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第六十四章 의혈(蟻穴 : 개미집) (1)
늘 일상적인 일이 반복된다.
하루에 세 번, 예하 무인이 쟁반에 서류를 받쳐 들고 가져온다. 그러면 잘 이해도 되지 않는, 골치 푹푹 썩히는 보고를 읽느라고 하루를 허비한다.
결론은 늘 같다. 총관을 불러서 ‘예전대로 진행해’라고 말하면 총관이 알아서 진행한다. 특별히 바꿀 것도 없고, 머리 썩힐 일도 없다. 검을 쓸 일은 더더욱 없다.
저벅! 저벅!
예하 무인이 서류를 나무 쟁반에 받쳐 들고 걸어왔다.
‘지겹군.’
중요한 일이 아니면 아침 보고는 생략하라고 했는데, 침상에서 나오자마자 서류를 내온다.
문주라는 직위가 이토록 고리타분한 것이었나?
“뭐야?”
장반 점박이 오진복의 얼굴에 권태가 묻어났다.
“통문입니다.”
“통문?”
“관군이 불량배를 소탕하는데 협조해 달라는…….”
“책상 위에 놓고 가.”
“네.”
무인이 나무 쟁반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
“나가는 길에 총관 좀 들어오라고 하고.”
“네. 알겠습니다.”
무인이 군말 없이 나갔다.
예전에 ‘이건 중요한 건입니다. 바로 조처하셔야…….’라고 한마디 했다가 뺨을 맞은 이후에는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는다. 말 잘 듣는 강아지가 됐다.
오진복은 통문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런 통문은 예전에도 받아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대사형인 독안혈검 전가성이 받았다.
몇 년에 한 번씩 나라에서 불량배를 소탕하는데, 그럴 때면 무림에 통문을 주고 한다. 관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무림이 정비해 달라는 것이다.
민초가 불량배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등 헛소리를 잔뜩 늘어놓았지만 결국은 뒷정리 좀 해 달라는 것이다. 관군은 소탕하는 척만 할 테니, 무림이 뒷일을 해 달라고.
“귀찮아.”
스릉!
오진복은 검을 뽑았다.
평생 검을 끼고 살아왔는데 근래에서야 검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안 기분이다. 조명십해 중 몇 개를 깨우쳤지만, 연무환영심과는 비교할 수 없다.
쉬이이잇! 쉬잇!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연무환영심을 염두에 두고 조명천검을 풀어 나갔다.
오진복이 이 초식도 끝내기 전, 총관이 안으로 들어섰다.
“통문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총관은 벌써 말을 전해 들은 모양이다.
“책상 위에. 보고 처리해.”
“그럼 관례대로.”
“담당 구역은 어떻게 할까요?”
“그것도 예전대로 해. 뭐 달라진 것도 없고. 특별히 치고 나온 문파도 없잖아?”
“네.”
총관이 공손히 대답하며 책상 위에서 통문을 집어 들었다.
이제 관례대로 전 무림에 통문을 돌린다. 전에 맡았던 담당 구역을 배치하고…….
총관은 무심히 통문을 펼쳤다. 습관적으로 통문 내용을 살핀 것이다. 그런데,
“어?”
총관이 눈을 크게 뜨고 끔뻑거렸다.
“왜? 뭐가 이상해?”
“저 이거…… 날짜가 오늘인데요?”
“뭐?”
“관군이 불량배를 소탕한다는 날짜, 오늘입니다.”
“무슨 소리야?”
오진복이 총관에게서 빼앗듯이 통문을 받아들었다.
통문 내용은 관심 없다. 총관이 말한 날짜 부분만 살폈다.
맞다. 오늘이다. 오늘 움직여 달라는 통문이다.
통문은 적어도 한 달 전쯤에는 내려 줬어야 한다. 지역 할당을 하는 시간과 무림에 다시 통문을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린다. 한날한시에 사람을 움직이려면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오진복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왜 오늘 날짜지?”
통문을 아침에서야 받았다. 무림은커녕 성검문 자체 무인만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더욱이 관군과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관군이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지 전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는 뒷일을 마무리 지을 수 없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통문을…….”
“날짜를 잘못 적었을까요?”
