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347. 第七十章 백척간두(百尺竿頭)(2)
적랑대 살수 열 명은 흑의인들이 다가오는 순간 자리를 비키고 뒤로 물러섰다.
일면 흑수혈검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뒤로 물러선 후, 팔짱 끼고 싸움을 지켜본 것이 아니다. 전장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흑수혈검과 흑의인의 싸움을 아예 보지 않았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적랑대 살수가 흑의인보다 무공이 떨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장기가 있다. 정탐, 급습, 살인…… 이런 부분에서는 그들이 전문가다.
누군가가 급습을 해 올 경우,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주변에 누가 숨어 있나 세심히 살핀다.
흑의인들은 무리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흑의인 네 명이 함께 온 것도 무리라면 무리겠지만, 딱 그 정도다. 자신들보다 약한 자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는다.
흑수혈검을 공격하는 데 흑의인 네 명이 온 것만 해도 과하다.
저들 네 명이 동시에 온 것은 아마도 흑수혈검 곁에 있을 방갓무인을 대비해서다.
방갓무인과도 싸울 예정이다.
십 살수가 수색하는 것은 싸움에 가담하는 자가 아니다. 지켜보는 눈이다. 누군가 흑의인들의 동향을 보고하는 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스스스슷! 스스스슷!
십 살수는 빠르게 움직이면서 누군가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은 모두 뒤졌다.
흑수혈검이 검 두 번을 맞았을 때, 십 살수는 수색을 완료했다. 약속된 장소에 열 명이 모였다.
‘없지?’
‘없다.’
각기 맡은 구역을 뒤져 본 결과 숨어 있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텅!
십 살수가 땅을 힘껏 밟았다.
아걸은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아걸은 방갓을 쓰지 않았다. 쓸 필요가 없다. 이곳에서 자신의 얼굴을 본 자는 모두 죽는다.
다행스럽게도 죽일 자들은 흑의인 네 명에 국한된다.
흑의인들이 수하를 데리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많은 살생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아걸은 흑의인들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저벅! 저벅!
걸음마다 도화(刀花)가 피었다.
보통 사람이 걷듯이 편안하게 걸어오는데, 발바닥에서 칼 꽃이 피어났다. 땅에서 칼이 솟구쳐 발 전체를 휘감는다. 발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보듬어 안는다.
오른발을 내디디면 오른발이 칼이 되고, 왼발을 내디디면 왼발이 칼이 된다.
아걸의 모든 움직임은 도신일체 속에서 이루어진다.
극도의 정신집중, 몰안이 형성된다. 모든 감각이 잊히면서 오직 하나의 현상만 일어난다. 지금 하는 일에 신경과 감각이 총집결한다. 제대로 된 오체진감이다.
아걸과 칼은 한 몸이다.
이 모든 것이 일상생활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칼이 된다.
아걸은 흑의인을 향해 걸어갔다.
츠읏! 스스슷!
흑의인 가운데 두 명이 뒤로 빠졌다. 가장자리에 있던 두 명은 반대로 거리를 좁혀 왔다.
흑의인들은 아걸을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러설 생각도 없다. 패배가 명확한 싸움이라도 계속 진행한다. 아걸과 일전을 겨룰 것이다.
흑의인들은 오직 전진밖에 모른다.
슷!
아걸은 칼을 무심히 떨궜다. 칼에 아무런 힘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떨궜다.
움직이지 않을 때 아걸은 아무런 기운도 드러내지 않는다.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에 칼을 걸어 놓은 것처럼 아무 위협도 주지 않고 서 있을 뿐이다.
아걸은 강렬한 살광을 드러내지 않는다. 들끓는 투지, 싸우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열기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공격해 오면 그대로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저런 자세에서 어떻게 반격을?’
물론 어떤 자세에서도 반격은 가능하다. 다만 속도 문제가 따른다. 준비된 자세와 준비되지 않은 자세는 속도 면에서 거의 두 배 차이가 난다.
아걸은 기수식만 취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걸음을 옮길 때 발끝마다 도화를 피워 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극과 극의 모습.
조금 전까지 극강의 칼이었던 사람이 지금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돌변했다.
