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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307화 (307/600)

#307화. 第六十二章 암화(暗花)(2)

아걸은 산길을 올라갔다.

폭죽 명령을 받은 야천 무인들은 우두커니 선 채 그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를 보는 눈길은 매우 복잡했다.

두려움, 증오, 질투…… 온갖 감정들이 버무려져 있었다.

야천 무인들에게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무력은 공포이자 부러운 대상이다.

또 이들은 일전통 인간말짜들처럼 쓰러지지 않는 인간은 없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이라면 방갓 무인의 절대 신위를 봤으니 다음에 또 싸우라고 하면 주저하게 될 것이다. 이들도 그런가? 아니다. 야천 무인들은 겁 없이 달려든다. 치고, 치고, 또 치면 반드시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으니까.

그래서 쳐다보는 눈길에 원한도 담는다.

지금은 네가 두 발로 걸어가고 있지만 언젠가 내 손으로 거꾸러뜨리겠다는 신념이 엿보인다.

십여 명이 서 있다.

한가운데 의자가 있지만 앉아 있는 사람은 없다.

의자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팔룡이다. 팔룡 뒤에 시립해 있는 사람이 오리다.

야구는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다.

그 외에 네 명이 더 있다. 이곳 주인인 비표비리의 수하들로 팔룡을 수발들기 위해서 차출된 무인들 같다.

저벅! 저벅!

아걸은 거침없이 팔룡 앞으로 걸어갔다. 주위에 늘어선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일어나.”

아걸이 냉막하게 말했다.

말투가 어찌나 차갑고 딱딱한지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그 말을 들은 야구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곧 팔룡의 눈치를 보고 주춤거렸다.

“지금부터 정리한다.”

아걸은 자신이 들고 있던 피 묻은 칼을 야구 앞에 던졌다.

“여기 서 있는 자 중 네가 벨 수 있는 자들을 베라. 몇 명이나 베는지 보지.”

“네?”

야구가 깜짝 놀라서 아걸을 쳐다봤다.

아걸이 팔룡 앞에서 겁 없이 칼을 던졌다. 칼이 없어도 팔룡쯤은, 아니 팔룡과 오리의 연수합격쯤은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아니면 괜한 공갈인가.

야구가 되묻자, 아걸이 싸늘하게 말했다.

“두말하지 않는다. 앞으로 되묻는 버릇, 용서하지 않아. 서 있는 자 중 네가 벨 수 있는 자들을 베. 한 명도 되지 못한다면 넌 쓸모가 없지. 쓸모없으면 폐기 처분을 할 수밖에.”

아걸의 음성 속에는 피 냄새가 진하게 스며 있었다.

명령을 듣지 않으면 가차 없이 목숨을 빼앗아 버리는 마두의 모습이 엿보였다.

아걸의 말에 야구가 서둘러 칼을 집어 들었다.

“저, 저…… 어쩔 수 없이.”

야구는 팔룡을 보면서 양해를 구했다. 아무래도 팔룡에게 허락을 얻어야 마음이 편하니까. 순간,

파앗!

방갓 속에서 차디찬 한광이 쏘아져 나왔다.

이 한광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다. 방갓 무인이 살심을 품었다.

야구는 득달같이 야천 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뒤쪽에서 팔룡 수발을 드는 야천 무인 네 명이 그래도 제일 만만했다. 이 자리에서 졸개 네 명 외에 야구가 죽일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봐야 한다.

“뭐야!”

“이 새끼가!”

야천 무인들이 황급히 검을 뽑아 들고 야구를 맞이했다.

창창! 창! 차창!

야천 무인 네 명과 야구가 어지럽게 얽혔다.

야구는 강한 무공을 숨기고 있다. 하지만 야천 무인들도 협공에 능하다. 그들 네 명이 합심해서 공격하면 야구도 쉽게 승부를 내지 못한다.

“귀하!”

“쉿!”

아걸이 팔룡의 말을 막았다.

“우선…… 귀하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들어. 그 말을 한 대가는 목숨으로 받지.”

“뭐 이런…….”

팔룡이 어처구니없어할 때, 아걸은 이미 움직였다.

집중…… 도신일체를 이루어주는 집중이 두 발로 모였다. 발과 땅과 몸이 하나가 된다. 이것을 뭐라고 할까? 굳이 말하자면 지신일체(地身一體)라고 해야 하나?

츄아아아앗!

지금 아걸이 보여 준 신법은 야천 무인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빠름이었다.

스읏!