아닐 것이다. 통문에는 관인이 찍혀 있다. 관인까지 찍은 통문이 잘못 기재되었을 리 없다.
오진복은 대수롭지 않게 통문을 던져 버리며 말했다.
“이런 통문은 협조하지 못하지. 알아봐. 날짜를 잘못 적은 것인지, 정말 오늘인지.”
“네.”
총관이 충충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중원 각지에서 전서가 날아들었다.
무림이 일제히 부산하게 움직였다. 관군이 무림과 연합해서 야천을 묵사발로 만들었다.
야천은 명분에서 밀리고, 힘에서도 밀린다. 관군을 상대할 수 없고, 무인을 당하지 못한다. 꽁지 빠진 강아지가 되어서 꼬리를 말고 숨기 바쁘다.
성검문에 부리나케 날아든 전서들은 모두 그런 내용이었다.
“뭐야, 이게!”
오진복은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선고문에는 오늘 날짜로 통문을 보내고, 중원 무림 문파에는 적어도 며칠 전에는 통문이 도착하게끔 전달했다.
무림 문파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야천을 기습하는 데 혹시 발생할 불상사를 방지할 수 있도록 대비책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철저한 비밀 유지 속에 이루어졌다.
한 마디로 성검문만 철저하게 따돌림당했다.
“후후! 전보영!”
오진복은 저미한 신음을 쏟아 냈다.
이토록 은밀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는 기관은 많지 않다. 관군과 연관된 곳이라면 당장 전보영이 떠오른다. 그곳밖에 달리 생각할 곳이 없다.
“후후!”
오진복은 웃으면서 전서를 차곡차곡 챙겼다.
진공부과 전보영이 거칠게 부딪혔는데 그 여파가 성검문으로 몰려왔다.
총관은 아직도 통문 보낸 날짜가 왜 오늘인지 해답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그쪽도 보나 마나다.
통문을 보낸 곳에서 알려 주지 않고 있을 것이다.
“사부께서 뒤통수 맞았군. 후후후!”
오진복은 웃었다.
허도기는 소축에 머물렀다.
성검문에 크고 화려한 전각이 있지만, 며칠 머물다가는 소축으로 옮겨 버렸다.
소축은 방 하나밖에 없다.
방 하나, 부엌 하나. 집 앞마당에 탁자가 있고, 의자 네 개가 있다.
매우 단출한 집이다.
주변에는 시중을 들기 위한 집들이 있다. 하녀와 하인들이 머무는 집인데, 차라리 그들의 집이 소축보다도 낫다.
소축 방바닥은 흙바닥이다. 그곳에 거적때기를 깔고 그 위에서 생활한다. 침상도 없다. 이불도 덮지 않는다. 딱딱한 바닥에 누워서 잠을 청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는 의미겠지만, 허도기 나름대로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뜻도 있다. 몸을 낮은 데에 두어서 나약해지려는 의지를 되살린다.
“접니다.”
오진복이 문밖에서 말했다.
“들어와. 아니다. 내가 나갈까? 햇볕이 좋은데 나가지.”
허도기가 문을 덜컥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날씨 좋다, 날씨. 좋지?”
“어떤 사람에게는 좋고, 어떤 사람에게는 좋지 않겠죠.”
“너는 뭐가 이렇게 삐뚤어졌어? 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싸움 대상으로만 보이냐?”
“그렇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늙은 사자는 대우를 받는 게 아니라 쫓겨나게 되어 있죠. 무림도 이와 같이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하하하!”
허도기가 웃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통쾌한 웃음이다.
“오늘은 또 뭘 갖고 왔는데? 분명히 네 발걸음이 가벼운 걸 보니까 내 약을 바싹 올릴 것 같은데, 기대되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궁금해.”
“통문입니다.”
오진복은 허도기 앞에 통문을 내밀었다.
“겨우? 이건 좀 약한데? 이 정도로 약이 오르겠나. 이게 뭐 문제 있어?”
허도기는 통문을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받은 겁니다. 그런데 날짜가 오늘이네요. 우리를 제치고 관에서 주도적으로 통문을 돌렸고, 이미 사방에서 전서가 날아들고 있습니다. 관과 부합해서 움직인 문파들인데, 그래도 눈치는 봐야겠던지 결과를 보고하는군요.”
“그래? 하하하!”