흑의인들도 급변한 모습에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지금 아걸 모습은 너무 공격하기 좋다. 온몸이 허점투성이다. 일 대 일이라면 여전히 망설이겠지만, 혼자가 아니다. 동료가 셋이나 더 있다. 사 대 일이라면…….
스스스스슷!
좌우에 있던 두 명이 빠르게 검을 쳐 왔다.
아마도 이들이 펼칠 수 있는 신법 중에서 가장 빠른 신법을 취했을 것이다.
아걸이 방어할 틈을 주면 안 된다. 칼을 들어 올리기 전에 초식이 터져나가야 한다. 그래도 아걸이 빠를 것이다. 하지만 옆에서 세 명이 받쳐 주면 이긴다.
그들은 흑수혈검을 공격했을 때처럼 한 명은 직하검, 한 명은 상충검을 사용했다.
가운데 있던 두 명은 검을 곧게 찔러 왔다.
제비 두 마리가 나란히 날아가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해서 연자비(燕子飛)라고 부르는 합격술이다.
아걸은 지극히 위험한 상태인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예 칼 쓰는 법을 잊어버린 듯했다.
‘위험!’
흑수혈검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지금쯤은 칼을 들어 올렸어야 한다. 아니, 그래도 방비하기는 늦었다. 검 네 자루를 동시에 상대하려면 상대보다 빠르게 칼을 쳐 내야 하는데…… 전혀 싸울 뜻이 없다.
‘저러다가 당하는 거 아냐?’
아걸이 당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영락없이 당하는 수순이다.
쒯!
직하검이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떨어졌다.
아걸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변초를 일으키지 않고 바로 공격해도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순간, 아걸의 어깨가 출렁 움직였다.
푹!
아걸의 장도는 어느새 흑의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어, 언제!”
흑수혈검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토해 냈다.
“꾹! 끄윽!”
직하검을 내리치던 흑의인이 입으로 붉은 피를 쏟아 냈다.
그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졌다. 자신이 언제 당했는지도 모른다는 표정이다.
직하검이 떨어질 때, 아걸은 흑의인을 향해 두 걸음을 다가갔다. 흑의인이 다가서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다가갔다. 그리고 정확히 가슴을 찔렀다.
다가오고, 마주쳐 가고.
흑의인은 아걸이 다가오는 경우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럴만한 기미가 전혀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두 걸음 앞에 사람이 서 있다.
아걸이 줄여 버린 거리, 시간 차이는 흑의인을 죽음으로 밀어 넣었다.
파앗!
아걸이 장도를 빼냈다.
동시에 밑에서 위로 검을 쳐올리는 자, 상충검을 쓰는 자에게 쏘아갔다.
두 사람의 거리는 세 걸음. 세 걸음이 단숨에 좁혀진다.
아걸은 그를 향해 지나가며 건드리듯 가볍게 장도를 휘둘렀다.
까앙! 깡!
검과 검이 부딪쳤다. 연자비가 부서졌다.
장도로 검 두 자루를 가격했는데, 검이 유리로 만든 듯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연자비를 부숴 버린 칼이 상충검 어깨를 후려쳤다.
쒸익! 퍼억! 빠아아악!
장검이 어깨를 파고들어 가슴까지 깊게 갈라냈다. 살이 패는 소리보다 뼈가 갈라지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크윽!”
상충검을 쓰는 흑의인은 검을 쳐올리던 자세 그대로 빙글 돌아 등부터 무너졌다.
흑의인은 쓰러진 후에도 계속 검을 쳐올렸다. 하지만 검에 닿는 것은 없다. 그는 이미 절명했다. 절명한 상태에서도 생전의 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검을 쳐올린 것이다.
스읏!
아걸이 흑의인 두 명을 향해 돌아섰다.
흑의인들이 재빨리 부러진 장검을 버리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아걸은 다시 칼을 내려트렸다.
그는 죽은 상충검에게 걸어가서 그가 쓰던 검을 빼내 흑의인에게 던졌다.
쉬익! 툭!
검이 흑의인 발밑에 떨어졌다.