아걸은 한순간에 쌍검운리 앞에 서 있었다.

눈을 깜짝일 틈도 주지 않고 팔룡을 지나쳐서 오리 쌍검운리에게 다가왔다.

퍽!

쌍검운리가 놀랄 사이도 없이 주먹이 명치에 틀어박혔다. 아니, 명치를 치는 것과 동시에 쌍검운리가 들고 있던 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 검으로 쌍검운리의 목동맥을 쭉 그었다.

“크아아악!”

쌍검운리가 처절한 비명을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목에서는 붉은 핏물이 콸콸 쏟아졌다. 흘러내리는 피의 양으로 보면 동맥이 제대로 잘린 것 같다.

이런 상처를 당하면 살릴 수 없다.

방갓 무인은 아예 작심하고 검을 쓴 것이다.

“헉! 이런!”

옆에 있던 오리가 황급히 물러서면서 병기를 뽑았다. 하지만 달려들지는 못했다.

방금 방갓 무인이 보여 준 한 수는 그들이 상대할 수 없는 절대 쾌(快)였다. 그동안 방갓 무인이 야천을 휘저으면서 오리를 죽였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무공이었다.

도첨삭리를 죽일 때부터 이런 무공을 사용했다면 생각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도주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응원군을 불러왔거나. 응원군이 있어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예전 무공만 사용해도.

“으으!”

비표비리는 두 손에 비표 다섯 자루씩 들고도 던지지 못하고 신음만 흘렸다.

비표를 던지면 방갓 무인이 달려든다.

저자가 사용하는 검을 피할 수 있나? 아마도 피하지 못할 것 같다. 비표를 던지는 순간이 죽는 순간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 던지지 못한다.

아걸이 말했다.

“이 친구 별호가 쌍검운리라고 하지? 팔룡, 쌍검운리는 당신이 죽인 거야. 귀하라는 말을 사용해서.”

“대화하자고 해서 왔는데…….”

“나도 대화를 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대화할 마음이 안된 것 같아서 말이지.”

아걸이 말을 하면서 산밑을 가리켰다.

산에 매복해 있는 야천 무인들을 가리킨다. 화약, 독, 암기, 난석을 가리킨다.

“이렇게 되면 당신을 무너트릴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당신은 병기도 없나?”

아걸이 팔룡을 쳐다보며 말했다.

팔룡은 병기를 들고 오지 않았다. 빈손이다. 그는 설마 자신이 손을 쓰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병기를 구할 때까지 기다려 줘? 아니면 지금 칠까?”

아걸이 검 끝으로 팔룡을 겨누며 말했다.

방갓 무인은 정말로 공격할 기세다. 어떤 말도 필요 없어 보인다. 방금 무너트리겠다고 했나? 정말 그럴 생각이다.

“칼을 가져와!”

팔룡이 말했다.

옛날, 할배는 일부러 가장 없는 사람, 정말 공기밖에 먹을 게 없는 사람들의 생활을 맛보게 했다. 돈 한 푼 안 주고 길거리로 내쫓았고, 품앗이도 못 하게 방해했다.

아걸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남이 버린 음식을 주워 먹은 적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아나? 걸개(乞丐)하고 부딪친다. 남이 버린 음식에도 임자가 있다.

그러다가 야천과 시비가 붙었다.

거지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 보면 야천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힘이 있으면 증명하고, 없으면 굴복한다. 굴복하면 노예가 되고, 증명하면 야천 일원이 된다. 하지만 아걸처럼 증명을 과하게 하면 지겹게 쫓긴다.

정말 이가 갈릴 정도로 싸웠다.

이들과 싸울 때는 손속에 사정을 두면 안 된다. 인정은 곧 독이 되어서 돌아온다.

팔룡은 입으로는 좋다고 말하면서도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팔룡은 비표비리가 칼을 구하는 동안, 죽은 쌍검운리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이미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그쳤다. 쌍검운리는 곧 절명했다. 그래도 뚫어지게 쳐다봤다.

방금 방갓 무인은 놀라운 무공을 보여 주었다.

쌍검운리가 괜히 죽은 게 아니다. 운이 나빠서 죽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무공이 약해서 죽었다. 죽일 만한 사람에게, 아니 터무니없이 강한 사람에게 죽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단연 신법이다.

방갓 무인은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굉장한 신법이다.

팔룡은 지금까지 이토록 빠른 신법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정작 무서운 점은 공격에 있다.

