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346화 (346/600)

#346화. 346. 第七十章 백척간두(百尺竿頭)(1)

휘이잉!

찬 바람이 불어온다.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바람이 호수 물결을 찰싹 후려치고 지나간다.

오늘따라 더욱 을씨년스럽다.

항상 호수만 보면 포근하다고 느꼈는데, 마음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서인지 도무지 정을 붙일 수가 없다. 예전의 포근함은 사라지고 없다.

방주가 이 호수 한가운데서 암살당했다.

대방 방주가 흘린 피는 아직도 작은 배에 묻어 있다. 뱃전에는 굳게 버티고 선 방주의 힘이 남아 있다.

쓰윽! 철썩! 쓰으윽! 철썩!

흑수혈검은 살짝살짝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을 쳐다봤다.

쭉!

호수에 드리운 낚싯대에서 찌가 갑자기 사라졌다.

“참 네놈도 어리석기는…….”

흑수혈검이 낚싯대를 잡아챘다.

먹이도 없는 빈 낚시를 무는 놈이라니. 어지간히도 굶었거나 아니면 눈이 멀었거나.

푸드덕! 푸드드득!

붕어 한 마리가 낚싯대에 딸려서 올라왔다.

손바닥만 한 놈인데, 힘이 무척 좋아서 낚싯대를 휘영청 구부려 놓았다.

흑수혈검은 낚싯바늘을 뺀 다음 붕어를 다시 호수로 돌려보냈다.

쉬잇! 풍덩!

붕어가 기세 좋게 떨어졌다.

흑수혈검은 지렁이도 끼지 않는 빈 낚싯대를 다시 물 위로 던졌다.

슷! 휘이잉! 휘잉!

찬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스스슷! 스스스슷!

매우 미세한 기척이 신경을 건드렸다.

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 시진이 채 안 되었는데, 살겁이 휘몰아친다.

‘빠르군. 쿳쿳!’

흑수혈검은 피식피식 웃었다.

상대가 이토록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은 이미 대방 안에 터를 잡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는데, 틈을 보이자 눈먼 붕어처럼 와락 달려든다.

방주님을 죽인 놈들!

흑수혈검은 공식적으로 대방 방주 직을 이어받았다. 야천 구방에 이미 공식 통보를 했다. 더불어서 대방 방주 직을 인정하고 싶은 않은 방주는 구룡회를 신청하라고 선전 포고했다.

흑의인 중에서도 방주를 벤 자만 아니면 누구든 자신이 있다. 일대일의 승부라면 흑의인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구룡회를 열어도 대방 지위를 지킬 자신이 있다.

각 방에 통보를 보냈는데도 구룡회를 열겠다는 신청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졌다. 앞에서 승부를 걸지 않고, 뒤에서 치기로 작심한 듯하다.

이런 행동도 예상했던 터, 놀랄 일은 아니다.

슷!

또 다른 움직임도 일어났다. 흑수혈검을 호위하고 있던 적랑대 살수 열 명이 꿈틀거렸다.

“내 손님이다.”

흑수혈검이 차게 말했다.

적랑대 살수 열 명은 저들을 감당하지 못한다. 암살이 아니고 무공으로 겨뤄야 하는 싸움이라면 더욱 불리하다. 또 흑수혈검을 위해서 싸우고 싶은 생각도 없을 것이다.

아걸이 흑수혈검의 손발이 되어 주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호위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흑수혈검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다.

그러니 사실 적랑대 살수들은 호위한답시고 따라다니기만 할 뿐,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런 사실은 야천 대방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십 살수가 굳이 비밀스럽게 움직이지 않은 탓이다. 벌건 대낮에도 내놓고 활보했다. 그러면서 공공연하게 흑수혈검을 위해서 죽을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야천 대방 사람들은 흑수혈검이 왜 이런 자를 곁에 두는지 몰랐다. 한심한 놈들을 옆에 두었으니 대방도 조만간 끝장날 것이라고 쑥덕거렸다.

이들은 나중에 아걸의 명을 쫓아서 팔방주가 남긴 것들을 거두려고 할 때는 무척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숨겨진 것들을 거두기 전에 대방 방주가 된 기념으로 겪어야 할 고통이 있다.

흑의인들의 암살 대상이 되는 것이다.

스으으읏!

흑의인 네 명이 부챗살처럼 넓게 퍼져서 걸어왔다.

그들은 곧장 앞으로 걸어왔다. 적랑대 살수가 흑수혈검 뒤쪽에 숨어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실,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살수들은 흑수혈검이 ‘내 손님’이라고 말한 후부터 검을 거둬 버렸다. 싸울 생각이 전혀 없는 듯 좌우로 쫙 갈라졌다.

