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331화 (331/600)

#331화. 第六十七章 낭추(囊錐) (1)

“보고드립니다.”

차분한 음성이다. 음성이 전혀 들뜨지 않았다. 다급한 보고는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쯧! 아침 댓바람부터.’

대방 방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은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 좋은데 뭐 보고할 게 그리 많다고 호들갑인가.

“뭐야?”

음성에 마뜩잖은 기색이 가득 묻어났다.

“제이방 미령혈수가 당했습니다.”

“뭣! 당했다니? 무슨 말이야?”

대방 방주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나른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보고를 듣는 즉시 전신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미령혈수는 야천 최고수 중 한 명이다.

미령혈수가 있어서 야천이방이 상망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미령혈수 한 명이면 야천 칠방이나 팔방, 구방 같은 방파를 하나 더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미령혈수가 당했다?

“이번에 야천이방이 철저하게 당했습니다. 미령혈수가 죽었고, 미령혈수와 같이 소유검파를 공격했던 철전수들도 모두 당했다는 보고입니다.”

“소유검파가…… 그럴 리가 있나? 소유검파에 그만한 고수가 어디 있어?”

“취화원이 뒤를 친 모양입니다.”

“취화원!”

야천 대방 방주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흑수혈검! 흑수혈검을 빼내!”

“네?”

“지금 빨리 전서를 보내라! 흑수혈검한테! 모든 행동을 중지하고 즉시 돌아오라고 전해! 빨리!”

“네. 알겠습니다.”

보고하던 수하가 재빨리 사라졌다.

“이것들이!”

대방 방주는 신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취화원 살행을 분석해 보면 한결같이 일대일 승부였다. 사건 하나에 취화원 살수 한 명이 달라붙었다. 죽은 자는 여러 명이지만 공격한 살수는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격 형태가 변했다.

미령혈수를 죽인 자가 있다. 그리고 철전수들을 죽인 살수가 따로 있다.

미령혈수와 철전수는 한 몸처럼 움직였을 것이다. 미령혈수가 위협받으면 철전수가 즉시 공격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철전수가 위험하면 미령혈수가 움직인다.

이 둘을 동시에 공격해야 한다.

살수 한 명으로는 안 된다. 적어도 수십 명, 최소한 대여섯 명 정도는 달라붙어야 한다.

취화원이 무리를 지어서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자신들 뒤에 매가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거다.

매 잡는 참새가 된 것이다. 아니, 원래부터 참새가 아니고 독수리였는지도 모른다.

“구룡회를 연다! 즉시 연락해!”

“네!”

지시가 정신없이 이어졌다.

구룡회가 소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또다시 구룡회가 열렸다. 야천구방 방주들이 모여서 강공책을 결정한 지 채 한 달이 되지도 않았는데.

방주들은 군말 없이 모여들었다.

예정에 없던 임시회합이지만 불참자도 없다.

대방 방주가 한가운데에 앉고, 다른 방주들이 좌우로 네 명씩 앉았다.

분위기가 매우 무겁다.

모두 오늘 무슨 말을 나눌지 짐작하고 있다. 야천이방에서 일어난 참변도 알고 있다.

“퉁구발을 말했다고 해요.”

제이방 방주가 입을 열었다.

“퉁구발?”

제일방 방주가 이방주는 쳐다봤다.

“미령혈수가 퉁구발 출신입니다. 가장 밑바닥부터 악착같이 기어 올라온 칼이었죠.”

“음.”

퉁구발이라는 말에 방주들이 침묵했다.

원래는 퉁구바리라는 말이었다. 그 말이 줄어들어서 퉁구발이 되었다.

광동(廣東) 지방에 항아리처럼 크고 붉은 꽃이 있다. 일명, 시체꽃이라고 한다. 꽃이 피면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기는데, 악취가 일 리 넘게 퍼진다.

이 꽃을 퉁구화라고 한다.

바리는 짐승의 숫자를 셀 때 쓰는 단위다. 한 마리, 두 마리 하는 대신에 한 바리, 두 바리라고 말한다. 광동 사투리다.

퉁구바리란 ‘악취 풀풀 풍기는 년’이라는 뜻이다.

한 년, 두 년, 세 년…… 그렇게 악취 풍기는 여인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마을.

일전통이나 퉁구발이나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최하, 지독한 밑바닥이다.

이런 곳에서 기어 올라오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방주들이 잘 안다. 바로 그런 곳을 지배하고 있지 않나. 그런 곳에 있는 사람들을 부리고 있지 않나.

