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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344화 (344/600)

#344화. 第六十九章 살우(殺雨) (4)

‘이게 마지막!’

노충은 앞에 놓인 전서를 수습했다.

- 육방 방주가 폐관 수련 중에 주화입마를 당한 채로 죽었다.

- 팔방 방주의 집무실이 폭발해서 팔룡을 비롯해 사리가 폭사했다.

이 두 장의 서신이 오늘 하루 동안 날아온 보고의 전부다. 다른 보고는 들어오지도 않고 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던 밀마가 뚝 끊겼다.

노충은 드디어 자신의 시간이 끝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적랑대 형제들이 모두 죽었다. 화를 피할 사람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잡듯이 뒤져 대는 압박 수색을 견디지 못했다. 모두 죽거나 잡혔다.

노총은 이제야 아삼이 말한 뜻을 알았다.

-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냐?

이런 뜻이었다. 모두가 죽는다는 뜻이다.

“후후!”

노충은 웃으면서 일어섰다.

모든 게 다 좋았다. 형제들은 제대로 일했다. 오랜만에 활기를 띠었고, 숨 막히는 긴장감도 즐겼다.

다 좋았는데…… 갑자기 낯선 놈들이 나타나서 야천을 휘저었다.

그놈들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자신들의 뜻대로 야천은 아걸이 장악했을 것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 성사 여부는 하늘에 달린 것을 어떻게 하겠나. 의외의 변수가 이렇게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나. 흑의인의 등장을 생각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노충은 아걸에게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

스읏!

눈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낯선 자다. 하지만 누군지 안다. 전신을 흑의로 감싼 자, 흑의인.

“뭐야? 내 차례인가?”

노충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사전에 모든 사실을 전부 파악한 후에 찾아온다. 정확히 죽일 자들 앞에만 나타난다. 그리고 나타난 후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제길!”

털썩!

노충은 일어섰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반항을 해 봐도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안다.

스릉!

흑의인이 검을 빼 들고 걸어왔다.

노충은 그를 묵묵히 쳐다봤다.

쓱!

눈앞에서 검이 쳐들렸다. 검이 그의 가슴을 겨눴다. 그리고 천천히 찔러 온다.

푹!

노충은 의자에 앉은 채로 검을 맞았다.

눈을 부릅떴다. 극심한 고통이 전신에 회오리쳤지만,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최소한 죽음만큼은 적랑대 일원답게 맞이하고 싶었다.

꾸우우욱!

검이 깊게, 깊게 찔렀다.

심장이 갈라진다. 심장이 뚫린다.

노충은 고개를 푹 떨었다.

* * *

“술! 술! 술 가져와, 이놈들아!”

아삼이 빽! 소리쳤다.

아삼은 이미 만취 상태였다. 눈동자는 이미 풀렸고, 몸도 가누지 못해서 마구 흔들거린다.

“인제 그만 드시죠.”

수발드는 적랑대원이 아삼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만? 안 마시면 뭐 하게? 나 안 취했어, 이놈아!”

“압니다.”

“그러니까 술 가져와!”

“술 가져오라고 했어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가져올 겁니다.”

“킥킥킥!”

아삼은 키득거리면서 주변을 쓸어 봤다.

자신 혼자서는 쏟아지는 정보를 감당하지 못해서 적랑대원을 추려 왔다. 정보를 취합하고 분류하는 놈들을 끌어모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정보들을 선별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다 놀고 있다.

들어오는 정보 자체가 없다. 간간이 한 건씩 전서가 날아드는데, 모두 적랑대가 죽었다는 보고뿐이다.

사달이 단단히 났다.

자금은 그런 소식마저도 뚝 끊겼다.

“킥킥! 그놈들은? 도착했대?”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좋아. 좋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좋은 게 좋은 거야. 다 잘 갔을 거야. 킥킥!”

아삼은 상당히 취했는지 말이 많았다.

아삼에게는 적랑대 살수 열 명이 있다. 간자들이 아니라 진짜로 칼을 쓰는 살수들이다. 적랑대주 임지정이 선별해서 보내준 고마운 호위 무인이다.

아삼은 그들을 아걸에게 보냈다.

물론 그들에게는 호북성에서 일어날 피바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떠날 무렵까지만 해도 야천은 아걸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삼은 야천에 드리워진 암운을 읽었다.