아걸은 직하검을 쓰던 자에게도 걸어갔다. 그리고 먼저와 마찬가지로 검을 빼내서 다른 흑의인의 발밑으로 던졌다.
흑의인들은 아걸의 뜻을 깨닫고 슬그머니 검을 집어 들었다.
“일 대 일이면 될까?”
아걸이 흑수혈검을 쳐다보며 말했다.
“충분합니다.”
흑수혈검이 대답했다.
“상처는?”
“이 정도야. 마무리, 양보해 주시죠.”
“그럼 해 봐. 왼쪽? 오른쪽?”
“오른쪽으로.”
“풋!”
아걸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왼쪽에 선 자를 칼로 가리켰다.
칼끝이 까딱까딱 움직인다.
왼쪽에 서 있는 흑의인에게 옆으로 비키라고 말한다.
왼쪽에 서 있던 흑의인이 옆 동료를 쳐다봤다. 옆에 선 흑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아걸의 뜻을 안다. 흑수혈검과 흑의인, 단둘이 싸우게 하려는 거다.
흑의인도 이런 싸움이라면 십분 받아들인다.
아걸이 언제까지 개입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흑수혈검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들은 오늘 망했다.
흑수혈검과 방갓무인을 다 같이 잡겠다고 네 명이 왔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놈에게 두 명이 격살당했다. 놈의 무공으로 보면 남은 사람도 곧 쓰러진다.
이런 마당에 일대일 대결을 벌여 주니 오죽 좋은가.
왼쪽에 선 흑의인이 옆으로 세 걸음 물러섰다.
아걸 역시 장도를 호숫가에 푹 박아 놓고 옆으로 두 걸음 물러섰다.
두 사람 사이의 싸움에 전혀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눈썰미는 있지. 너! 방주님을 해칠 때 배에 타고 있던 놈, 맞지?”
“…….”
흑의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흑의인의 기습을 받던 날, 자신이 한 명을 죽였다. 아걸이 한 명을 죽였고, 방주가 죽으면서도 한 명을 데려갔다. 남은 자는 두 명, 그중 한 명이 이 자다.
“맞다, 틀리다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그래도 흑의인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더니 검을 곧추세웠다.
“후후! 부인해도 내 눈은 못 속여. 네놈이 맞아.”
흑수혈검도 검을 들었다.
흑의인들은 체형이 비슷하다. 모두 흑의를 입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흑수혈검은 흑의인을 구분한다. 똑같은 모습일지라도 사람은 각기 다른 느낌을 풍긴다. 체형이 비슷하다고 해도 틀림없이 차이는 존재한다.
“또 한 놈은 어디 있지?”
흑수혈검이 물었다.
방주를 벤 자, 이자들보다 훨씬 강한 자!
스읏!
흑의인은 대답 대신 발을 옆으로 옮겼다. 게가 옆걸음질하듯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지금은 사 대 일로 싸우던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흑의인도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흑수혈검은 야천 대방 제일 칼이었다. 그 말은 야천 제일 칼이라는 말과도 같다.
“일은 저질러도 입으로 말할 용기는 없다는 건가? 한심한 놈!”
흑수혈검이 계속 도발했다.
원래 흑수혈검은 말이 많지 않다. 아니, 오히려 말수가 적다. 그가 구사하는 귀혼십이검은 귀신처럼 조용한 가운데 터져 나와야 한다. 신비로움이 깨지면 오히려 불리하다.
그런데도 계속 도발한다.
혹여 흑의인이 한마디라도 하면 거기서 어떤 단서를 잡을 것 같아서다.
이들은 굉장히 신비하다. 문파도 알 수 없고, 사용하는 검초도 낯설다. 그러면서 하나같이 절정검을 구사한다. 흑의인 네 명이 대방 옆에 있었다면 야천은 벌써 하나로 통일되었을 것이다.
스읏!
흑의인이 다시 옆으로 움직였다.
어떤 말을 해도, 어떤 내용으로 마음을 흔들어도 오직 싸움에만 집중하겠다는 뜻이 엿보인다.
‘틀렸군.’
흑수혈검도 검을 고쳐 잡았다.
이제부터는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다.