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第六十九章 살우(殺雨) (1)
숨어라!
아걸의 충고는 매우 급박하게 나왔다.
아걸은 음산사마에 대한 조사마저도 중지하라고 말했다. 모든 활동을 끊고 잠적하란다.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다.
아걸의 충고 속에는 어떤 식으로 싸우든 살수를 피할 수 없다는 뜻도 숨겨져 있다.
“혼사.”
“네.”
“적랑대는 어떻게 됐나?”
“거의.”
“거의?”
“네.”
“거의라…… 후후! 하기는…….”
팔룡이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적랑대는 매우 활발한 단체처럼 보인다. 치밀하고 조직적인 것 같다. 아니다. 그들은 그저 일반인일 뿐이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장사치, 마부, 하인 같은 일반 사람이다.
엄연히 말해서 그들은 무인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본 것을 전하는 밀자(密者)일 뿐이다.
사실 그들을 간자라고 부르는 데도 모순이 있다.
간자들은 적어도 훈련이라도 받는다. 야천에 숨어 있는 적랑대는 훈련조차 받지 못했다. 처음에는 돈 몇 푼 벌자고 끼어들었다가 점점 수렁에 빠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 중에는 적랑대가 어떤 조직인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적랑대는 무척 끈끈한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연결선은 ‘가족’이다.
혈육 같은 직접적인 연결선도 있지만, 상당 부분 애정이나 우정, 신뢰 같은 감정이 달라붙어 있다. 사내가 여인을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애인으로 만둔 후, 애인에게 감시를 부탁하는 격이다.
그런데도 이들의 유대가 끈끈한 이유는 모든 감정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 밀정(密偵)에 사람을 이용하지 마라.
이것은 적랑대 제일 율법이다.
적랑대는 끊어질 듯 간당간당 목숨줄을 이어오면서도 절대 죽지 않는다. 적랑대 움직임 속에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철칙을 담아 왔기 때문이다.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마음을 다하는 한, 사람은 부응한다.
당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이 이것이다. 도와주고 싶으면 도와줘도 된다.
강압이 아닌 협조와 부탁으로 세력을 넓혀 왔다.
이 말은 바꿔서 말하면 어떤 한 사람이 발각되면 그 뿌리도 줄줄이 캐질 수 있다는 거다.
아내가 죽는 것을 본 남편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아내가 적랑대 간자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며 냉정하게 돌아설까? 아니면 같이 죽음을 택할까?
적랑대는 마음을 다한다. 그래서 전부 다 걸려든다.
“이거…… 반격이 엉뚱한 데서 일어났어. 대방이 주축이 되어서 움직일 줄 알았는데, 전혀 엉뚱한 곳에서…… 후후! 그것도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당했단 말이지.”
팔룡은 반격이 일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반격은 대방이 일으킬 줄 알았다.
전혀 엉뚱한 곳에서…… 전보영도 아니고 무림도 아닌,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자들에게 당할 줄이야. 야천이 이토록 실없이 무너질 줄이야.
“입술이 닳아서 없어지면 이가 고생하는 법이지. 적랑대가 무너졌다면, 아삼 쪽은 끝장난 거야. 허!”
팔룡은 혀를 차다.
이 밤,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다.
* * *
쓱! 쓰윽!
황련(黃連)은 칼로 썩은 나무뿌리에 작은 표식을 새겼다.
취화원에 보내는 밀마다.
오 리마다 예정된 장소가 있고, 그곳에 밀마를 남겨 놓는다. 그러면 사나흘에 한 번씩 누군가가 와서 밀마를 거둬간다. 그러니 이 밀마가 언제 취화원에 전달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이 일전통에서 벗어났고, 최소한 오 리는 달려온 후 밀마 한 조각을 남겼다는 사실만은 전해질 것이다.
- 소축십검(小畜十劍) 오진북(吳鎭北) 돌습료일전통(突襲了一錢通). 여적인전투(與敵人戰鬪),도인위시위험적(都認爲是危險的). 이경유일개인사망(已經有一個人死亡).
소축십검 오진북이 일전통을 급습했다.
팔 장로와 다른 형제들이 싸우고 있는데, 모두 위험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미 한 명은 목숨을 잃었다.
밀마는 짧을수록 좋다.
스읏!
황련은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다 말고 다시 납작 엎드렸다.
스으읏! 스으으읏!
인기척이 느껴진다.