흑의인들은 검을 거두고 물러서는 자에게까지 살수를 펼칠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오직 한 명, 흑수혈검만 칠 것이다. 대방 방주는 오늘로 종식을 고한다.

쑥!

낚싯대 찌가 또 사라졌다.

“이런 눈치 없는 놈이. 지금 잡히면 어쩌라는 거야.”

흑수혈검은 흑의인들을 무시하고 낚싯대를 잡아챘다.

눈치도 없고, 멍청하기도 하고…… 분명히 조금 전에 잡혔던 멍청한 붕어 놈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놈이다.

“이 호수에 멍청한 놈이 둘이나 있었구나. 훗!”

흑수혈검을 낚싯바늘을 뽑아낸 후 붕어를 다시 호수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낚싯대를 드리우지 않았다. 낚싯대는 땅에 툭 던져 버리고 일어섰다.

스으읏!

흑의인들이 일제히 검을 겨눴다.

그들의 움직임은 틀에 맞춘 듯 일정했다. 검을 잡는 모습부터 싸움을 준비하는 모습까지 자로 잰 듯 똑같았다. 네 쌍둥이가 동시에 검을 드는 것처럼 보였다.

동작 일체가 똑같다는 것은 흑의인 네 명이 연수합격을 한다는 뜻이다. 합격에 대해서는 서로 손발을 맞춘 상태일 것이고, 그것도 꽤 깊은 경지까지 수련했다.

스릉!

흑수혈검도 검을 뽑았다.

그는 본의 아니게 배수진(背水陣)에 섰다. 등 뒤가 호수이기 때문에 한 발짝도 물러서지 못한다.

“와 봐!”

흑수혈검은 마음을 흔들림이 없는 상태로 유지하고 모든 감각을 검에 집중시켰다.

불어오는 바람, 공기에 흔들림, 땅에 울림…… 모든 것을 듣는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단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고 전신 감각으로 느낀다.

쒯! 쒜에엑!

가장 양쪽 끝에 있던 자들이 먼저 움직였다.

좌측 끝, 우측 끝에 있는 자들이 흑수혈검을 노리고 검을 쏘아 냈다.

좌측 흑의인은 내리치는 검이다. 우측 사내는 쳐올리는 검이다. 정반대로 내리긋고, 쳐올린다.

쒜에엑! 쒜에엑!

가운데 선 자들도 검을 쏘아 왔다. 일체의 변식을 배제하고 가장 정직한 검, 찌르는 검을 구사한다.

흑수혈검은 검진에 포위되었다.

그는 마치 닭장 속에 갇힌 느낌을 받았다. 사방 어디로 움직이든 대나무로 만든 닭장에 갇혀서 목이 옥죄어 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에게 포위된 게 아니라 검에 포위된 것이다.

츠츠츳! 츠으읏!

사방에서 검이 거리를 좁혀 온다.

‘변화가 일어난다. 직하검(直下劍)과 상충검(上衝劍)이 교차하는 순간! 어떤 변화?’

흑수혈검이 변화가 일어날 시점을 눈치챘다. 하지만 검이 어떻게 바뀔지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타앗!”

흑수혈검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빠르게 검을 쳐 냈다. 귀신의 혼을 담은 귀혼십이검이 벼락처럼 퉁겨 나갔다.

파파파팟! 파파팟!

흑수혈검의 검은 무려 십여 자루로 쭉 불어났다.

상대 네 명이 쳐 내는 검보다 흑수혈검이 쳐 낸 검이 훨씬 많아 보였다.

까앙! 깡!

검과 검이 부딪히면서 요란한 쇳소리를 울렸다.

순간, 흑의인들이 검초가 홱 변했다. 직하검이 수평으로 뉘어지면서 오른쪽으로 빙 돌았다. 상충검도 옆으로 뉘어 쥐면서 왼쪽으로 돌았다. 흑수혈검의 등을 노리며 빙글 돌았다.

이들 두 명의 움직임은 무리에 맞지 않는다. 이들이 변화를 보이자, 가운데서 찔러오는 자들이 오히려 막혔다. 직하검을 구사한 자에 의해서 검을 더 찔러 내지 못했다.

까앙! 깡!

흑수혈검은 즉시 배와 등을 긋는 검초와 맞섰다. 거센 타격으로 두 검을 밀어냈다. 한데,

슈웃! 퍽!

검 한 자루가 땅에서 하늘로 쑥 쏟았다.

직하검을 쓰던 자가 지나가자마자 곧바로 검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낭중(郎中)을 거침없이 올려친다. 사내의 하물(下物)을 향해 검날이 날아온다.

“웃!”

흑수혈검이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순간,

써억!

검이 등을 그었다. 등 뒤로 돌려진 검은 막았는데, 그자가 역으로 되돌아서 쳤다. 흑수혈검이 하물에 정신이 팔린 동안, 거침없이 등을 긋고 지나갔다.

