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第六十五章 암추(暗錐) (1)
팔방 방주 서풍국(徐楓國)은 탁자에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이상해.’
무엇인지 딱히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는데,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상하단 말이야.’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정말 이상하다.
방갓 무인이 호북성에 들어와서 이리저리 휘젓고 다닐 때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가 반강압적으로 음산사마에 대해 조사를 시켰을 때도 전혀 이상한 기미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회합에서 대방 방주가 묘한 말을 했다.
- 아삼을 잘 지켜보는 게 좋을 겁니다.
‘아삼을 왜 지켜보라고 했을까?’
아삼이 비록 적랑대 문주였지만 이미 앞에 ‘전임’이라는 말머리가 붙었다.
전임 문주는 사실상 아무런 실권이 없다.
물론 전임 문주를 배척하는 문파는 어디에도 없다. 확실히 전임 문주는 예우를 받는다. 하지만 예우라는 것은 예의상 대우에 불과한 것이지, 문파를 움직이는 실력 행사에 관한 부분은 아니다. 그런 부분은 전혀 손대지 못한다.
적랑대 같은 경우, 전임 문주는 완전히 끈 떨어진 연이 된다.
오히려 현 문주는 전암 문주의 색깔을 빼기 위해서 많은 것을 바꾸려고 한다.
전임 문주가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문파도 많다.
문주가 혈육으로 계승되는 일반 세가나 사제지연으로 전승되는 중소문파의 경우에는 전임이 현임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낼 경우도 왕왕 있다.
하지만 적랑대나 야천은 전혀 다르다.
일단 문주 직에서 내려가면 하인조차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
조직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현임 적랑대 문주인 임지정이 호북성에 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문젯거리가 된다.
그때는 당연히 주시해야 한다.
아삼은 다르다. 그는 그저 나그네에 불과할 뿐이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간자들이 염려되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물론 그런 염려 때문에 말을 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건 역시 마찬가지다. 야천에 숨어 있는 적랑대 간자들은 임지정의 말을 듣지 아삼의 말을 듣지 않는다.
만약에 간자들이 아삼의 말을 듣는다면 그건 둘 중에 하나다.
먼저 아삼이 야천 간자들을 모아서 적랑대에 반기를 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전임 문주가 현임 문주를 향해서 독립을 선포한 것이다.
이게 가당한가? 다른 문파라면 가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랑대는 아니다.
적랑대는 의리를 피처럼 중히 여긴다.
의리가 무너지면 적랑대를 유지해 왔던 모든 근간이 무너진다. 기둥이 뽑히는 것이다.
적랑대를 받치고 있는 힘은 끈끈한 의리다.
적랑대를 위해서 일하다가 죽게 되면 적어도 내가 아끼는 사람들만은 편히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적랑대가 가족을 편하게 보살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안심하고 죽을 수가 있다. 죽으면서도 웃을 수 있다.
의리!
이것이 적랑대의 근간인데 전임 문주가 의리를 깨고 현임 문주에게 반기를 든다?
있을 수 없다.
그러면은 남은 방법 하나, 전임 문주가 본격적으로 적랑대 활동을 개시했다는 거다.
“적랑대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나? 이게 신호인가?”
적랑대가 중원 전역에서 활동을 재개했다면 통제할 수 있는 고급 무인이 부족하다. 그래서 은거한 아삼까지 다시 불러내서 한쪽 팔을 거들게 한다?
이 생각은 매우 타당하다.
하지만 아직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적랑대는 살수 문파다. 적랑대가 수집한 정보는 살생하는 데 쓰인다. 모든 정보가 살행과 연관되어 있다. 정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하는 데 쓴다.
그런데 아직은 적랑대가 움직여서 살해당했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런 만큼 아삼이 이곳, 호북성에 와 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지금은 야천이 박살 나고 있는 상황, 신경 쓸 곳이 너무 많다.
그런데도 대방 방주가 관심을 두었다.
“이게 뭐지? 왜 나한테 아삼을 지켜보라는 말을 했지?”
팔룡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방갓 무인이 호북성에서 피를 뿌린 것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음산사마의 본거지는 음산이다. 활동하던 근거지가 호북성이 아니라 섬서성(陝西省)이다. 그러니 음산사마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섬서성으로 갔어야 한다.
야천사방 관할이다.