‘누군가 온다!’
삭! 삭! 삭!
풀잎을 스치며 걷는 발걸음이 매우 가볍다. 단지 가벼운 정도가 아니라 상당한 탄력이 느껴진다. 어떤 방향에서 공격해 오든 즉시 그 방향으로 뛰쳐나갈 준비가 됐다.
‘굉장한 고수!’
황련은 잔뜩 긴장했다.
상대는 일전통에 나타난 오진북이 아니다. 그와는 기감이 상당히 다르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뒤를 밟아온 것이 확실하다.
취화원은 밀마를 남기는 장소를 선정할 때, 사람 왕래를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넓고 번잡한 길을 제일 많이 사용한다. 그런 장소는 밀마를 남기기도 쉽고 거둬 오기도 쉽다. 무엇보다도 비밀이 보장된다.
인적이 완전히 끊긴 곳은 지극히 위험할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이런 장소는 밀마를 남기기는 쉽지만, 거둬 오기가 어렵다. 만약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면 제일, 제이, 제삼…… 꼬리가 연달아 잡힐 수 있다.
황련이 밀마를 남긴 것은 인적이 완전히 끊긴 곳이다.
일 년 열두 달을 지켜봐도 사람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워낙 긴급한 사안이라서 부득이 이런 곳에 밀마를 남긴다. 취화원에 즉시 전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
그런 곳에 자신이 들어섰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섰다. 우연일까? 이런 우연을 믿을 바보는 없다.
스으으…… 스르르……!
황련은 천천히, 매우 천천히 소리를 완전히 죽이면서 검을 뽑았다.
스읏!
몸을 풀에 동화시킨다.
암영검의 첫 번째 원칙은 어둠과 동화되는 것이다.
어둠이라는 말은 극단적인 실례다. 풀밭에 있으면 풀에 동화되어야 하고, 숲에 있으면 숲에 동화되어야 하며, 모래밭에 있으면 모래와 동화되어야 한다.
주변 지형지물과 동화되는 것을 암이라고 한다.
스읏!
황련은 풀에 동화되어서 상대방을 지켜봤다.
처벅! 처벅!
상대가 천천히 걸어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새카맣다. 머리를 완전히 가린 복면, 새까만 옷, 요대 같은 장신구도 흑의다. 신발도 검은색이다. 허리에 찬 검도 묵빚이다.
홍련은 검은색 이외에 다른 부분도 봤다.
흑의인의 일신에서 빛나는 물체는 하나도 없다. 검집조차 유광(有光)이 아니고 무광(無光)이다.
만약 흑의인이 어둠에 숨어 있다면, 그를 찾아내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암’을 이룰 수 있는 자다.
‘후우웁!’
황련은 숨을 죽였다.
복면인은 자신과 같은 부류다. 암살자!
암영검의 두 번째 원칙, 영이 된다.
영(影)은 그림자다. 그림자는 살아 있지 않는다. 죽어 있다. 몸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움직일 뿐, 자유 의지가 없다. 존재하고 움직이지만, 살아 있지는 않는다.
지금 황련에게 육신을 대체하는 것은 진기다.
진기가 움직이면 몸이 따라서 움직인다. 진기를 육신으로 만들고, 육신을 그림자로 만든다. 진기가 먼저 나가고 몸과 검이 따라서 움직인다.
이것이 영이다.
꾸꾸꾸! 꾸꾸꾸구!
진기가 파장처럼 넓고 고요하게 퍼져 나갔다.
상대방의 몸을 살폈다. 기도를 감지한다. 진기의 강약을 점검해 본다. 움직임 속에서 허점을 찾는다.
이 모든 것이 언제 공격하면 좋을지 기회를 엿보는데 집약된다.
저벅! 저벅!
흑의인은 무심히 걸어왔다.
상대방은 아직 암영검을 느끼지 못한 듯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걸어온다.
‘걸렸어!’
황련은 자신했다. 그리고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즉시 신형을 쏘아 냈다.
쒜에에엑!
검에서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순서는 검이 먼저가 아니다. 검에 앞서서 진기가 달려 나갔다. 신영이 뒤따라 나갔고, 검은 부수적으로 따라붙었다. 그 뒤에 파공음이 일어났다.
소리를 듣고 반응한다면 이미 늦은 것이다.
쒜엑! 퍽!
장검이 흑의인의 몸을 뚫었다.