명치를 가격하는 것과 쌍검운리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잡아채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쌍검운리는 명치를 맞고 허리를 굽혔다. 그 순간, 자신의 허리에서 뽑히는 검에 목을 맞았다. 검집에서 검이 완전히 뽑히기도 전에 목이 그어졌다.

이것은 초식이 아니다.

검을 뽑으면서…… 완전히 뽑히지도 않은 검으로 목을 그어 버리는 움직임…… 그렇다! 쌍검운리는 발검술에 목이 베였다. 딱 그렇게 보인다.

무림에 이런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다.

검이 채 뽑히기도 전에 목숨을 빼앗는다. 검을 뽑으면 목숨이 떨어진다. 죽는 자는 검이 뽑히는 것도 다시 착검하는 것도 보지 못한다. 이미 죽었으니까.

성검문주 허도기!

당금 무림에서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리는, 절대 무인과 같은 검을 사용하는 자!

팔룡은 자신의 무공에 자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부 허도기와 견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감히 검도 뽑지 못한다. 허도기의 제자인 소축십검도 이기지 못한다.

야천구룡 중 혈무대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야천대방 방주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정말 일진이 사나울 것 같군. 후후!’

팔룡은 찌푸려진 눈살을 펴지 못했다.

비표비리가 하급 무인들이 사용하는 박도를 가져왔다.

팔룡은 칼을 사용한다. 한데 남은 사리 중 칼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할 수 없이 급하게 구한 것이 박도다.

휘잉! 휘잉!

팔룡이 박도를 휘둘러봤다.

“좋군.”

팔룡은 일성(一省)을 다스리는 패자다.

칼이 약하면 야천 팔방 방주 직을 유지할 수 없다. 솔직히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수천 명이다. 칼이 약하면 십리 중에서도 목숨을 노리는 자가 나올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작하지.”

스읏!

팔룡이 자세를 낮추며 박도를 쳐들었다.

“강하군. 좋은 칼이야. 내가 아는 형님 중에 월도를 잘 쓰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만큼 강해.”

팔룡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방갓 무인의 기도가 확 변했다.

방갓 무인의 전신이 칼이다. 손에 든 칼과 몸이 하나로…… 검신일체다!

‘우웃!’

팔룡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벅! 저벅! 저벅!

방갓 무인이 걸어왔다.

팔룡은 방갓 무인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박도를 움찔거렸다.

사람은 걸음을 떼어 놓을 때 허점이 생긴다. 즉각적으로 공격에 반응하지 못하는 자세가 나온다. 그래서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격할 수가 없다.

방갓 무인은 걸어오면서도 허점을 완벽하게 보완하고 있다.

언뜻 보면 방갓 무인은 온몸에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허점은 어느새 검이 되어서 노려본다. 발검술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빠른 검이 모든 허점을 전부 보완해 준다.

‘나가지 않으면 죽는다. 지금 나가야 해!’

팔룡은 박도를 움찔거렸다.

칼에 진기를 가득 담았다. 전신 진기가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었다. 하지만 나가지 못하겠다.

저벅! 저벅!

방갓 무인이 도권(刀圈), 칼의 거리로 들어섰다.

손목만 살짝 움직여도 벨 수 있다. 하지만 쳐 낼 수가 없다. 도저히 칼을 쓸 수 없다.

방갓 무인이 검을 들어서 장난처럼 도신을 툭 쳤다.

그러자 팔룡이 들고 있던 박도는 힘없이 손아귀를 벗어나 땅바닥에 떨어졌다.

완벽한 패배다.

팔룡이 약한가? 그래서 칼을 쓰지 못했나?

절대, 절대 아니다.

모두 이런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검벽(劍壁)!

말도 안 되지만 방갓 무인은 검벽을 구사했다.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서 완벽한 방어막을 형성한다. 허점도 보이지 않고, 초식을 전개할 틈도 없다. 빠름, 강함, 변화…… 어떤 부분에서도 넘지 못하는 벽이다.

무공이 약한 자는 달려들 수 있다. 검벽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마차 바퀴에 달려드는 사마귀 신세인지도 모른다.

팔룡은 강하기 때문에 검벽을 봤다. 그리고 방갓 무인이 도권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깨지 못했다.

사리도 검벽을 봤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아주 잠깐이다. 보이는 듯 마는 듯했다. 아마도 사리가 방갓 무인과 마주 섰다면 즉시 공격했을 것이다.

“우리 이야기는 저 싸움이 끝난 후에 하지.”

방갓 무인이 야구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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