“크윽!”

비명은 또 다른 검을 불렀다.

푹! 푸욱!

직하검을 쓰던 자의 옆구리에서 정체 모를 검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거침없이 배를 찔렀다.

검을 찔러 오던 또 한 명의 검이다. 그들 두 명은 검초가 막힌 것이 아니다. 직하검을 쓰던 자가 앞으로 흐르면서 오히려 흑수혈검의 눈을 가려 버렸다.

털썩!

흑수혈검의 무릎이 풀썩 꿇렸다. 하지만 그는 금방 퉁기듯 일어섰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귀혼십이검 중 흡정강화(吸精降火)라는 검초를 전개했다.

쉬이잇!

검이 매우 빠른 속도로 흐르면서 흡입력(吸入力)을 일으켰다. 쇠로 된 병기를 검으로 끌어당겼다.

쒜에엑!

상대방의 검이 다가온다 싶은 순간, 검에 실린 진기가 거센 힘으로 흡력을 털어 냈다. 딸려오던 쇠붙이를 오히려 바깥으로 퉁겨 냈다. 그리고 조용한 검, 귀신처럼 고요한 검이 바로 뒤따라갔다.

까앙! 깡깡!

흑의인들은 흡력 뒤에 숨겨진 암검(暗劍)을 비교적 가볍게 퉁겨 냈다.

“후우욱!”

흑수혈검은 큰 한숨을 토해 냈다.

임기응변으로 흡정강화를 펼친 덕분에 급공은 피했다. 일 초에 목이 떨어지는 것은 막았다. 하지만 다음 공격은 막지 못할 것이다. 이들과는 간신히 한 명과 싸울 수 있을 뿐인데, 네 명이…… 그것도 진법에 기초해서 합공하니 견딜 재간이 없다.

흑수혈검의 죽음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나만 죽으면 다 끝나는 건가?”

흑의인들은 말이 없다. 이들은 정말로 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면서 일절 말을 하지 않는 것도 힘든 노릇인데…… 정말 길이 잘 들여진 살인귀다.

“하아!”

흑수혈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스으으읏!

흑수혈검이 등지고 있던 호수에게 작은 파랑이 일어났다.

누가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물결이 번지더니 작고 둥근 물체가 불쑥 솟구쳤다.

물체는 점점 커졌다. 머리카락이 보이고, 이마가 보이고, 코가 보였다. 그리고 입까지 드러났을 때…… 비로소 물에서 나온 사람이 아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꿈틀!

흑의인들이 다소 놀랐는지 검잡은 손에 요동이 일었다.

저벅! 저벅!

호수에서 솟구쳐 나온 아걸이 호수를 걸어 나왔다.

목이 드러나고, 가슴이 보였다. 배가 보이고, 다리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호숫물이 무릎 정도에 닿을 때부터 물을 가르는 철퍽 소리까지 울렸다.

아걸은 수달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가죽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서 전신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우람하지는 않지만 단단한 몸이다.

아걸이 흑수혈검을 보면서 말했다.

“맞지? 공격해 온다고 했잖아.”

흑수혈검이 피식 웃었다.

“설마 나 정도를 죽이기 위해서 누가 나타날까 싶었는데, 정말로 나타났습니다. 이놈들, 바보 아닙니까? 이미 가질 건 다 가졌고. 나 정도는 걸러도 충분할 텐데.”

“가질 것을 다 못 가졌다는 거겠지. 대방에 아주 귀한 보물이 있는 거 아냐?”

“글쎄요. 제 눈에는 별로…….”

스릉!

아걸이 칼을 뽑았다.

아걸이 뽑은 칼은 장도(長刀)다. 본인의 애병인 반철도가 아니다. 팔방에서 쓰던 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저놈들 중 한 명은 대방을 공격할 때 거들었던 자겠지? 대방을 친 자는 여기 없어. 그자는 이자들보다 훨씬 강해. 마지막 부분은 양보해야겠지?”

“그래 주시면.”

“그러지. 자, 할까? 서로 할 말도 없을 텐데.”

스윽!

아걸이 칼을 들어 올렸다.

순간, 흑의인들이 다시 움찔거렸다.

아걸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아걸이 방갓을 벗었기 때문에 알아보지도 못한다. 다만 이 한순간에 지독하게 강한 도귀(刀鬼)를 봤기 때문이다.

아걸은 지독하게 강하다

너무 강해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느 방향에서 어떤 공격을 해와도 반드시 반격당한다. 고수가 아닌 자들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흑의인들은 한 번 쓸어보는 것만으로도 아걸의 무거운 경지를 알아봤다.

“후! 후우!”

여기저기서 거친 숨이 튀어나왔다.

흑의인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복면은 그들이 흘린 땀으로 인해 흠뻑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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