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第六十四章 의혈(蟻穴 : 개미집) (5)
왕보(王甫)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투전판에서 경계를 섰다.
관군들이 투전판을 들이쳐서 싹 털렸지만, 투전판이야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열 수 있다. 길바닥에서 돗자리를 깔아 놓고도 벌일 수 있는 게 투전이다.
“조용하네.”
왕보가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조용해야지. 또 당하면 안 되잖아.”
같이 보초를 서던 무인이 길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라서인지 투전판 분위기가 한결 조용하다. 물론 이것도 한두 시진만 지나면 불이 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워질 것이다.
돈 잃은 사람은 화가 나고, 돈 딴 사람은 흥분한다.
그때, 앞쪽에서 세 명이 걸어왔다.
긴장할 필요는 없다. 낯익은 얼굴들이다. 야천 칠방 방주의 측근으로 알고 있는데, 보초를 서다 보면 가끔 만나게 된다. 도박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이라서.
“장 서기 무섭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대?”
왕보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수고!”
저들이 두 사람을 스치며 지나갔다.
한데 안으로 들어가던 세 명 중 한 명이 문득 생각난 듯 뒤돌아서더니 왕보의 어깨를 잡았다.
“네 이름이 왕보지?”
“네? 네. 그런데 제 이름은 어떻게……?”
“여기 온 지 오래됐나?”
“아닙니다. 한 일 년쯤 됐을 겁니다.”
“일 년이라…… 수고했어.”
“네? 아닙니다. 수고는 무슨…… 윽!”
웃으면서 말을 하던 왕보가 갑작스럽게 비명을 쏟아 냈다.
느닷없이 단검이 아랫배를 푹 찔렀다.
왕보가 눈을 부릅뜨고 사내를 쳐다봤다.
“왜……?”
“다음 칼은 심장에 찔러줄 수 있어. 그러면 깨끗이 가. 딱 죽지 않을 곳에 찌를 수도 있지. 자꾸 찌르다 보면 과다출혈로 죽는 거야. 자, 말해 봐. 어떤 놈들을 위해서 일해?”
“그게 무슨 말씀…….”
푹! 푹! 푸욱! 푹!
단검이 계속해서 찔러 들어왔다. 순식간에 서너 차례나 더 찔린 것 같다.
왕보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털썩 주저앉으려고 했다. 그러자 같이 왔던 사내 두 명이 좌우에서 양쪽 겨드랑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쓰러지지 않게.
“다시 묻지. 여기서 일어난 일들, 어떤 놈들에게 보고하는 거야?”
“그런 일…….”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푸욱! 푹! 푹! 푹!
단검이 사정없이 꽂혔다.
살려 달라고 사정할 계제가 못 된다. 차라리 빨리 죽여 달라고 사정하는 게 낫다. 아니, 사정할 필요도 없다. 단검은 십여 차례 정도 얻어맞자 숨이 턱 끊겼다.
왕보가 숨을 거두자 단검을 찌르던 자가 미련 없이 손을 거뒀다.
왕보에게서 어떤 정보를 얻어 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다. 단지 확인을 원했을 뿐.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보를 붙잡고 있던 사내 두 명이 왕보를 질질 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왕보와 함께 보초를 서던 자가 놀란 눈으로 사내를 쳐다봤다.
“경계 잘 서.”
사내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피 묻은 단검을 허리춤에 꽂으면서 태연히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는 투전판에서만 네 명을 죽였다.
노름에 눈먼 자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곳에서는 일을 벌이지 않았다.
같이 온 사내가 목표로 한 자를 으슥한 곳으로 유인해 낸다.
투전판 안에 있는 자들은 부르면 나오는 수밖에 없다. 그를 불러내는 자는 방주의 측근이다. 방주의 총애를 받는 날 선 칼이다. 부름을 거부하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목표가 나타나면 사정없이 단검을 찔러 죽였다.
이유 같은 것은 말하지 않았다. 무조건 단검부터 찔러 넣고 질문은 그 후에 했다.
전신 난자.
야천이 배신자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시신을 깨끗하게 남겨 놓지 않는다. 전신을 난자해서 저승길을 가는 동안에도 고통받게 만든다. 염라대왕이 봐도 한눈에 배신자라는 사실을 알게 만든다.
