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第六十七章 낭추(囊錐) (3)
“흑화방 흑후가 들었습니다.”
소축 안에서는 대꾸가 없었다.
보고한 무인도 다시 보고하지 않았다. 안에서 대답이 없으면, 그것이 대답인 것이다.
“한 번 더 여쭤봐 주시게.”
흑후가 무인에게 말했다.
무인은 흑후의 말을 들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꼿꼿이 선 채로 먼 곳을 쳐다봤다.
‘다시 보고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흑후는 미간을 찡그렸다.
안에서 대답이 있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라는 것은 노골적으로 푸대접하는 것이다.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다. 어차피 이 정도 대접은 각오하고 왔다. 성검문도 눈이 있으니 야천에서 벌어지는 일을 파악했을 터이다. 하지만 기다리는 일 자체가 상당히 고역스럽다.
“한 번 더 여쭤봐 주시지 않겠나.”
흑후는 말을 하면서 돈이 묵직하게 들어 있는 전낭을 꺼내 무인의 허리춤에 슬쩍 찔러 넣었다.
무인이 사납게 눈을 흘기더니 한 발 옆으로 물러섰다.
전낭을 건네려던 흑후는 뻘쭘해져서 손을 거뒀다.
돈을 받지 않는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면서 받지 않으면 다시 건넬 방법이라도 찾을 텐데, 아예 무시해 버린다. 어떤 경우에도 받지 않는다.
“허! 이거…… 한 번만 더 여쭤봐 주시게.”
무인은 사정했는 데도 요지부동, 침묵했다.
‘이거 내 모양이 빠질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빠지나. 동네 강아지도 나보다는 낫겠는데.’
흑후는 속으로 혀를 찼다.
겨우 소축 울타리나 지키는 무인에게까지 이런 천대를 받는 처지라니. 이런 놈이 눈을 흘겨? 이런 놈에게 돈을 찔러주면서까지 사정해야 해? 하!
야천이 좀 제대로 해 줬어야 한다. 그랬다면 자신도 이런 대접을 받지 않고 강하게 말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한쪽에서 완전히 기죽고 들어가면 중간에서 조율할 것이 없다.
이번 일은…… 야천의 항복 서한을 전하고, 허도기의 절대명령을 받으면 끝이다.
아주 재미없는 중재다.
흑후는 무인이 움직이지 않자, 멀거니 서서 명이 떨어질 때만 기다렸다.
허도기는 분명히 소축 안에 있다.
안에 있다는 말을 듣고 왔으니 있을 것이다.
다만 벌을 주는 건지 아니면 버릇을 고쳐 놓겠다는 것인지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
흑후는 막연히 기다렸다.
“그래. 그렇군.”
허도기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볼품없는 소축에는 이미 손님이 있었다. 복면을 쓰고 흑의를 입은 사내다.
복면 사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대방 방주는 급히 구룡회를 열었습니다. 회합 안건은 공부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흑의인은 야천에서 벌어진 일을 직접 눈으로 본 듯이 소상하게 말해 나갔다.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허도기의 낯빛은 딱딱하게 굳었다.
“이렇게 되면 확실해졌나? 아걸, 그놈. 후후! 명이 참 기네.”
이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방갓 무인은 아걸이다. 이번에 야천을 뒤흔든 자가 아걸이다. 적랑대가 달려들었고 취화원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성검문이 뒤로 빠져서 지켜보는 사이, 저들은 매우 강력하게 야천을 흔들었다.
“음!”
허도기는 깊은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서 머리를 긁적긁적 긁었다.
이제 아걸이 왜 야천을 흔들었는지 알겠다.
아걸은 꿩 먹고 알까지 먹을 속셈이다. 그렇다. 아걸은 야천을 흔들면서 두 가지 모두를 얻고자 한다.
겉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걸은 음산사마라는 마인의 행적을 좇고 있다.
음산사마? 음산사마가 누구지?
허도기는 잠시 음산사마를 기억해 내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옛날 일을 떠올렸다. 조카들을 죽일 명분으로 끌어들인 마인들…… 그 속에 음산사마가 있었다.
그 당시 이 일은 전부 독안혈검 전가성이 주도했기 때문에 허도기는 세부적인 사항은 알지 못했다. 마인을 동원한다는 계획은 알았지만, 모든 진행은 전가성이 도맡았다.
