은 날아가는 전서구를 무심히 쳐다봤다.

전서구가 어디로, 누구에게 향하는지는 익히 짐작한다.

전서구는 팔룡에게 날아간다. 하지만 그는 당장 달려오지 않는다. 아직은 도첨삭리에게 벌어진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그저 사소한 사건쯤으로 치부해 버릴 것이다.

병신, 그 정도도 해결하지 못해서.

팔룡은 도첨삭리가 매우 못마땅할 것이다.

“훗!”

아걸은 날아가는 전서구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전서구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도첨삭리에게 일어난 일이 야천 전체로 퍼져야 한다. 도첨삭리만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야천 모두가 느껴야 한다. 이제부터 저들은 발 뻗고 자지 못할 것이다.

지난 십여 일 동안 아걸은 많은 것을 알아냈다.

도첨삭리와 연계된 상권, 그가 벌이는 사업체들, 팔룡의 위치, 팔룡을 모시는 다른 십리가 누구인지…… 도첨삭리와 관계된 사건이나 인물들을 거의 다 알아냈다.

간뇌의 밀실에는 도첨삭리에 대한 정보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다.

간뇌는 꽤 머리가 좋은 자인데, 그런 고급 정보를 왜 그런 식으로 방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누가 감히 자신을 건드릴까 하는 자신감일까?

아니, 간뇌는 머리가 좋다기보다는 약삭빠른 자라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눈치가 빠르고, 이해득실에 따른 행동이 기민하면 머리가 좋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아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도첨삭리가 이런 기습을 받는 상황에서도 그런 정보들을 내버려 두고 있다는 것이다.

간뇌는 정말로 도첨삭리가 무너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제 끝날 때가 됐군.”

아걸이 일어섰다.

팔룡은 오늘 도첨삭리가 보낸 전서구를 읽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은 도첨삭리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이제 팔룡은 발칵 뒤집힌다.

야천이라는 거대한 제방에 물구멍 하나가 뚫린다.

저벅! 저벅! 저벅!

방갓 무인이 정문을 향해 걸어왔다.

“저, 저, 저놈!”

“놈이다! 놈이 나타났다!”

저택을 지키던 무인들은 아걸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마냥 당황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도 싸움이라면 이골이 난 자들, 곧 병기를 들고 아걸을 에워쌌다.

아걸의 이번 행동은 다른 때와 다르다. 은밀하게 다가와서 한두 명만 죽이고 사라지는 게 아닌 것 같다. 그가 정정당당하게 정문으로 걸어온다. 이쪽에 무인 수십 명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걸어온다.

“공격! 공격해!”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즉시 공격하는 사람은 없다. 이미 도첨삭리 수하들은 아걸을 귀신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설혹 귀신은 아니더라도 절대 고수인 것만은 틀림없다. 섣불리 덤비면 죽는다.

“공격해! 공격하란 말이야, 새끼들아!”

명령이 또 떨어졌다.

“이익!”

한 명이 용기를 내서 아걸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타악!

십팔대 문주의 사도진파가 터졌다.

아걸은 상대가 격검(擊劍) 거리에 들어서기도 전에 칼을 던졌다.

대도는 정확하게 상대방의 심장에 틀어박혔다. 그 사이에 아걸은 네 걸음을 다가가 쓰러진 시신 앞에 섰다.

슷!

아걸이 태연히 쓰러진 무인의 가슴에서 대도를 뽑아 들었다.

이 한 수! 도첨삭리의 수하들은 덤벼들 의지가 팍 꺾였다.

저벅! 저벅!

아걸은 정문을 밟고 안으로 들어섰다.

도첨삭리의 수하들은 주춤주춤 물러서기만 할 뿐, 쉽게 공격하지 못했다.

무공 차이가 너무 현격히 벌어진다.

오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두 사람은 죽여야 한다.

한 명은 간뇌다.

아걸은 이곳, 이 저택 안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사악한 인물이 간뇌라고 봤다.

야구가 납치한 동녀들을 가장 많이 상납받은 사람이 간뇌다.

간뇌는 야구에게 동녀 상납을 요구했다. 말이 상납이고 요구지 사실은 협박이다.

