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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309화 (309/600)

#309화. 第六十二章 암화(暗花)(4)

“귀하라고 불렀다가 수하가 죽었어. 힘이 없으니 감수할 수밖에. 그래, 뭐라고 불러야 할까?”

팔룡이 평온함을 되찾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

“귀하.”

팔룡이 방갓 무인을 쳐다봤다.

“귀하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수하를 죽이더니, 다시 귀하라고 부르라. 장난이 지나치군.”

“지금은 귀하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

방갓 무인이 차갑게 말했다.

“귀하. 귀하 혹시…… 절정마검(切情魔劍) 같은 것을 수련했나? 말하는 게 정나미가 뚝뚝 떨어져서.”

야천팔방 방주는 방금 말도 안 되는 패배를 당했으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 오해는 말고. 하지만 말할 때 감정 좀 실어. 우리 같은 놈들은 말투에서 진실 여부를 가려 내거든. 뭘 파악할 수 있어야 거래도 성사되는 것이고.”

“그런가?”

“또 무감정한 말투. 그런 말투로는 거래 못 한다니까.”

방갓 무인이 자리를 마련하라고 했단다. 그 말은 야천에 필요한 것이 있다는 뜻이다. 무턱대고 수하들을 도륙한 게 아니다. 무엇인가 매우 어려운 일을 부탁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주도권은 야천이 쥔다.

방갓 무인의 무공이 아주 강한 점도 마음에 든다. 어쩌면 이런 무공을 야천의 칼로 이용할 수도 있겠다.

팔룡은 능구렁이처럼 주도권을 쥐어갔다.

세상은 무공만 강하다고 우월한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을 원하는 자와 줄 수 있는 자의 능력이 우월을 가른다. 그런 면에서 방갓 무인은 공손해야 한다.

그때, 방갓 무인이 엉뚱한 말을 했다.

“절정마검. 일부러 정을 끊는 공부. 세상에 어떤 미련도 두지 않는 공부. 하지만 살다 보면 어느 구석엔가 미련이 남기 마련. 결국, 절정마검을 수련하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억지로 정을 끊어 놓고는 마검을 깨우쳤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지. 진정으로 절정마검을 수련하면 악마가 된다.”

“하! 농담으로 한 말 가지고 심각하게 생각할 건…….”

“강후상(姜候想). 지금부터 날 악마라고 생각해. 그리고 이 자리, 거래하려고 온 것도 아니야.”

“…….”

팔룡이 눈을 부릅뜨고 방갓 무인을 쳐다봤다.

야천팔방 방주의 이름은 강후상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하지만 본인 앞에서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팔룡 혹은 방주라고 부른다.

‘이놈이!’

방갓 무인은 끝까지 무력이 우월한 줄 안다. 힘으로 짓누르면 뭐든지 얻을 줄 알았나?

팔룡도 방갓 무인만큼이나 차갑게 말했다.

“거래 목적이 아니라면 왜 불렀나?”

“심심해서.”

“뭐?”

“오늘은 됐다. 얼굴은 봤고, 이만하면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주제를 몰라. 내일, 비표비리를 죽인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

“귀하! 지금 협박인가?”

“협박이 아니라 예정이지. 예정대로 하나씩 밟을 것이고, 너한테 가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아. 널 밟은 후에는 육방으로 넘어간다. 도움을 청하고 싶거든 청해.”

지역적으로 팔방 옆에 육방이 있다. 팔방을 무너트린 후에 육방으로 넘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이유가 뭔가?”

“강호에 사는 놈들이 싸우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 약하면 밟히는 거지.”

팔룡은 방갓 무인을 뚫어지게 쏘아봤다.

‘이놈, 정말 할 놈인데.’

팔룡의 머릿속에 피로 물든 야천이 그려졌다.

방갓 무인의 칼은 야천을 넘어선다. 소축십검 정도는 되어야 맞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칼이 야천을 짓밟는다? 충분히 가능하다.

방갓 무인의 말은 그의 말대로 협박이 아니다. 협박 같은 것을 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차분하게 말해 주는 것이니 예정이라는 말이 맞는다.

야천 무인들이 방갓 무인의 칼을 부러트릴 수는 없을까? 있다. 분명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많은 피가 땅을 적신다. 이 자는 검에 인정을 두지 않는다.

야천이 어떤 행동을 하든 간에, 방갓 무인은 거침없이 살행을 저지를 것이다. 며칠 안에 남은 사리가 다 죽고, 자신까지 공격한다. 야천팔방이 무너진다.

마인!