허도기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웃었다.
“서로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면서, 무림이 아주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당연한 걸 두고 뭘 그래.”
“…….”
“내가 전보영을 쳤잖아. 그리니 우리 위신을 깎는다는 건데. 내가 왜 너를 임시 문주로 앉혔겠냐? 우리 방식대로 해. 위신이 땅에 떨어졌으면 흙이 묻었어도 주워야지.”
“줍습니까? 한 푼도 안 되는 위신을?”
“굳이 줍는다기보다는 네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 봐. 성검문주가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이 정도 일쯤은 처리할 줄 알아야지. 하하하!”
허도기가 아주 크게 웃었다.
네 마음대로 하라는 거다.
솔직히 사부는 성검문에서 마음이 떠났다. 성검문 따위로는 양이 차지 않는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성검문 정도는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거다.
누가 성검문을 차지하고 있건 자신이 원하면 되찾아 볼 수 있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
사부는 여전히 천하를 보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든 행동계획이 다 수립되어 있을 텐데, 아직도 소축에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온 김에 저녁이나 먹고 가지?”
“아닙니다. 가서 이 일을 처리해야죠.”
“알았어. 가 봐.”
허도기는 순순히 오진복을 보내 주었다.
“이거 참 묘하군. 정말 묘해.”
허도기가 중얼거렸다.
흑후를 통해서 야천에 압박을 넣고 있는데, 때마침 이런 일이 벌어졌다.
관군이 야천을 들이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인가. 이런 일을 전보영이 주도했다는 것도 이상하다. 대체로 야천 소탕은 형조(刑曹)에서 관할한다.
단순한 우연인가? 전보영도 자신이 야천에 압박을 넣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아걸과 싸울 때까지는 뒤를 밟았지만, 동굴 폭파 사건 이후에는 뒤쫓는 자가 없다.
자신이 아걸을 찾지 못하고 있듯이, 세상도 허도기라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해관계가 있는 몇몇 사람만 아는 극비다.
그런데 절묘하게 시기가 맞아떨어진다.
설마 자신이 야천을 노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나? 아무래도 야천이 자신의 손에 들어올 것 같으니까 미리 야천을 짓눌러 버린 것인가?
대장군 작품인가? 아니다. 관군을 움직이는 것은 대장군 방식이 아니다. 대장군은 자신의 권리 밖에 있는 힘을 이용하지 않는다. 장군부 무인들은 얼마든지 이용하지만, 관군을 동원해서 야천을 들이치는 일은…… 아니다. 대장군은 아니다.
“야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허도기가 말했다.
“흑후에게 내린 명령은 아직도 유효합니까? 야천이 대답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요.”
대답이 들려왔다.
허도기는 오진복이 보고하기 전에 이미 야천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 받았다. 성검문에 날아든 전서보다 더 빠르게 소식을 알려 주는 사람이 있다.
“그건 계속 밀어 보고. 뭐라고 대답하는지 봐야지. 분명히 거짓말일 테니까. 하하하!”
허도기가 웃었다.
야천은 틀림없이 거짓말을 한다. 흑후가 가져오는 선물은 임시방편이다. 하지만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변명 하나는 변명 두 개를 낳고, 두 개는 세 개를 낳는다. 그러다 보면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 포기하게 된다.
거짓말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알겠습니다. 조사해 보겠습니다.”
쉬이잇!
지붕 위에 있던 자가 사라졌다.
전보영이 야천을 전역에 걸쳐서 소탕했다는 것은 야천을 누를 필요가 있었다는 거다. 전보영이 권한 밖에 일에 이토록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은…… 아무래도 전보영 뒤에 아걸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몽설이? 아니다. 몽설은 중원 전역에 싸움을 일으킬 만큼 배짱이 없다. 중원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만한 배포…… 역시 아걸밖에 생각나는 자가 없다.
“그놈이 살아 있나? 살았으면 성검문으로 와야지 왜 야천으로…….”
허도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걸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이미 죽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사건만 벌어지면 아걸이 생각난다.
이번 일도 아걸이 아니면 할 놈이 없다.
‘어찌 됐든 아걸…… 만약 네놈이라면 꼬리 드러내지 마라. 잡히는 날에는 죽어. 후후!’
허도기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