야천 사방에 고수가 많아서 껄끄럽다고 치자. 방갓 무인이 그런 것을 고려할 리도 없지만, 만약에 그랬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팔방보다는 칠방을 공격하는 게 맞다. 지리적으로 칠방이 팔방보다는 섬서성에서 가깝다.
방갓 무인은 왜 팔방에 와서 피를 뿌렸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뭐가 빠졌어. 그러니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 거지. 이 모든 궁금증을 풀어줄 열쇠가 있을 텐데.’
팔룡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툭툭 두들겼다.
빠진 부분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매끄럽게 쫙 흘러간다.
지금은 전혀 흐르지 않는다. 꽉 막혀 있다. 모르는 부분이 그만큼 많은 것이다. 대방 방주는 무엇을 좀 아는 듯하다. 그러니 아삼을 지켜본다는 말을 했겠지.
“밖에 누구 있어?”
“네.”
호법, 혼사가 대답했다.
“어제 우리 쪽에서만 몇 명 죽였지?”
“백이십칠 명입니다.”
“적랑대가 포함된 숫자지?”
“네.”
“적랑대를 빼면 몇 명이야?”
“적랑대가 쉰쯤 됩니다. 적랑대를 빼면 칠팔십쯤 됩니다.”
“쉰.”
팔룡은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적랑대 간자가 여타 다른 곳에서 보내온 간자들만큼이나 많다. 거의 일대일 비율이다.
왜 이토록 적랑대 간자가 많은 것일까?
특별히 적랑대만 많은 것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 보내온 간자가 드러나지 않은 것뿐이다. 이 말은 바꿔서 말하면 적랑대 간자들은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목적을 이루는 데만 신경 썼다는 뜻이다.
“적랑대 말이야. 그전에 우리가 파악했던 간자가 몇 명이지?”
“스물 정도 됩니다.”
“그러면 이번에 서른 명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는 거잖아?”
“네.”
혼사가 대답했다.
서른 명이 최근에 모습을 드러냈다. 적극적으로 관부에 달라붙어서 야천 정보를 건넸다. 아니면 무림 문파에 전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삼에게 전했다.
몇 년 동안을 숨죽이고 참던 자들이 벌떼처럼 일어섰다.
다른 조직에서 침투한 간자들은 조용히 있는데, 오직 적랑대만 유난을 떨었다. 왜?
간자는 신분이 드러나면 죽는다.
죽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적랑대주 임지정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야천이 아닌 다른 곳에 침투한 간자들은 매우 조용하다.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팔룡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팔룡은 장점은 ‘빠른 상황 판단’이다. 세상을 읽는 눈은 무공이 다른 방주들보다 약하면서도 꿋꿋하게 팔방을 이끌 수 있게 힘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흘러가는 상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차 한 잔 가져오라고 해.”
“네.”
“참! 오늘도 간자 척살을 할 거지?”
“네.”
“잠시 보류. 오늘은 척살하는 척만 해. 보는 눈이 있으니까. 척살은 보류.”
“네. 알겠습니다.”
혼사는 상당히 궁금할 텐데도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방갓 무인이 음산사마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는 매우 강력한 명령이다. 명령을 어기면 야천 팔방이 몰살당할지도 모른다. 방갓 무인은 그만한 능력이 있다. 본인이 직접 확인시켜 주었다.
그런데 이 일…… 음산사마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자칫하면 과거 성검문 사건에 투입되었던 방파들이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성검문 사건에 투입되었던 방파…… 대망, 상망, 중망…… 야천 구룡 중 여섯 방파가 걸려든다.
그런데 또 하필 이 시기에 대방이 지켜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야천 팔방을 주시한다. 그렇다면 음산사마를 추격하는 일도 당장 드러난다.
양립할 수 없는 두 조건이 부딪친다.
방갓 무인은 이미 일을 저질렀다. 음산사마의 정보를 추격하라고 이번 사달을 일으켰다. 차도살인(借刀殺人), 관부의 손을 빌려서 야천을 공격했다.
다른 팔방이 힘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음산사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것이다.
“하!”
팔룡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백척간두, 막다른 절벽 위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찾아냈다.
이쪽으로 발을 디뎌도 낭떠러지, 저쪽으로 움직여도 낭떠러지다. 어느 쪽으로 움직여도 죽는다.