야천은 배신자를 골목길에 버린다.
배신자의 시신이 사람들 눈에 띄기를 원한다. 많은 사람이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려야 한다. 그래야 야천에 대한 공포가 커진다.
사람들은 야천을 무서워해야 한다. 야천은 결코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 야천을 건드리면 언제든지 칼이 날아올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줘야 한다.
그래서 배신자는 가장 잔인하게 죽이고,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 마치 쓰레기처럼 던져 놓는다.
그런 시신이 골목마다 즐비하게 늘어졌다.
야천 칠방 구역인 화릉(和陵)은 고작 이천여 명 정도밖에 살지 않는 작은 도읍이다. 한데 몸이 찢겨서 죽은 시신이 서른 구나 발견되었다.
잠자리에 들 때만 해도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침이 되어서 눈을 떠보니 세상이 핏빛이다.
사람들은 난자된 시신은 건드리지 않는다.
관부에 연락하면 관원들이 와서 살펴보고 인근에 있는 야천 무리에게 치우라고 지시한다.
야천은 그제야 시신을 마지 못한 듯 치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형식도 지킬 수 없다. 관가에 신고해도 관원이 나와 보지 않는다. 또 인근에 야천 무리도 없다. 모두 자취를 감춰 버렸다.
“이거 야천이 독이 바짝 오른 모양인데.”
“이 사람들이 전부 다 관군에 협조한 사람들이라는 거야? 어휴! 많기도 하다.”
“아마 그럴걸? 이번에 야천이 되게 얻어맞았잖아. 그게 누가 알려 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렇게 안 되는 거거든. 야천이 배신자를 뒤늦게 찾아내서 조지는 거지.”
“그래도 이번에는 심한데.”
“워낙 세게 얻어맞았잖아.”
사람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야천은 가끔 배신자들을 찾아내서 죽였다. 하지만 이번처럼 대대적으로 죽이진 않았다.
관군들의 공격이 심했던 만큼 내부 숙청 작업도 처절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 야천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친 자라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리고 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야천이 바싹 독 올라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특히 조심했다. 이럴 때 야천을 잘못 건드리면 덤터기 쓴다.
* * *
“하룻밤 사이에…….”
보고하는 사내가 말을 잇지 못했다.
“많이 당했냐?”
아삼이 짐작했다는 듯 태연히 물었다.
“이백 명 정도가…….”
칠백 명 중 이백여 명이 죽었다. 거의 삼분지 일이 죽었다. 그것도 단 하룻밤 사이에.
“이백 명…… 풋! 그래도 많이 살아남았군.”
아삼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문주님, 형제가 이백여 명이나 죽었는데 많이 살아남았다고요?”
“네 놈은 진짜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거냐? 어제 하루 동안에 이백 명이 죽었다고 했지? 오늘 하루가 지나면 그 정도가 또 죽을 것이야. 살아남는 사람이 절반도 채 안 된다는 거지. 이게 네 놈이 한 일이다.”
“…….”
보고하러 온 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쯧! 이놈아. 적랑대가 간자를 심는데 노력한 세월이 몇십 년이야. 그걸 너희들이 단 이틀 만에 홀라당 날려 먹은 거야. 알았냐? 네놈이 한 일을?”
아삼이 핀잔을 주었다.
사실, 이번에 적랑대는 매우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동안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관부에 전달했다. 관부와 무림이 야천을 집중적으로 타격할 수 있었던 점도 모두 적랑대 덕분이다.
반면에 다른 곳에서 침투한 간자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정도문파, 관부, 상단 등등에서 침투시키거나 매수한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에 벌어진 참사는 대부분 적랑대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문주님께서 도와주실 수 없으신지요.”
처음, 적랑대 간자를 주동했던 자가 고개 숙이며 부탁했다.
“남에게 도움받을 일을 뭐 하려 해. 그런 일은 하는 게 아니야. 내가 도와줄 것도 없고.”
아삼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아걸에게 부탁하면 안 되겠습니까?”
“임마! 아걸이 신이냐! 몸뚱이가 하나인데 중원 천지를 어떻게 돌아다녀!”
“…….”
“잠자코 있어라. 이 폭풍은 피할 수 없어. 야천을 때렸으면 우리도 맞아야지. 폭풍이 지나간 후에 얼마나 살아남는지 보자. 뭘 해도 그 후에 해야 해.”