나중에야 마인 중에 음산사마도 있었다는 걸 알았다.
잠시 흘려듣고 잊어버릴 이름들이다. 굳이 깊게 알 필요도 없는 자들이다.
하지만 아걸에게는 그 이름이 상당한 무게로 작용했나 보다.
적극적으로 음산사마를 쫓고 있다. 성검문 사건을 캐내고 있는 것이다.
‘풋! 이제 뿌리를 찾겠다는 건가? 이제 찾아서 뭐하게? 내 죄를 만천하에 알리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뭘 한다고. 성검문을 되찾으려고? 후후후!’
허도기는 웃었다.
허도기에게는 이제 성검문 같은 작은 문파는 애착을 가질 만한 보물이 아니다.
무림은 허도기라는 인물을 거두기에는 너무 적다.
천하가 있는데 무림 따위를 가져서 뭐하나.
아니, 이것은 반대로 말해야 한다. 솔직히 무림을 가진 자에게는 천하가 보인다. 천하를 두 발 아래 둘 수 있다. 무림을 떠나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형은 너무 바보다.
무림을 손에 쥐고도 천하를 보지 않았으니 그런 바보가 또 어디 있나?
문제는 아걸이 계속 야천을 들쑤시고 있는 한, 야천을 손에 쥐더라도 마음껏 부릴 수 없다는 것이다.
야천에 명령을 내리면 아걸이 눈치챈다.
자신이 모으는 마인들은 대역사를 위해서 쓰일 것인데, 미리 정보가 노출된다.
아걸이 알게 된 것은 대장군과 전보영에게 공유된다고 봐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걸이 있는 한 야천은 움직이지 못한다.
아걸은 과거를 캐내서 성검문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것 하나, 야천의 움직임을 살펴서 과거처럼 마인들이 동원되는 것을 막는 것 하나, 이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사령.”
허도기가 흑의인을 불렀다.
“네.”
“야천을 가져야겠다.”
“네.”
“야천을 갖는 즉시 철저하게 솎아 내. 어둠이면 어둠답게 살아야지 뭐하러 햇빛을 보려고 해. 완전하게 바꿔.”
“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해?”
“한 달입니다.”
“한 달. 좋아.”
“한 가지. 아걸은 처리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렇지? 아걸은 사령에게도 벅찰 거야.”
“벅차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걸을 공격하면 저희가 노출되는 것은 피하기 어려워서.”
“알았어. 아걸은 내가 처리하지. 아! 진개를 보내 볼까? 요즘 꽤 물이 올랐던데.”
“되겠습니까?”
“안 되겠지?”
“아직은 안 될 것 같습니다.”
“후후! 쓸만한 인재가 없어. 이쪽이고 저쪽이고…… 일홀도가 너무 강한가? 어때? 부딪쳐 보고 싶은 생각 없어?”
“제 검은 강함을 추구하는 검이 아닌지라.”
“강함을 추구하지 않으면?”
“제 검은 살인이 목적인 검입니다. 죽이시라면 죽입니다.”
“하하하!”
허도기는 크게 웃었다.
사령은 일홀도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일홀도가 오직 강함만을 추구한다면, 사령은 죽음만을 쫓는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는 일홀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누구라도 쫓는 사령. 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홀도, 죽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령.
“아걸은 내가 처리하지. 가 봐.”
허도기가 손짓했다.
“그럼 한 달 후에.”
스읏!
흑의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먼지 한 올 남아 있지 않았다.
“들어오라고 해.”
허도기는 그제야 문밖에 대고 말했다.
“여기 대방 방주의 서신…….”
흑후가 두 손으로 공손히 서신을 내밀었다.
허도기는 고갯짓으로 탁자를 가리켰다. 항복 서한인데, 기분 좋은 내용인데, 서신을 풀어 보지도 않았다.
“앉아.”
“네.”
흑후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어깨도 잔뜩 움츠려서 기죽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강한 자들은 이런 모습을 좋아한다. 가식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웃는다.
허도기가 허리를 숙여 흑후를 쳐다봤다.
“원숭이.”
“네? 아, 네.”