간뇌는 도첨삭리가 알지 못하는 사업체를 가졌다.

동녀로만 꾸려진 기루가 그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고관대작들에게 향응을 제공했다. 그리고 토평에서 백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사진(司津)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그는 사진에서 앵속을 재배했다.

사진 주변 마을 사람들이 유독 마약에 찌들어서 심신이 피폐해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저벅! 저벅!

아걸은 전정으로 걸어갔다.

전정에는 이미 도첨삭리가 와 있었다. 거치도를 휘두르면서 가볍게 몸을 푸는 모습이 매우 여유로웠다.

“드디어 나타났군. 궁금해서 미칠 뻔했잖아.”

도첨삭리가 거치도를 휘리릭 휘두르며 말했다.

아걸은 손을 들어서 검지를 곧추세웠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다.

“일단 볼일부터 마치고.”

아걸이 싸늘하게 말했다.

“볼일?”

도첨삭리가 의아해할 때, 아걸은 어느새 대도를 뽑아 들고 허공을 갈랐다.

슈웃!

아걸은 간뇌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서로 호흡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상대방의 입김을 느낄 만큼 가까운 거리다. 몸이 거의 달라붙다시피 했다.

“훗!”

간뇌가 깜짝 놀라서 물러서려고 했다.

순간, 대도가 움직였다. 십삼대 문주의 단도격타가 간뇌의 몸에 터졌다. 이십일 초 도법이 순행으로 그어졌고, 다시 역행으로 한 번 더 그었다.

지극히 짧은 거리에서 칼이 수십 번이나 움직였다.

간뇌는 심장이 찔렸다. 또 다른 곳도 베였다. 폐, 간, 목, 관자놀이, 척추…… 정확히 전신에 마흔두 번의 칼날이 쏟아졌다. 간뇌의 형상은 사라지고 혈육 덩어리만 남았다.

“허윽!”

간뇌는 비명도 크게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살인이다.

“간뇌가 목표였나?”

도첨삭리가 다소 놀란 눈으로 말했다.

“아니.”

“그럼 왜?”

“이놈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짓을 했거든.”

“후후! 그 짓이 어떤 짓인지 궁금하네.”

“너도 죽어야지. 이놈은 너보다 적어도 서너 배는 더 나쁜 짓을 했는데도 모르고 있었잖아.”

도첨삭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아걸을 쳐다봤다.

그는 아걸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해는 했다.

방갓 무인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간뇌가 딴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서 놔두고 있었을 뿐이다.

사실 간뇌는 약은 머리 덕분에 도첨삭리 곁을 차지했다. 처음에는 싸움도 했지만, 무공은 보잘것없다. 무공으로 치면 결코 옆에 있지 못한다.

성품은 간악하지만 유약하다.

지금이라도 ‘네가 가진 것 모두 다 내놔’하고 윽박지르면 군말 없이 바칠 위인이다.

별거 아닌 놈이다.

아걸은 도첨삭리를 향해 걸어갔다. 간뇌 피로 시뻘겋게 물든 대도를 들고.

“제길! 피나 털지 그래. 기분 나쁘잖아.”

도첨삭리는 한치도 방심하지 않고, 즉각 십팔참맥도(十八斬脈刀)를 펼쳤다.

쒜에에엑!

그의 신형이 풍차처럼 휘돌았다. 거치도가 순식간에 삼십여 합이나 터졌다.

눈부신 속도! 강력한 파괴력!

도첨삭리의 모습은 사막에서 일어난 회오리바람 같아서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틈을 들고 한 줄기 도선이 그어졌다.

시리디 시린 푸른 도광이 바람을 뚫고 들어가 한 점 혈화(血花)를 피워 냈다.

“큭…… 큭큭!”

도첨삭리가 심장에 피어난 혈화를 보면서 툴툴 웃었다.

“아까 그 칼을 보고…… 상대가 안 될 줄은 알았어.”

도첨삭리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큰 숨을 몰아쉬었다.

툭!

고개가 밑으로 떨어졌다.

방갓 무인이 야천의 적으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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