아삼은 눈을 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번에는 적랑대가 너무 했다. 야천을 너무 심하게 몰아쳤다.
이런 꼴을 당하고도 움직이지 않을 야천이 아니다.
사마외도…… 그들이 칼을 쓰기로 작심하면 매우 혹독해진다. 아마도 이번 기회에 간자들을 싹 뿌리 뽑을 생각으로 작정하고 달려들 것이다.
어젯밤에 죽은 간자들은 이번 일 때문에 발각된 것이 아니다.
그동안 의심을 사 왔던 것이다.
간자라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난 자들로,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죽었을 목숨이다.
오늘 죽을 자들은 이번 일 때문에 드러난 자들이다.
그동안은 몰랐는데, 이번 움직임을 보고 ‘혹시 너?’라는 의심이 드는 사람들.
다른 때 같으면 확실하게 증거가 나올 때까지 지켜보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무조건 죽일 것이다. 설혹 잘못된 의심일지라도 죽이고 본다.
“몸들 잘 사리고 있으라고 해. 숨도 쉬지 말고.”
아삼은 그 말밖에 하지 못했다.
* * *
저놈의 새끼!
그동안 간자인 것이 드러난 자들은 싹 정리했다.
언젠가는 죽일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쓰기도 쉬웠다. 몇 번에 걸쳐서 간자짓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칼을 쓰는 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지난밤에 죽은 자들은 그런 자들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새롭게 드러난 의심자들을 주시했다.
관군이 들이치기 전에 때마침 자리에 없었던 자들, 분명하게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못하는 자들, 또는 무엇을 했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증명해 줄 수 없는 자들.
그런 자들이 의심 대상이다.
“모두 몇 명인가?”
야천 오방 방주가 물었다.
“대략 오백 명 정도 됩니다.”
“다 죽여.”
“네? 오백 명을…… 전부 다요?”
“날이 밝기 전에 다 죽여.”
“저…… 이 중에서 진짜로 의심 가는 자들은 백여 명 정도고 나머지는 긴가민가한 자들입니다. 이들을 다 죽이면…… 엄한 자가 절반이 넘습니다.”
“야!”
“네.”
“사람 없냐?”
“네?”
“어디 가서 사람 못 구하냐고!”
“무슨 사람을…….”
“이 새끼. 말귀 더럽게 못 알아듣네. 야! 이백 명을 죽이면 다른 데 가서 그만큼 데려오면 되잖아. 이 새끼들이 뭐 그렇게 중요한 놈들이라고.”
“아, 네.”
수하는 비로소 야천 육방 방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사람은 많다. 오백 명을 죽여도 하루면 다시 채울 수 있다. 밥 먹여 주고, 잠만 재워줘도 주먹 쓸 놈들이 널려 있다.
육방주가 말했다.
“죽이라면 죽이지 무슨 놈의 말이 그렇게 많아! 이놈들을 네가 훈련을 시켰냐, 뭘 했냐! 다 쓰잘데기 없는 놈들 아니야. 죽이는 게 그렇게 아까워?”
“아닙니다.”
“싹 죽여. 오늘 밤 안으로.”
“네.”
척살 명령이 떨어졌다.
방주에게 보고한 인원은 조금이라도, 정말 손톱만큼이라도 의심이 가는 자들은 모두 적어 내라고 해서 찾아낸 자들이다. 그러니 십중팔구는 간자가 아니다.
진짜 간자는 아직도 아무런 흔적을 드러내지 않은 채 꼭꼭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분명히 그런 자들은 오백 명 속에 포함되지 않았다.
오백 명을 다 죽인다고 해도 간자는 여전히 살아서 숨 쉰다.
그래도 이런 일을 가차 없이 벌이면 그만한 효과가 반드시 나온다.
일단, 간자가 위축된다. 숨죽이고 숨느라고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한다.
또 이런 식으로 건드리면 바싹 얼어붙어서 뜻밖의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움직이지 않아도 될 상황인데, 괜히 겁먹고 본능적으로 움직일 수가 있다.
그럴 경우, 즉시 낚아챈다.
오백 명을 죽이는 것은…… 절대 나쁘지 않다.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수하가 허리를 납작 숙이며 힘차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