이런 곳에서 기어 올라오려면 제일 먼저 죽을힘을 다해서 싸움부터 해야 한다. 무공을 수련한 후에 싸우는 것은 호사다. 우선 싸움부터 시작한다.

그것도 죽을힘을 다해서 싸워야 한다.

한 명, 한 명 꺾어 나가다 보면 죽이기도 한다. 원한도 사고 원수도 많아진다. 당연히 ‘조직’이라는 곳에 쫓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무공이라는 것을 접한다.

순서가 이렇게 된다.

하지만 무공을 접하기 전에 몰매 맞아 죽는 경우가 태반이다.

무공이라는 것을 접해도 수련하기가 쉽지 않다. 수련하는 도중에 쫓는 자들한테 잡혀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공이라는 것 자체도 시답지 않다. 아무 근본도 없는 자가 접한 무공이라는 것이 시원하겠나. 영 쓸모없는 것들이다. 그런 무공이나마 좋다고 접한다.

쓸데없는 무공을 수련해서 또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싸우고, 싸우다가…… 계단을 밟아 올라가다가…… 조금 더 강한 무공을 접한다.

그렇게 해서 미령혈수까지 됐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왔는지 여실히 말해 준다.

퉁구발 출신 미령혈수.

취화원은 미령혈수가 퉁구발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미령혈수는 자신의 출신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퉁구발 출신이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숨기고 싶은 최악의 과거다. 아비는 비천하게 비루먹던 자이고 어미는 몸 파는 여자였다. 그것도 동전 한 닢에 몸을 파는 여자였다.

이런 과거가 썩 흔쾌할 리가 없다.

만약 누군가가 퉁구발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면 그 즉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야천구방 구령들이 미령혈수의 과거를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과거를 알고 있는 야천이방 방주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어떻게 할 수 있나.

그 사실을 취화원이 알아낸 것이다.

취화원이 발이 넓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적랑대가 정보를 수집해서 취화원에 알려 준 것이다.

취화원은 등 뒤에 매가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 매를 저격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했다. 이미 뒤통수칠 준비를 끝낸 후에 움직였다.

“다른 피해는 없었소?”

대방 방주가 좌중을 쓸어 보며 말했다.

“미령혈수 소식을 접하고……”

야천삼방 방주가 말을 하다가 이방주를 흘깃 쳐다봤다. 아무래도 아픈 이야기 같아서 미령혈수 말을 꺼내기가 껄끄럽다. 하지만 계속 말을 이었다.

“미령혈수 소식을 듣고 즉시 공격을 멈췄습니다. 이번 공격은 움직이는 즉시 당할 것 같아서.”

대방 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는 이제 할 일이 없고…… 성검문 요구대로 깨 벗고 주는 수밖에 없겠는데…… 다른 의견이 있으신지.”

구룡이 침묵했다.

야천이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성검문에 투신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머리를 숙이면 완전히 노리개가 되고 만다.

허도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다 내어 줘야 한다.

“저는 옛날 성검문 사건에 개입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확하게 허도기가 우리 야천에 바라는 게 뭡니까?”

팔룡이 물었다.

성문에 깨 벗고 준다고 하면 야천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을 준다는 쪽으로 생각하기 쉽다.

맞는 말이다. 허도기가 야천에 바라는 것은 절대 마인밖에 없다.

단, 단서가 붙는다. 허도기가 쓸 수 있을 만큼 마공이 출중한 마인이어야 한다. 흑수혈검이나 죽은 미령혈수 혹은 패도광마 같은 절대 칼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요구는 야천 대방이나 이방, 삼방 같은 상망의 문제다.

절대 칼이 없는 하망은 성검문에 투신하나, 투신하지 않나 입장이 똑같다. 칠방, 팔방, 구방의 경우에는 굳이 이 회합에 참석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물어 봤다.

“음!”

대방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방주와 삼방주도 마찬가지다. 표정이 좋지 않다.

이방 같은 경우에는 하망처럼 보내 줄 무인이 없다. 미령혈수가 죽었다.

미령혈수에 미치지 못하는 칼을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칼로 허도기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허도기가 요구하는 칼이 상책(上責)이나 중책 정도로 될까?

겨우 마인 한두 명 얻자고 야천을 핍박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말해도 무방할 듯싶습니다만.”

야천이방 방주가 말했다.