음산사마의 정보를 찾겠다고 수하를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이번에 드러난 간자들과 함께 척살된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팔방에 공동의 적이 된다.
방갓 무인은 그런 일을 하라고 이번 사단을 저질렀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아!”
팔룡은 또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면 결정을 내리기가 다소 쉬울 텐데…… 이건 완전 깜깜이니.
밤이 깊었다.
낮부터 시작된 고민은 깊은 밤이 되어서도 풀리지 않았다.
도저히 이번 일을 풀어낼 수가 없다. 지금 당장 방갓 무인을 적으로 돌리든가, 아니면 다른 팔방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여야 할 판이다.
‘하! 그런데도 난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팔룡은 손을 들어서 달빛을 가렸다.
달은 보이지 않지만, 달빛은 사방을 환히 비친다. 여전히 달빛이 존재한다.
팔룡은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으면 이런 행동을 취했다.
달을 가리기도 하고, 해를 가려보기도 한다. 날이 궂으면 구름도 가려본다.
무엇을 가리든 상관없다.
요점은…… 아무리 달을 가려도 달빛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던 문제도 해답은 있다. 달빛처럼 고요하게 흐르고 이다.
“앗! 맞다!”
순간! 팔룡의 머릿속에 퍼뜩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적랑대 간자들…… 방갓 무인을 위해서 움직였다. 아삼? 방갓 무인 때문에 왔다.
그럼 방갓 무인은 누구인가!
적랑대 역사를 쭉 훑어보면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다. 적랑대가 외인을 적랑대 식구처럼 받아들인 적이 딱 한 번 있다. 문도가 아닌데도 문도처럼 대했다.
바로 명부판관, 혈도비자 아걸이다.
아삼의 제자이자, 아들이자, 손자이자, 친구이자, 칼 벗!
아걸이라면 전보영을 움직일 수 있다. 적랑대주 임지정이 양보할 수 있다. 적랑대가 물불 가리지 않고 움직인 게 이해된다. 아삼이 호북성에 있는 것도.
‘아걸의 적은 공부 허도기. 성검문. 음산사마를 찾으라는 것도……?’
“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팔룡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풀리지 않던 숙제가 한 번에 쫙 풀렸다.
방갓 무인이 아걸이라면 십리가 형편없이 죽어간 것도 이해된다. 허도기와 맞서는 무공인데, 십리 따위가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나. 그건 싸움이 아니었다. 처벌이었다.
“밖에 있지!”
팔룡이 활기차게 말했다.
“네. 적풍(赤風)입니다.”
호법 여섯 명 중 한 명이다.
“지금 당장 전서를 보내. 각 방에 숨어 있는 밀자들에게 보내. 음산사마에 대한 정보, 즉시 찾아내라고. 위험! 감수하라고 해. 뒤는 확실히 봐줄 테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잖아도 지금 간자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지금 움직이면 바로 발각됩니다.”
“이번 아니면은 알아내지 못할 게 있다. 그래서 이런 사달을 일으킨 거야.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지금 야천을 찢은 힘이 우리에게만 집중될 것이다. 감당하지 못해. 어차피 우리 목숨은 떨어진 거야. 그러니 감수하고 즉시 움직이라고 해.”
팔방주 팔룡도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
매우 중요한 게 있긴 한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중원 전체를 움직일 정도로 거대한 돌풍을 일으킨 것이 모두 음산사마 때문이라는 것은 짐작하겠다.
“네. 바로 전서를 띄우겠습니다.”
“그리고 그놈들 식솔들에게 평생 먹고 살 만한 재물을 넣어 줘.”
“벌써 말입니까?”
“나눠 줘. 그래야 안심하고 움직인다.”
“놈들이 움직이겠습니까. 도주하겠죠.”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방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팔룡은 적랑대 방식을 생각했다. 물론 야천 간자들은 적랑대 간자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싶으면 즉시 내뺀다. 방주의 명령도 무시하고 도주한다.
그들 가족에게 평생 먹고살 돈을 지급한다? 더 잘된 일이다. 한밑천 두둑이 생겼으니 즉시 숨는다.
그런 자들이 속출할 것이다.
그래도 열 명 중 한두 명이라도 제대로 움직이면 무엇인가 얻을 게 있을 것이다.
“시행해!”
방주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