흑후가 고개를 빨딱 쳐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흑후라는 말에는 분명히 ‘원숭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원숭이라고 불러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흑후나 원숭이나 같은 말이다.
하나 면전에서 대놓고 원숭이라고 부르니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 꼭 발가락에 낀 때 취급을 받는 것 같다. 허도기가 아니라 다른 자였다면 당장 발작했을 것이다.
“흑화방 말이야.”
“네.”
“여기저기 쑤셔 대고, 중재하고…… 그런 일을 하려면 세상을 참 많이 알아야겠어. 그렇지?”
“약간은 알아야겠습죠.”
“네 눈과 귀는 어디서 나오는 거야?”
“아이고! 그건 저희 흑화방 영업 비밀이라.”
“흑후.”
“네, 나리.”
“흑화방, 지워 줄까? 무림에서?”
“아이고! 무슨 말씀을!”
“네 눈과 귀, 어디서 나오는 거야?”
“…….”
흑후는 대답하지 못하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놈이 이거!’
허도기를 다시 보게 만든다. 차분한 음성 속에서 피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허도기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지금 진실로 말하고 있다. 장난삼아서 물어본 말이 아니다. 흑화방의 눈과 귀가 어디에서 있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어 한다,
“후후! 말하기 곤란한가?”
흑후가 대답하지 않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분 나쁜 표정도 짓지 않고 태연히 물었다.
“저희는 단지 거간꾼일 뿐이라서…….”
“거간꾼이라는 직업이 참 그래. 필요할 때도 많지만, 어떤 때는 귀찮기만 해. 중간에서 거치적거리거든. 언제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도 없고.”
“저희 행동이야 늘 투명합죠. 원하시는 일만 거래를 틀 뿐, 저희가 일을 꾸미지는 않습죠.”
“그러니까.”
“네?”
흑후가 허도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일을 꾸미지도 않으면서 눈과 귀를 왜 말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이런 걸 말하지 못하는 자들은 투명하다고 볼 수 없어.”
“…….”
“가서 생각해 봐. 투명한 게 좋은지, 이대로 괜찮은지.”
흑후의 입가에 잔 경련이 일어났다.
태연함을 유지한다고 애썼지만, 울화가 들끓어서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린다.
허도기는 야천에게 주문했던 것과 똑같은 요구를 흑화방에 하고 있다. 깨 벗고 달라는 것과 완전히 투명하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흑화방의 모든 것을 공개하라는 요구다.
흑후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야천에는 뭐라고 전할깝쇼?”
“괜히 수고할 필요 없어. 방금 말했잖아. 거간꾼이라는 거, 필요할 때도 있지만 거치적거리기도 한다고. 직접 소통이 가능해지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게 거간꾼이야.”
“아, 네.”
흑후는 허리를 숙였다.
흑화방은 허도기에게 공격을 당한 적이 있다. 일기장군 하원랑이 들이쳐서 흑화방도를 눈에 보이는 족족 죽였다. 흑후의 직속 수하인 독비까지 쳐 냈다.
그 후, 흑화방은 완전히 모습을 새롭게 갖췄다.
본거지를 옮기고, 무인을 숨겼다.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물론 허도기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 껍데기 방파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허도기가 다시 공격해 온다고 해도 손해 볼 것은 없다.
“그럼 이번 일은 손을 떼고…… 공부님 말씀은 이삼일 정도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흑후가 머리를 조아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흑화방의 눈과 귀를 줄 수는 없다. 그것을 주면 흑화방은 완전히 허도기의 종으로 전락해 버린다. 잔뜩 이용만 당하다가 죽을 것이다.
인사를 하고 물러서려는 흑후에게 허도기가 불쑥 말했다.
“그런데 본방은 왜 옮긴 거야?”
“네? 무슨 말씀을……?”
“천평(天平)으로 옮긴 거 아냐?”
“아, 아닙니다. 지부(支部)를 만들 필요가 있어서.”
흑후가 급히 말했다.
지금 흑후의 마음속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허도기는 본방을 천평으로 옮긴 것까지 알고 있다. 극비리에 옮겼는데, 환히 꿰뚫고 있다.
“가 봐. 이삼일 후에 좋은 답 가져오고.”
허도기가 인자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