대방 방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믿는 칼, 제일 칼이라고 하는 자들…… 허도기에게는 칼받이밖에 안 돼요. 물론 그 칼도 내어 줘야 할 것이고…… 허도기는 진짜 필요한 사람들 명부를 보내올 겁니다. 그러면 죽을힘을 다해서 찾아야 할 거예요.”

‘음산사마!’

팔룡은 퍼뜩 음산사마를 떠올렸다.

음산사마는 야천이 통제할 수 없는 마인이었다.

허도기가 명부를 보내왔고, 야천에서 음산사마를 찾아 대령시켰다.

막연한 추측이지만, 맞을 것이다.

지금쯤 야천 각방에 투입해 두었던 간자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각방 방주들의 거처를 뒤지고 있다. 집무실도 뒤진다.

옛날 성검문 사건에 관여했던 방주는 모두 다섯 명이다. 네 명은 그 후에 방주 직을 맡았다. 순리적으로 대를 이은 사람은 없고, 방주가 피를 흘린 후에야 이어받았다.

당연히 성검문 사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옛날 사건에 가담했던 방주들은 미령혈수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구룡회가 열릴 것은 예측했을 것이다. 또 어떤 안건이 제시될지도 짐작한다.

그들은 과거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명령을 되새겨 볼 것이다. 당시도 허도기가 명부를 보내왔을 테니까. 그러면 혹여 남겨 놓은 서신이나 밀지가 있다면 꺼내 봤을 가능성이 크다.

팔룡은 정보를 음산사마에 국한하지 않았다.

성검문 사건에 관여된 사안이라면 모두 다 추려 내라고 지시했다.

음산사마뿐만이 아니고 다른 마인이라도 상관이 없다. 어떤 식으로 야천과 연관을 맺었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 성검문에 투입되었는지…… 아니 꼭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음산사마의 ‘음’ 자만 들어가도 빼내라고 했다.

그들 중 많은 자가 수색 도중에 발각될 것이다. 하면 독단을 깨물고 죽는다.

야천은 그들을 적랑대 간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 중 배신자가 나올 수도 있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이 야천팔방 방주라고 실토할 수도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그들과의 거리를 철저하게 차단해 놨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염두에 두고 명령을 내렸다.

오늘 밤,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방주들이 모여서 몇 마디 말을 나누는 동안에도 수십 명이 죽어간다.

팔룡이 물었다.

“명부에 적힌 자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풋!”

대방 방주가 웃었다.

“팔룡답지 않은 말씀을 하십니다. 방주가 필요 없는 자를 옆에 두는 경우, 봤습니까?”

“사람 찾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 같습니다만.”

야천구방 방주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 같은데, 어렵다는 투로 말하니…… 어떤 함정이 숨어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치가 떨리는 자들일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엮이고 싶지 않은 악마들 말예요.”

야천삼방 방주가 대방 방주를 대신해서 말했다.

“그런 자들을 찾아서 허도기 앞에 내세우려면 단언하건대 목숨을 걸어야 할 겁니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죠. 또 그 일은 절대 비밀리에 행해야 하니까.”

“허도기가 우리한테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 그 일도 못 하면 필요 없는 사람 취급받을 테니까.”

뒷말은 대방 방주가 했다.

‘역시…… 음산사마도 이런 식으로 엮었어.’

팔룡은 눈빛을 차분히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목적지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마구 들끓었다.

허도기는 야천이 가진 재화라든가 무뢰배를 원하는 게 아니다.

물론 야천이 가지고 있는 칼도 줘야 한다. 그리고 그 칼들은 거의 돌아오지 못한다.

야천 제일 칼도 허도기에게는 별것 아니다.

상망 방주들은 자신의 칼이 허도기의 눈에 들 것이라고 자부한다. 세상에 어떤 마인이 흑수혈검의 칼을 받아 낼까? 받아 낼 자가 많지 않다. 그만한 자부심은 품고 있다.

옛날에도 그랬다. 하지만 그들 모두 칼받이가 되고 말았다.

하기는 치가 떨리도록 무섭던 자들조차도 한낮 노리개가 되고 마는 판인데.

어쨌든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

그 말이 딱 적용되는 전장이 기다리고 있다.

허도기가 무엇을 할지 모르겠지만 야천에 깨 벗고 내놓으라는 말을 했으니 옛날 성검문 사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요구를 해 올 게 뻔하다.

그 요구들을 수용한다는 항복 각서를 내밀어야 한다.

야천구방 방주들은 좀처럼 침울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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