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第六十二章 암화(暗花)(5)
팔룡은 밤을 꼬박 밝히며 깊이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고민했다. 무엇을 얻거나 잃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고민을 했다.
방갓 무인은 죽음의 늪이다.
팔룡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야천팔방 전력을 끌어모아서 방갓 무인과 일전을 겨룰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이미 사용해 봤다. 화암산에 운집한 무인들이 야천팔방을 대표할 수는 없지만, 일종이 표본이라고는 볼 수 있다.
방갓 무인과 무력으로 대결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지금까지 방갓 무인은 정면에서 승부를 걸어왔다. 기습을 걸어오지 않았다. 암습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쪽에서는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는 칼 한 자루로 싸웠다.
전역에 흩어져 있는 야천팔방 무인은 오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십리 중 육리가 죽었으니 오천 명 중 이삼천 명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나머지 인원만으로도 능히 전쟁을 벌일 수 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방갓 무인도 싸우는 방식을 달리 할 것이다. 기습이나 암습을 가해 올 게 뻔하다. 아닐까? 그때가 되어도 정면 승부를 감행할까?
기습적으로 달려들어서 자신을 죽이고, 사리를 죽을 수도 있다.
그러면 야천팔방은 당장 박살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보다는 방갓 무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
팔룡에게는 숨겨진 세력이 있다. 하지만 그 세력 또한 언제든지 생각을 바꿀 수 있다. 팔룡이 죽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즉시 자신의 이익을 좇아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희생이 아무리 크더라도 야천팔방이 건재할 수 있다면 기꺼이 감수한다. 하지만 희생은 희생대로 일어나고 결과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최악으로 흐른다.
그렇다면 남은 수는 하나, 방갓 무인이 말을 쫓는 것이다.
음산사마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으로 수집해서 건네준다. 그리고 그 선에서 서로 관계를 끝내자고 선을 그어 둔다. 더 깊이 연관되는 일은 없도록 하자고.
물론 약점을 잡은 방갓 무인이 그런 청을 들어줄 리 없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일 자체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음산사마에 대한 정보 속에는 야천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방갓 무인이 원하는 것은 그 비밀이다.
야천의 비밀을 건네줬을 때 방갓 무인이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비밀이 건네진 것을 야천이 알게 되면 야천팔방은 당장 다른 용들의 공격 대상이 된다. 야천에서 축출된다. 팔방 무리는 모조리 살인 대상이 된다.
야천은 배신자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때, 방갓 무인에게 야천팔방의 안위를 부탁할까? 신변 보장을 확인받아 둘까?
야천 생리를 아는 무인이라면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신념이 있다.
살려 달라고 하지 말라!
자기 목숨은 자기가 관리한다. 누가 살려 주지 않는다. 정말 절망적일 때는 차라리 포기하라. 야천을 지배하는 것은 이해타산이다. 살고 싶으면 목숨을 구할만한 것을 주어라.
그러니 일을 해 주는 대가로 야천팔방의 안위를 보존해 달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약속은 어기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약속을 했어도 볼일을 마치고 나면 방갓 무인은 냉정하게 돌아서서 떠나갈 것이다.
결국, 팔룡만 끈 떨어진 것이 된다.
설혹 그들 손에서 살아난다고 해도 허도기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성검문은 입이 싼 자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방갓 무인의 요청을 거부하면 당장 죽음의 칼이 날아든다. 야천에는 팔방 같은 존재, 야천에 간신히 적을 올린 못난 스라소니가 하나 더 있다. 야천구방이다.
팔방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당장 멸살시키고 야천구방으로 건너갈 것이다.
사방이 죽음이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이 죽음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오만 가지 방법을 다 구상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후유!”
야천팔방 방주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음산사마는 대단한 고수다.
허도기가 소축 생활을 할 때, 전임 성검문주인 허도강의 동생으로 만족하고 있을 때, 직접 검을 뽑고 처단한 몇 안 되는 사마 중에 속한다.
허도기가 직접 베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음산사마의 무공이 얼마나 강했는지 익히 짐작된다.
공부 허도기의 검은 필살검이다.