이렇게 쉽게? 한순간 의아했지만 장검이 배를 뚫고 들어간 것만은 확실했다. 한데,
푹!
또 한 번…… 이상한 울림이 일어났다.
“훅!”
황련은 헛바람을 내질렀다.
분명히 상대를 검으로 찔렀는데…… 오히려 자신이 아프다. 자신이 당했다.
황련은 믿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손에 든 검을 쳐다봤다. 아니? 맞지 않나. 착각이 아니다. 검이 상대방의 몸을 뚫었다. 검첨이 배를 뚫고 나와서 등 뒤까지 삐져 있다.
정확한 일격이다. 자신의 공격은 확실히 성공했다. 다만 상대방도 반격했을 뿐이다.
사내가 손에 든 장검으로 그녀의 몸을 뚫었다.
“이…… 이런 빠름이…….”
황련이 놀란 눈으로 사내를 쳐다봤다.
그때, 사내가 속삭였다.
“황련.”
황련이 눈을 부릅뜨고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가 자신을 안다. 자신이 황련인 줄 아는 사람은 취화원 살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내가 안다. 일전통 살수가 열두 명이나 되는데, 정확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황련. 깽깽이풀. 흔히 황련이라는 말 대신에 안도나(安阇那)라고 말하는데. 황련이라는 말에는 괴롭다, 억울하다. 답답하다, 고통스럽다는 뜻이 있어서. 괴로움이 좋은가?”
“당신 뭐야!”
황련이 흑의인을 노려보며 물었다.
황련은 닭 다섯 마리에 팔려서 칠순 노인의 침처(寢妻)가 되었다.
이미 기력이 쇠한 노인이라서 잠자리는 하지 못하고, 그저 애완동물처럼 껴안고 자는 역할만 한다. 그러는 동안에 노인 몸에 동녀(童女)의 음기가 전달된다고 믿는다.
침처는 노인이 죽으면 무덤에 같이 묻힌다.
황련은 그 시절을 잊지 않으려고 일부러 남들이 피하는 꽃 이름을 선택했다. 야생초 중에서도 비루해서 남들이 꺾지도 않는 꽃, 깽깽이풀을.
흑의인은 이런 사실까지도 안다.
일전통에 있는 사람들을 낱낱이 파악한 후에 공격한 게 틀림없다.
‘아! 장로님!’
황련은 장로를 비롯한 동료들 모두가 절명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사내 입술이 가늘게 움직였다. 윗입술이 위로 쳐들리며 하얀 이가 드러났다.
사악하다! 사악한 웃음이다!
‘위험!’
황련이 경각심을 느꼈지만 이미 늦었다.
쓱!
몸에 박힌 검이 빠져나갔다. 아니, 아니다. 몸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간 게 아니다. 빠져나가는 듯하다가 다시 푹! 찔렀다. 같은 자리를 놔두고 옆으로 썰면서 찔렀다.
“끄으으윽!”
황련은 비명을 쏟아 냈다.
검이 빠져나가다가 다시 들어오는데, 검신마저 옆으로 휙 돌린다. 순간, 오장육부가 가닥가닥 찢어졌다. 일신 모든 신경이 갈라지는 듯한 고통이 치민다.
쓱! 푹! 쓱! 푹! 쓱! 푹!
사내는 검으로 황련의 복부를 썰어갔다.
“이익!”
황련도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았다. 그리고 사내가 하던 식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쓱! 푹! 쓱! 푹! 쓱! 푹!
사내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의 검도 사내의 배를 찔렀다. 옆으로 썰었다.
푹! 푹! 푹! 푹! 푹! 푹!
두 사람은 서로를 계속 찔렀다.
하지만 황련이 먼저 힘을 잃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두 다리도 축 늘어졌다.
풀썩!
그녀가 주저앉았다.
그제야 사내는 그녀의 몸에서 검을 완전히 빼냈다. 그리고 위로 쳐들어 올렸다.
피 묻은 검이 햇빛에 반짝인다.
묘하다. 검신도 무광이다. 쇠를 날카롭게 갈면 자연히 빛이 난다. 그 후에 약물 처리를 해서 빛을 죽였다. 날카롭기는 여전하지만 빚은 없다.
황련은 웃었다.
사내의 검이 태양을 가르는데, 매우 아름답다. 아름다운 움직임이다.
검이 정확하게 태양을 두 동강 내며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