허도기가 너무 조용하다. 아걸이 움직이는 것을 알고 있을 터인데, 손도 대지 않는다. 야천을 이용할 생각이 아니었나? 마인들을 부릴 생각이 없었나?

그것이 아니라면 숨통 끊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

맹수가 먹이를 노려보듯이…… 숨을 죽이고 지켜본다. 그러다가 화다닥 나타나서 단숨에 숨을 끊는다.

맹수가 나타나면 도주할 수 없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살려고 발버둥은 치겠지만 거의 잡힌다. 특히, 허도기 같은 맹수는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

아삼은 자신에게 몰아치는 피 냄새를 맡았다.

‘여기 있으면 다 죽어.’

중원에서 정체가 노출된 적랑대원이 가장 안전하게 숨을 곳은 어딜까? 그런 곳이 있나? 있다. 바로 아걸 곁이다. 아걸이 허도기에게 버텨 준다는 전제하에…… 아걸 곁이 가장 안전하다.

그래서 살수 열 명을 아걸에게 보냈다.

“아걸이 대방에서 큰일을 벌일 텐데, 손이 모자랄 거야. 가서 도와주고 와. 그때까지 여긴 별일 없을 테니까 안심하고. 별일 있으면 팔방주에게 도움을 청하지 뭐.”

살수 열 명은 안심하고 떠났다.

그 후에 이 사달이 일어났다.

야천 방주들이 죽어 나갔고, 적랑대원이 깡그리 소탕되었다. 일전통도 무너졌다.

그러면 다음 화살은 어디로 향할까?

“술! 술 안 가져와!”

아삼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자, 문이 열리면서 장정 두 명이 술독을 들고 들어왔다.

“아이고! 술 여깄습니다.”

장정들은 묵묵히 술독을 내줬다.

아삼은 술에 굶주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달려들어서 술독에 머리를 박고 술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꿀꺽!

술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히 방안을 울렸다.

“카아!”

아삼은 술에 대한 원을 푼 듯 헤벌쭉 웃으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바보 같은 놈들. 내가 이래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던 건데. 킥킥! 자신 있게들 움직이더니 결국…….”

“대주님, 몸을 피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삼에게 술을 날라 준 장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피하긴 어디로 피해, 인마! 피할 곳이 있어? 못 피해. 이미 정체가 드러난 간자는 이 세상에 발붙일 곳이 없는 거야.”

“저희야 그렇지만 대주님은…….”

“너흰 죽게 내버려 두고 내 몸만 빼내라고? 이놈, 이거 사람을 아주 개차반으로 보네?”

“그게 아니라…….”

“킥킥! 시끄럽다, 이놈아! 술맛 떨어지게 뒈지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너희도 이러고 있지 말고 술이나 마셔. 먼 길 가야 하는데, 술기운이라도 빌려야지.”

아삼이 키득거리면서 술을 마셨다.

아걸은 야천 대방에 있다. 하남성이다. 아삼이 있는 호북성까지 달려오지 못한다.

공격을 막아 줄 유일한 사람의 도움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면 어디 숨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아삼은 숨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피할 곳이 없다고 한다. 왜 피할 곳이 없나.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잘 숨어 있으면 되지 않겠나. 그런데 모든 걸 포기하고 술만 마신다.

적랑대는 아삼의 뜻을 안다.

아삼은 야천 적랑대가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자신들만의 대주로 만들 때 흔쾌히 승낙했다. 그때 이미 아삼은 오늘과 같은 일을 예견했다.

알고도 뜻을 받아들였다.

적랑대와 함께 죽을 생각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알면서도 적랑대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고맙다. 못난 수하들과 목숨을 함께 할 대주가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숨으라고 말은 하지만 옆에서 술을 마셔 주는 아삼이 더없이 고맙다.

“그때 참 웃겼어.”

아삼이 뜻 모를 말을 했다.

“뭐가 말입니까?”

장정이 물었다.

“내가 아걸 그놈한테 억지로 싸움을 시켰거든.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툴툴거리는 놈한테 일단 싸우라고 시위를 당겼단 말이지. 킥킥! 그때 그놈 똥 씹은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아삼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어렸다.

“난 그놈이 풍도곡 살귀들한테 당장 죽을 줄 알았는데, 용케 버텨 낸 거야. 동박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는…… 하! 서리형개에게는 뒈지게 당했는데, 죽지도 않고. 그때, 잘하면 저놈 물건 되겠다 싶었지. 정말 일홀도는 만들 수 있겠다 하고.”