본인이 설명한 대로 정말 절정마검을 수련하지 않았나 의심되는 놈이다.

방갓 무인은 할 말을 다 한 듯 야구를 불렀다.

“야구.”

“크크크! 크크! 네?”

야구가 킥킥거리면서 금창약을 바르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급히 대답했다.

“가자.”

“네?”

야구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움직이기가 힘들다. 검상이 너무 깊어서 적어도 몇 개월은 요양할 처지다. 그런데 가자니?

제길! 죽일 테면 죽이셔! 난 꼼짝도 못하겠수!

야구는 이를 갈면서 털썩 주저앉으려고 했다. 아예 땅바닥에 드러누워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방갓 무인이 멈칫 섰다.

아니, 서면서 검 끝을 달싹 움직였다. 소리 없이 살기가 뻗쳐 나온다. 숨통을 조인다.

자신이 방갓 무인을 거부하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광이 쏟아질 것이다.

즉사한다!

정녕 죽고 싶거든 주저앉아도 좋다. 하지만 털끝만치라도 살고 싶거든 당장 일어서야 한다.

“아, 네. 갑니다. 잠깐만…….”

야구는 일어서려다가 다시 넘어졌다.

간신히 대도를 지팡이 삼아서 땅에 짚고 힘들게 일어서긴 했지만, 다시 털썩 무너졌다.

싸울 때와 싸우지 않을 때의 통증이 확실히 다르다. 싸울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상처도 가만히 있을 때는 죽을 듯이 아프다. 뼈까지 저려 울린다.

“나, 나리! 전 정말…….”

“쓸모없군.”

“아, 아니. 아직은 쓸모 많습죠.”

순간, 야구는 어디서 힘이 났는지 신음을 쏟아 내면서도 기어이 일어섰다. 일어서지 않으면 죽는다. 정말 죽는다. 그러니 가야 한다. 비틀거리더라도, 죽을힘을 다해서.

방갓 무인은 야구가 걷기 시작하자, 그의 상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방갓 무인이 간다.

소축십검조차도 상대가 될지 모를 쾌검수가…… 아니, 쾌도수가 내일 다시 온다는 말을 남기고 간다. 비표비리만 죽이는 게 아니고 사리 전부를 죽인 후에 다시 만나자고 한다.

가식이 아니다. 정말 간다. 야구가 당장 드러누워도 모자랄 몸으로 낑낑거리면서 따라간다.

사리가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하던가요?”

곤봉(棍棒)을 잘 다루는 철곤타리(鐵棍打螭)가 말했다.

팔룡은 말하지 않았다.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멀어져 가는 방갓 무인을 쏘아봤다.

“내일 저놈이 다시 올 거야. 막을 수 있어?”

팔룡이 비표비리를 보며 말했다.

“내일요?”

“내일 네 멱을 따겠단다.”

“…….”

비표비리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팔룡이 비표비리의 어깨를 꾹 눌렀다.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그리고는 즉시 신형을 쏘아 냈다.

쒜에에엑!

야천팔방 방주가 신법을 사용해서 움직이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그럴 만한 일이 없어서다.

팔룡은 방갓 무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앞에 서는 즉시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귀하, 대화를 나눌 준비는 진작부터 되어 있습니다. 어떤 대화를 원하십니까?”

팔룡이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야구.”

“네? 네.”

“좀 쉬어.”

“하악! 하아!”

야구는 쉬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털썩 주저앉았다.

금창약을 덕지덕지 바른 상처가 다시 터져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걸을까?”

“네.”

팔룡이 공손히 대답했다.

“십오 년 전, 성검문을 공격한 마인들이 있다.”

‘이럴 줄 알았어!’

팔룡은 ‘성검문’이라는 말에 눈살부터 찌푸렸다.

성검문과 연관된 일은 좋지 않다. 특히 십오 년 전 사건이라면 전임 성검문주 허도강의 부인과 자식이 마도인에게 급습당해 죽은 사건을 말한다.

무림인치고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성검문 사건’ 하면 가장 먼저 그 사건부터 떠오른다. 성검문이 당한 최대의 치욕이기도 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때 성검문을 공격한 마인 중에 음산사마가 있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천음마공으로 허도강의 장자 허문승을 죽인 것으로 압니다.”

“그 전에, 음산사마는 허도기에게 죽었다.”

“그런 풍문도 있었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허도기에게 베였어. 허도기가 검을 함부로 쓰는 사람도 아닌데, 허도기 같은 사람에게 베이고도 살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

“허도기가 베지 않았으니까 살았던 거야.”

“그렇습니까?”

