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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324화 (324/600)

#324화. 第六十五章 암추(暗錐) (4)

야천은 묘한 특성이 있다.

참아야 할 때 화를 내고, 화를 내야 할 때 참는다. 눈감아줘야 할 때 칼을 들이대고, 정작 칼을 써야 할 때는 두 눈 질끔 감고 숨도 쉬지 않는다.

같은 흑도인에게 두들겨 맞으면 물불 안 가리고 갚아준다. 하지만 정도 무림이나 관부, 또는 고관대작들에게 두들겨 맞으면 될 수 있는 대로 참는다.

그들이 휘두르는 채찍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다.

검은 잠깐 빛을 뿜었다가 사라진다.

그러면 또 그들 세상이 된다.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잠시만 참으면 상당한 기간 잘 먹고 잘살 수 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수가 있다.

그러니 참는다.

흑도라서 분노하고, 관부라서 겁먹은 게 아니다. 참으면 끝날 일과 오래가는 사안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번 공격은 일시적이다. 그러니 참을 것이다.

“이상합니다.”

눈이 깨처럼 작은 서목이 말했다.

“나는 네가 이상하다는 말을 하면 식겁하더라. 이번에는 뭐가 이상한데?”

“성검문이…….”

“성검문?”

흑후는 서목이 단지 ‘성검문’이라는 말만 했을 뿐인데도 인상을 확 찡그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성검문이 등장하면 안 된다. 야천이나 관부의 움직임이 등장해야지 왜 난데없이 성검문이 나타나나. 이건 볼 것도 없이 골칫거리다.

흑후가 찌푸려진 눈살을 펴지 못한 채 물었다.

“성검문이 왜?”

“성검문이 대문파 문주님들을 초빙했습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중원 삼십 대문파 장문인은 모두 불렀습니다.”

“삼십 대문파 장문인을 초빙해? 지금? 왜?”

“글쎄요. 그건…….”

“근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흑후가 되물었다.

성검문이 대문파 장문인들을 초빙한 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성검문은 무림 제일 문파다. 대문파 장문인들을 초빙해서 우의도 다지고, 무림사도 논의하고, 취향에 맞는 선물도 주고…… 대문파와 교분을 늘려간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 하필 야천이 공격을 받을 때 무림의 실질적인 지배자들이 모임을 하느냐 하는 의구심은 든다. 하지만 또 반대로 생각하면 관부에 버림당했으니 무림이라도 강력하게 장악하려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매우 당연해진다.

“성검문 전서 하나를 낚아챘는데. 보십시오.”

눈 작은 서목이 매우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성검문에서 청성파(靑城派)로 보내는 밀지다.

흑화방이 전서를 낚아챈 후, 전서를 필사한 후에 다시 넣어서 날려 보낸다.

흑화방은 이런 일에 매우 능숙하다.

“이건 뭐야?”

“장문인들을 초빙하는 밀지입니다. 그런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상한 내용이…….”

“무림 상황을 살피면서 와라? 왜?”

흑후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서목을 쳐다봤다.

전서 내용은 간단했다.

- 재문개회(在門開會)

성검문에서 회합하자는 말이다.

여기서 문(門)이 성검문을 지칭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글이 거기에서 끝났으면 이상하지 않은데, 그 후가 이상하다.

- 로상(路上), 타타착수화거(他打著手火炬) 찰간료무림이면(察看了武林裏面).

회합에 참석하는 길에 횃불을 켜고 무림 속을 잘 관찰해달라.

무림 상황을 세밀히 살펴보면서 와 달라는 내용이다.

“흠! 확실히 이상한데?”

흑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파일방 같은 대방파가 무림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고 있을까? 알고 있다. 누구보다도 자세히 안다.

특히, 개방 같은 경우에는 문도만 십만 명이 넘는다. 중원에 떠돌아다니는 거지는 모두 개방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대방파다.

그들의 정보 수집력은 대단해서 오늘 황후가 무슨 색깔의 속옷을 입었는지까지 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굳이 무림 상황을 살피면서 올 필요가 있나?

화거, 횃불!

성검문으로 오면서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얘기로 풀이된다.