아삼은 아걸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삼에게 아걸은 친아들이다. 나이는 손자뻘이지만, 자신이 손수 데리고 다니면서 키웠다. 아들이나 진배없다. 그런 놈을 죽음이 뻔한 싸움판에 내밀었을 때의 심정은 그야말로 개미굴처럼 바글바글 끓었다. 절대 편안하지 않았다.

이대로 초야에 묻혀서 한평생 보내는 건 어떨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

결국 활시위를 당겨 버렸지만…… 그 시위 당긴 일,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 몽설을 끌어내서 활검문 강조를 죽이지 않았다면, 아걸은 지금도 어느 허름한 마구간에서 말이나 돌보고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스스스!

방 안으로 낯선 무인 다섯 명이 나타났다.

“웃! 적이다!”

“나타났다!”

적랑대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사내들을 에워쌌다.

자신들이 낯선 자들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지만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낯선 자 중 한 명이 아삼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대주, 팔룡 휘하 적풍이라고 합니다.”

“적풍?”

적랑대는 적풍이라는 말에 슬그머니 검을 풀었다.

팔룡의 호위 무인들은 상당한 강자다. 그들의 무공이 십리를 능가한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니 더욱이 정보에 민감한 적랑대가 모를 리 없다.

적풍이 아삼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아걸이 몸을 피하라고 통보를 보내왔습니다.”

“키키! 그놈은 원래 오지랖이 넓어. 그럼 피하면 됐지, 여긴 왜?”

“저희 방주님, 그 통보를 받고도 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어. 아걸이 충고했으면 들었어야지. 뭔 똥배짱으로 버틴 거야? 지금은 폭풍이 몰아치는 계절이야. 이럴 땐 몸을 사려야지. 뭐하러 폭풍에 맞서.”

“대주님 때문에 맞섰습니다.”

“이건 또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내 살다 살다 별 거지 같은 소릴 다 듣네. 그놈이 죽은 게 왜 나 때문이야!”

“방주님이 피하셨다면 그자들, 전부 이리로 몰려왔을 겁니다. 아마 지금쯤 방주님 대신에 대주님이 죽었겠죠. 방주님은 그자들을 최대한 잡을 생각이셨지만 세 명밖에 잡지 못했습니다. 한 명이 여기로 오고 있습니다.”

“한 명? 우리가 쪽수가 몇 명인데 한 명 가지고 벌벌 떨어. 걱정하지 마. 자! 술! 술 한 잔 마셔!”

“정말 모르십니까!”

적풍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아이고 귀청이야. 이놈이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방주님이 이런 말씀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내 죽음은 아걸한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적랑대주의 죽음은 아걸을 비통하게 할 것이다. 아걸이 흔들린다. 야천을 공격한 무리가 누군지 모르지만, 허도기가 수작을 부렸다는 것은 너무도 빤한 것. 아걸이라고 무사할 거 같나? 곧 허도기가 온다. 전력을 다해서 허도기를 맞이해도 모자랄 판에, 흔들린 마음으로 허도기와 어떻게 싸워. 그래서 적랑대주 아삼을 살린다. 내가 이놈들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놓으면, 아삼이 살 수 있다. 만약 이놈들이 적랑대주에게 먼저 갔다가 온 것이라면 나는 개죽음을 당하는 것일 거고. 그래도 해볼 만하니 한다. 이래도 몸을 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삼의 눈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이놈들아! 너희들이 뭐라고 정의로운 척 흉내를 내고 그래! 너희들은…….”

“저희는 파락호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파락호에게도 의리는 있습니다. 그 의리 지킵니다. 저희는 대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아걸을 위해서 일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팔룡의 뜻에 따라서 대주를 보호할 겁니다. 대주께서 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주와 함께 죽습니다.”

“내가 피한다고 해도 모두 죽을 것 같은데.”

아삼이 피식 웃었다.

호위 무인 다섯 명은 아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이미 흑의 무인이 도착했다.

“아아악!”

밖에서 비명이 들린다.

그를 잡아 두려고 했던 적랑대원이 피를 뿌리면서 쓰러진다.

빨리 달려온다고 달려왔는데, 상대도 매우 빨리 달려왔다. 적어도 반나절은 따라잡았다.

그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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