“난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무슨 말인지 정확히 말해 주시면…….”

“허도기가 베지 않았는데, 왜 허도기에게 죽었다고 소문이 났는지. 또 허도기는 자신이 베지도 않았으면서 음산사마에 대한 풍문을 왜 내버려 두었는지.”

‘이거 좋지 않다. 아주 안 좋아!’

팔룡은 숨을 죽였다.

팔룡도 성검문 사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내용뿐만이 아니고 그 이면에 숨겨진 내용까지도 얼추 짐작하고 있다.

마인이 성검문을 공격한 것은 허울이다. 알맹이는 허도기가 성검문을 장악한 것이다. 음산사마는 알맹이를 만들기 위한 도구일 뿐, 정작 한 것은 없다.

방갓 무인은 허도기를 정면으로 들이받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음산사마만 조사하면 될 것 같지만…… 들어가면 갈수록 허도기와 얽히게 된다.

‘이건 손 떼야 해. 조심해서.’

“죄송합니다만, 십오 년 전 성검문 사건이라면 제가 야천팔방을 맡기 전이라서.”

방갓 무인이 팔룡을 차갑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묻지 않는 거야. 조사해서 알려달라는 거지. 아주 자세한 내막을.”

“누구십니까?”

“…….”

“허도기를 노리시는 듯한데, 이 일에는 본천 사람들도 적지 않게 관계된 것으로 압니다. 본의 아니게 식구들을 칠 수도 있는 일, 누구신지는 알아야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누가 허도기를 노린다고 그래? 난 음산사마만 알고 싶어. 이틀 주지. 이틀 고민하고 답 줘. 야구, 쟤 좀 치료해 주고. 이틀 후에 야구 머리를 베어서 내걸든가, 써먹을 수 있게 만들어서 내주든가 해. 이 방법은 단구혈리가 말한 건데, 마음에 들어.”

방갓 무인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음!”

팔룡은 침음했다.

방갓 무인은 허도기를 노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틀림없이 칼끝이 허도기를 향하고 있다.

방갓 무인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허도기의 공격을 받는다. 거부하면 당장 공격받는다. 지금 당하느냐, 늦게 당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이 길에 사는 길은 없다.

팔룡은 방갓 무인이 떠난 후에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멍하니 텅 진 길을 쳐다봤다.

생각해 보니…… 방갓 무인이 야천팔방을 공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발길 닿는 대로 들이닥쳐서 공격한 것이 아니다. 치밀하게 살핀 후에 공격했다.

일단, 야천팔방은 십오 년 전 성검문 사건과 관련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야천팔방에는 음산사마 같은 고수가 없다. 성검문 장자, 혈무대 삼십사전 삼십사승의 고수에게 검을 들이댈 만한 무인이 없다.

오죽하면 야천팔방 중 끄트머리인 팔방에 위치할까.

두 번째, 쌍검운리는 야천칠방 사람이다. 도첨삭리는 야천이방, 대웅도리는 야천대방 사람이다. 야천팔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들을 통해서 보고된다.

지금 곁에 남은 네 명…… 비표비리, 단구혈리, 철곤타리, 환묘법리(幻猫琺螭)만 순수하게 야천팔방에 충성한다. 오로지 자신만 쳐다본다.

방갓 무인은 자신의 주변을 깨끗이 청소했다.

야천육방 사람인 낭아만리를 베면서 비표비리를 죽인다고 했다. 그리고 자리를 마련하라고.

방갓 무인은 이 자리에 남은 오리가 다 모일 것을 짐작했다.

정작 그가 죽이겠다는 비표비리는 죽이지 않고 쌍검운리를 죽인 것이 정말 우연일까?

‘귀하’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쌍검운리를 죽인다고?

방갓 무인이 누군지 모르지만, 야천팔방을 공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건 선택이다.

팔룡은 야구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왔다.

그곳에는 이미 사리가 와 있었다. 야구를 붙잡고 고문하다시피 여러 가지를 캐묻는 중이다.

“이놈은 아무것도 모르니 물을 것도 없다. 치료나 해 줘. 목을 벨지 살려 보낼지 모르겠다만…… 넌 합격한 것 같다.”

팔룡이 야구를 보면서 말했다.

“합격요? 무슨 합격…….”

“그놈에게. 그놈 기준이 뭔지 모르겠는데,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거지.”

“아이고! 난 합격이고 뭐고 다 필요 없는뎁쇼!”

야구가 펄쩍 뛰었다.

‘이틀…… 힘든 이틀이 되겠군. 결정하기가 쉽지 않아.’

팔룡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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