입김이 닿는 문파에 압력을 넣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파란을 중지시키라는 뜻이 아닐까? 관부에 동조한 무림 문파가 일제히 손을 떼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검문이 여전히 무림 제일 문파라는 인식을 관부에 심어주는 것이다. 성검문의 협조 없이는 어떤 일도 벌일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각인시켜 준다.

관부는 성검문을 팽하고 임의로 각 문파에게 자유를 주었다.

나쁜 놈들을 몰아내고 그들이 엉망으로 운영하던 것들을 정상으로 돌려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말이 정상이지 빼앗아도 좋다는 의미다.

세력을 넓힐 좋은 기회다.

이런 유혹 때문에 관부와 협조해서 움직인 문파가 상당히 많다.

중원제일문파, 대방파인 성검문이 작은 중소문파까지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섞여 있었다.

이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면 성검문은 위신을 찾게 된다.

야천은 어떤가? 지독하게 몰아치던 압박이 단숨에 가신다.

“역시 야천이 필요하긴 필요한가? 말로는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놓고선 이 정도면 상당히 도와준 건데. 사실, 이 정도까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흑후가 웃었다.

“차도살인이라. 손도 안 대고 코를 푼다 이거지. 장문인들을 부려서 ‘너 물러서’ 하면 물러서지 않을 놈들이 어디 있어. 하! 대단한 강수를 두셨네.”

흑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서목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했다.

“에구!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한데. 제가 이상하다고 말했잖습니까. 킥킥!”

‘웃!’

흑후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서목이 뭔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지금 생각한 대로라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흑후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밀지를 다시 봤다.

무림 상황을 살펴보면서 와 달라. 그밖에 다른 말은 없다. 몇 번을 읽어봐도 똑같은 말이다.

“뭔데? 난 아무리 봐도 이상한 게 없는데?”

“그렇죠? 없죠? 킥킥! 나 없으면 어쩌시려고 이러나. 다 좋으신데 너무 덤벙대셔서…….”

“너 맞는다.”

“킥킥! 밀지 끝이 찢어져 있습니다.”

“응!”

흑후는 깜짝 놀라서 밀지를 펼쳐봤다.

그가 들고 있는 밀지는 전통에 들어있던 것이 아니다. 전서를 낚아챈 후에 베끼어 쓴 것이다. 밀지 끝이 찢어져 있는 것은 그도 봤지만, 찢어진 종이에 썼다고 생각했다.

서목은 밀지가 찢어진 형태 그대로 찢어서 가져왔다.

“밀지가 이런 형태였다고?”

“네.”

“아! 이건 뭐지?”

흑후가 탄식했다.

전서를 찢어진 종이에 썼다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압박이다! ‘물러서라’가 아니다. 잘했다는 칭찬이다. 지금 자리를 더 강력하게 지키라는 독려다. 성검문도 같은 뜻이니 마음껏 활개를 펴라고 말한다.

관부가 성검문을 거치지 않았지만, 성검문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민초를 위한 일이지 않나.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생충을 없애는 일인데, 막을 이유가 없다.

단 밝음만 본다. 횃불!

야천이 행했던 어두운 일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라면 애당초 버려라.

대방파를 동원했다는 것은 현재 움직인 문파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정도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행할 경우, 성검문 이름으로 징계하겠다는 선포다.

이것은 관부의 영향력을 반감시킨다. 성검문의 건재함을 만 무림에 알린다. 더불어서 야천이 일어설 틈도 주지 않는다. 두 번 다시 옛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야천 구룡에 대한 대단한 압박이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하면서도 성검문은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일이 전혀 없다.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멀리서 쳐다보기만 한다.

허도기는 야천에 너희들 힘으로 이 위기를 벗어나라고 말했다.

야천 스스로 난관을 타개하지 않으면 지금 빼앗긴 터전들은 영구히 빼앗긴다. 되찾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터전을 일굴 생각이라면 모를까 막대한 수익을 되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

야천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압박하고 있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네.”

흑후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웬일이야?”

대방이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긴히 말씀드릴 게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지 뭡니까.”

흑후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뭔데 그래? 사람이 올 때는 좋은 소식 좀 가져와야지. 매번 이상한 말만 가져오면 되나. 이번엔 또 뭔데?”