요행? 바라지 못한다. 검초가 너무 빨라서 혹여 실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림없다. 검이 스쳐 간 결과는 항상 죽음이다.
이는 전 무림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음산사마가 공부에게 일격을 당했다면 그들은 죽었어야 한다. 틀림없이 죽었어야 한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멀쩡하게 살아서 성검문에 나타났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방갓 무인의 지적이 옳다.
수많은 무인이 이 일에 대해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공부 허도기이기 때문에 입 밖에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잠꼬대로 말하는 일조차 없었다.
“음산사마는 야천 인물이 아닙니다.”
“그러면?”
“개로(揩老)입니다.”
“개로? 흠!”
팔룡이 침음했다.
개로라는 말은 개로백성적유(揩老百姓的油)라는 말에서 나왔다.
백성들을 뜯어먹는 자, 절대 강자인 탐관오리를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음산사마는 야천을 뜯어 먹고 사는 기생충이었다.
야천을 협박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 낸다. 돈을 달라. 술을 달라. 여자를 데려와라.
아주 소소한 것들이다. 큰 것은 원하지 않는다.
야천 지분을 달라거나 아니면 야천에게 명령을 받들라거나 그런 요구는 하지 않는다.
야천은 요구가 큰 것이 아니라서 순순히 들어준다. 선배, 원로 대접을 해 주는 것이다. 또 수하들에게도 모든 시비에서 양보하라고 명령을 내려놨다.
개로가 되면 야천 영역, 야천 사업장에서는 원하는 대로 흥청망청 즐길 수 있다.
“하아!”
팔룡은 한숨을 토해 냈다.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더 난감해진다.
방갓 무인이 이 정도 정보에 만족할 리 없다. 음산사마에게 얽힌 모든 이야기를 알아내야 한다. 물론 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해서 성검문에 나타났는지가 될 것이다.
“수고했다.”
팔룡이 말했다.
“저…….”
“철구 이야기냐?”
“철구가 일 합에 당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후후! 철구 이야기만 듣고 내 이야기는 듣지 못했구나.”
“무슨……?”
“나도 일 합에 당했다.”
“……!”
혼사(魂絲)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놀랄 필요 없다. 내 무공이 그리 강한 게 아니었으니. 가라. 음산사마를 더 조사해 봐. 아주 은밀하게.”
“네!”
혼사가 신형을 날려 떠나갔다.
팔룡은 호법을 여섯 명 두었다. 야천 무인 중에서 정말 마음에 드는 자들이다.
철구가 호법이었고, 방금 떠난 혼사도 호법이다.
혼사가 떠나자 팔룡을 뒷짐을 지고 마당을 거닐었다.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십여 장이나 되는 마당이 왜 이렇게 짧은지 모르겠다. 뒤돌아서 걷기 시작하면 금방 벽이 나타난다. 한두 걸음밖에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미치겠군.’
팔룡은 인상을 찡그렸다.
야천팔방을 보존할 방법이 전혀 없다.
음산사마가 개로였다면 분명히 야천대방도 간여한 사건이다. 이 일을 캐면 절대 무사할 수 없다.
해가 뜬다. 사흘째 해가 뜬다. 방갓 무인과 약속한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해가 뜬다.
이제 곧 방갓 무인이 올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팔룡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야구가 끌려와 무릎 꿇려졌다.
팔룡이 의자에 앉아서 야구를 쳐다봤다.
그동안 용하다는 의원을 닦달한 탓인지 상처가 한결 나아 보인다. 혈색도 제법 붉고, 웃음기까지 어린 것이 얼굴에 ‘이제 살았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아직 움직이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방갓 무인이 쓸 수 있을 만큼은 만들어 놓았다.
“널 어떻게 할까?”
팔룡이 말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야구가 습관적으로 두 팔을 짚고 땅에 엎드리려고 했다. 하지만 상처가 욱신거려서 엎드릴 수가 없었다. 그저 손가락만 땅에 대고 고개만 숙일 뿐이다.
“널 살려 줘도 내가 죽고, 널 죽여도 내가 죽는다.”
“그러면 기왕 돌아가시는 거, 전 살려 주심이.”
“뭐?”
“아, 아닙니다. 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반드시 어르신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쇼!”