“거기……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움직이셔야 할 것 같은데요.”

흑후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자세히 얘기해 봐.”

흑후는 서목이 낚아챈 전서를 내밀었다.

“이거 저희가 중간에서 가로챈 건데, 좀 보시죠.”

야천 대방 방주, 수더분해서 사람 좋아 보이는 노인이 손을 내밀어 밀지를 받았다.

“흠! 요즘은 눈이 침침해서 글자가 잘 안 보여. 보자…… 그러니까…… 삼십 대문파가 회합하는 거야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고. 응?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건가? 우리 힘으로 어쩌고저쩌고 해보라며?”

대방도 밀지를 자세히 보지 않았다. 흑후가 읽었을 때처럼 잘못 읽었다.

대방은 만족했는지 입가에 웃음까지 떠올렸다.

“방주님. 그게…… 밀지가 찢어져 있어서.”

“응?”

대방주가 밀지를 다시 쳐다봤다.

순간,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허도기 이 사람! 보자 보자 하니까!”

대방의 입에서 노기가 흘러나왔다.

“그렇죠? 이번에는 좀 심한 것 같은데.”

“이거 우리를 잡아먹겠다는 거잖아!”

“아무래도…….”

“후후후! 이거 이번에 공부께서 단단히 칼을 뽑으셨네. 도대체 뭔 일을 벌이시려고 이렇게까지 칼을 뽑으시나.”

사람 좋아 보이는 노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허도기의 뜻은 간단하다.

야천, 움직여라! 너희 실력 좀 보자.

실력이 보잘것없으면 당장 쳐버리겠다. 움직이는 것 봐서 쓸 만하다 싶으면 받아들일 것이고.

이런 뜻이다.

움직여서 야천 스스로 수하될 자격이 있는지 증명해 보라는 거다.

수하가 될 자격조차 없으면 죽여버릴 것이고, 그나마 쓸 만하면 수하로 거두겠다는 거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나.

하지만 불행하게도 야천에게는 이 명령을 거부할 만한 힘이 없다.

대방 방주는 허도기의 무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성검문의 위력을 뼈저리게 절감한다. 허도기 눈 밖에 나면 야천은 하루아침에 멸살 당한다. 관부가 공격해 온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태풍이 몰아칠 것이다.

더욱이 지금 허도기는 군부의 힘까지 등에 업고 있다.

성검문이 지닌 힘만으로도 야천을 몰락시킬 수 있는데, 황상의 입김까지 안고 있다. 관군 동원은 물론이고 군대까지 움직일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이건 상대가 안 된다.

“그럼 할 수 없지. 움직여야겠군. 혈검, 밖에 있으면 들어와.”

“네.”

대답 소리와 함께 밖에서 칼이 들어왔다.

칼! 칼이다!

분명히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데 흑후는 마치 칼이 들어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흑수혈검, 대방주가 자랑하는 제일 검수다.

“공격하자. 이번 일을 주도했던 자들을 파악해. 기한은 이틀이다. 이틀 안에 전보영에서 누가 개입했는지 알아내고…… 이번에 가장 지독하게 굴었던 자들도 파악해. 각 성(省)별로 관원 열, 무인 열 명을 선별하라고 해.”

“전보영까지 건드립니까?”

흑수혈검이 놀라서 물었다.

“그놈들을 안 건드리면 우리가 죽어. 허도기 적이 대장군이잖아. 전보영은 대장군 수족이고. 이번 일이 전보영에서 나왔다면 당연히 피를 봐야지.”

“그러면 더 큰 공격을 받습니다.”

“그럼 어째? 그렇지 않고는 공부 그 양반이 만족하지 않을 텐데. 우리 힘을 빌려서 성검문 체면을 세우겠다는 거잖아. 그리고…… 반격을 안 받도록 죽여야지. 우리가 잘하는 거 있잖아.”

암살을 말한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서 길거리에 늘어놓는다.

암살은 등 뒤에서 찌르는 칼이다. 무공이 강한 자도 잠시만 방심하면 당한다.

대방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잘하는 거로 가자고. 우리가 당했던 것처럼 한날한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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