야구가 힘차게 말했다.
팔룡은 피식 웃었다.
야천 무인 중에서 은혜에 보답하는 인간은 없다. 은혜를 원수로 갚지 않으면 천만다행이다. 하물며 야구는 야천 무인도 아니다. 인간말짜, 인간쓰레기다.
이란 자의 말은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해도 믿지 못한다.
“비표비리.”
팔룡은 눈을 야구에게 고정한 채 비표비리를 불렀다.
“네.”
“너 눈 감고 던지면 어디까지 맞출 수 있지?”
“눈 감고는 해 보지 않았습니다.”
“십 장 되나?”
“고정 표적이면 가능할 겁니다.”
“얘, 저기 세워.”
팔룡이 담에 붙어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넌 저 끝. 거리가 대략 팔구 장 정도 될 거다.”
“알겠습니다. 후후!”
비표비리가 차갑게 웃었다.
이 정도 거리면 눈감고도 맞출 수 있다는 뜻이다. 야구를 쳐다보는 눈에 잔인한 살기가 맺혔다.
야구는 팔룡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나, 나리! 나리! 자, 잠깐만, 잠깐만요! 나리, 이, 이건 정말, 정말 잘못된 겁니다. 나리. 저 아직 쓸모가!”
야구가 두서없이 말을 마구 쏟아냈다.
하지만 야구는 이미 나무에 세워졌고, 비표비리는 반대편 담에 가서 붙었다.
“뒤돌아야지. 양심적으로 눈 감고 던져.”
“네. 충분합니다.”
“나, 나리! 나리! 제발! 나리!”
야구가 사력을 다해서 팔룡에게 애원했다.
“쉿! 말하면 위치가 노출돼. 네게 불리하지.”
그러자 야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눈을 부릅뜨고 눈빛으로 사정했다.
팔룡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시작해.”
쉐에엑!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표 두 개가 허공을 날았다. 팔룡 말대로 눈을 감은 상태에서 던졌다.
팔구 장 거리…… 이 정도 거리는 백발백중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무기, 용이 되려다가 추락한 이무기 소리를 듣지 못한다.
쒝! 퍽퍽!
비표 두 자루가 야구를 격타했다. 하지만 야구를 뚫지 못했다. 비표가 거친 소리를 내며 퉁겨졌다.
탕! 탕!
“웃!”
비표비리가 눈을 부릅뜨고 다시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두 번째 비표를 날리려는 것이다.
비표가 대도에 맞고 땅에 떨어졌다.
야구는 방갓 무인이 건네준 대도를 가지고 있었고, 비표가 날아오는 순간에 칼을 들어서 막았다.
비표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막은 것은 아니다.
비표가 노리는 곳은 얼굴 아니면 심장이다. 목숨을 끊을 생각이니 치명적인 부위를 노린다. 치명적인 곳은 그 밖에도 많지만 가장 익숙한 곳을 노릴 것이다.
심장이 아니겠나.
야구는 심장에 도박을 걸었다.
얼굴은 손맛이 별로 좋지 않다. 비표 같은 병기라면 심장을 뚫어야 죽이는 맛이 훨씬 강해진다. 샘물 솟듯이 터져 나오는 피를 보는 것은 대단히 즐겁다. 비표비리 같은 살인마한테는 놓칠 수 없는 유혹이 될 것이다.
야구는 대도를 들어서 심장을 보호했고 비표 두 자루는 정확하게 대도를 가격했다.
슷!
비표비리가 다시 뒤돌아섰다. 뒤돌아서서 눈을 감은 채 다시 던지려는 것이다.
“됐다.”
팔룡이 말했다.
“이놈은 살 운명인가보다. 살 놈을 억지로 죽이면 안 되지. 살려 줘.”
“네.”
비표비리가 야구를 사납게 노려보며 대답했다.
“아이고! 나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야구가 손으로 땅을 짓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팔룡이 또 피식 웃었다.
야구는 모를 것이다. 그가 한 수 재간을 선보인 덕에 오늘 피 흘릴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만약 야구가 죽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이 땅을 적셨을 것이다.
‘운명인가?’
팔룡은 의자에 털썩 기대고 앉아서 먼 하늘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